124화 공주를 만나다 (2)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 지었다.
"하하, 내공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하고요. 그리고 사실 이게 더 중요한 건데 끊임없이 자신의 기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오행상생의 원리를 머리에 염두에 두면서 말이죠. 어찌 보면 사랑하는 여인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는 모습과 비슷한 원리랍니다."
"그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끈질기게 구애를 해봤나 봐요? 그런 비유를 쓰는 걸 보니."
물론 주성진은 해봤다. 전생에서. 하지만 오래전 십대 때였다.
"아, 그게 오래 전에 잠깐 해봤습니다."
"오래 전이라고요. 내가 보기에 그대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오래전이라 하면 언제 적을 말하는 건가요? 설마 태어나자마자부터인가요?"
그녀가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진다.
'어휴, 공주가 옴팡진 데가 있네.'
"제가 열 살 때쯤입니다. 제 인생의 거의 절반 전이니 제 기준으로는 오래된 것이랍니다."
어쨌든 대충 둘러대었다. 주성진은 본인의 임기응변에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군요. 뭐 나는 경험이 없어서… 한데 열 살 때도 불꽃같은 사랑을 할 줄은 몰랐군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겠지요. 혹시 모르죠. 공주님에게도 곧 그런 일이 불어닥칠 줄……."
공주가 불쑥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과 얼굴이 거의 맞닿을 지경이다.
"호호, 그런 일이 곧 생길 지도 모르겠는데요?"
주성진의 가슴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내가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냈나보다.'
"저, 공주님, 공주님은 어떻게 무공을 배우게 되었습니까?"
"갑자기 화제 전환하는 건가요? 뭐, 좋아요. 기회는 언제든 만들면 되니까."
"……."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는데 특히 무공서적을 읽고는 무림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어요. 그걸 기화로 여러 사람께 졸랐지요.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따지고 보면 특별히 한 분에게 배운 건 아니에요. 아, 나도 궁금한 게 있어요. 그대의 내공이 어느 정도 되죠?"
주성진은 대략 자신의 내공이 오 갑자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더 될 수도 있고.
'음, 이 갑자라고 하면 믿지 않을 거야. 이기어검의 고수라고 소문이 났으니.'
"운 좋게 기연이 좀 있었습니다. 대략 삼 갑자는 될 것 같습니다."
"호호. 내가 이 갑자인데 나의 두 배가 되는군요. 대단해요."
"저는 삼 갑자라고 했습니다만."
그녀가 주성진 눈앞에서 그녀의 가늘게 긴 손가락을 흔들어 대었다.
"한 갑자 낮춘 거 다 알고 있어요. 누구는 일부러 낮추는데 나는 이 갑자 내공 중에 반의반도 사용하지 못하니……."
주성진은 언뜻 그녀가 늪이라고 생각했다. 빠지면 빠질수록 헤어날 수 없는.
'야, 이거 말조심해야겠어. 자칫 뼈도 못 추리겠어. 하긴, 음모와 귀계가 판을 치는 궁궐에서 생활하다 보니 저절로 익힌 습성이겠지. 상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건 어쩌면 그게 생존의 방법일 수도 있고.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왜 내공을 다 사용하지 못합니까?"
"그거야 깨달음이 없어서 그런 거죠. 어디 진득하게 폐관 수련이라 하면 모르겠는데 늘 바쁘니까요. 수시로 아버지가 부르기도 하고요."
"아, 공사다망하시군요. 너무 조급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녀가 갑자기 팔짱을 켰다.
"내게 할 말이 그것밖에 없나요? 마음에도 없는 위로의 말 하지 말고 실제 도움 되는 말을 해달라고요. 그대는 고수니까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하하. 제게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배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주성진에게 떠오른 방법이 하나 있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혈 자리를 주물러 활성화하고 필요에 따라선 침술을 쓰는 거였다.
하지만 지체 높은 그녀에게 그 방법을 썼다가는 목이 달아나도 여러 번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황제의 금지옥엽이라고.'
"그대는 상인인데 나처럼 바쁘지 않았나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은데 어떻게 내공을 늘릴 수가 있었죠? 도대체 비결이 뭔가요?"
주성진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만 지체했다간 또 그녀에게 잔머리 쓴다고 핀잔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주님보다는 시간이 있었고요.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을 겪다 보니 내공을 빨리 늘릴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싸우다 보니 내공이 늘었다 그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몸 안에 아직 흡수되지 않았던 영단의 기운이 모조리 활성화된 것이죠."
이번만큼은 그녀는 바로 되받아치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음, 저자의 말이 사실인 것 같은데… 나도 대내 금의위 위사나 동창의 고수들에게 저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들과 저자는 질적으로 달라. 분명 감춰 둔 수가 있을 거야.'
"이봐요. 나를 봐요. 언제나 살해의 위협에 사는 내가 불쌍하지 않나요? 많은 사람이 날 동경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실상은 그게 다가 아니에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요. 음식도 함부로 먹지 못하고."
주성진은 그녀가 짓고 있는 불쌍한 표정이 연극인지 사실인지 헷갈렸다.
'뭐, 반은 사실이고 반은 연극이겠지. 황제에게 조언하는 건 분명 그녀가 좋아서 하는 일일 거야. 그리고 그녀의 조언 때문에 원수가 된 자들이 많이 생긴 것이고.'
"혹 임독양맥 타통은 하셨습니까?"
"그게 불완전해요. 어릴 적엔 타통이 되었는데 그간 불순물이 쌓여서 시원스럽지가 못해요. 무슨 방법이 있는가요?"
"공주님, 극한의 공포를 한번 느껴보시지 않겠습니까? 단, 기절하면 절대 안 됩니다. 살려는 의지로 악착같이 버터야 합니다. 그러면 몸이 반응할 겁니다. 그러고 나서 삼일 정도는 반드시 운기조식을 해야 하고요."
"……."
"안 그러면 흰머리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달리 말해서 늙는다는 말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하면 임독양맥은 타통되어 있을 겁니다."
공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데도 그 모습이 주성진의 눈엔 매혹적으로 보인다.
'미치겠군…….'
"정말인가요…? 하긴, 사람이 위기에 빠지면 없던 힘도 생긴다고 하더군요. 혹 오줌을 지리는 건 아니겠죠?"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요?"
주성진은 손을 흔들었다.
"반드시 됩니다. 안될 수가 없습니다."
"효과가 없으면 당신을 죽일 거예요. 알겠죠?"
"그럼 다른 방법을 쓰겠습니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절 죽이십시오."
주성진이 말한 다른 방법이란 혈 자리 주무르기와 침술이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내 내공의 기운을 공주의 기운에 맞춘다면… 음, 그러려면 그녀의 내공심법을 알아야 하는데 과연 가르쳐줄지 모르겠다.'
주성진이 생각한 방법은 그녀의 단전에 손을 얹고 자신의 내공을 그녀의 혈도로 운행하는 방법이었다.
자칫 내공을 회수하지 못하는 위험이 있을 수 있으나 그는 자신의 내공을 믿었다.
한데 갑자기 뭔가 많이 손해 보는 느낌이다.
'내가 왜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해야 하는 거지? 난 어디까지나 그녀의 목숨을 구한 은인인데 말이야. 만일 내가 적의 배 2척을 두 동강 내지 않았다면 공주는 물론이고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을 거라고.'
"음, 좀 생각해 보겠어요. 주 상단주, 제게 시간을 얼마간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내게 극한의 공포를 주려는 건 이기어검을 쓰겠다는 말이겠죠?"
주성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다시 고개를 끄떡였다. 방법이야 많았지만, 공주의 의도에 따르고 싶었다.
"네, 그렇습니다. 공주님."
그때였다. 문밖에서 이한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이한동이 들어와 주성진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갓 구운 생선과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한동이 주성진을 보고 히죽 웃는다.
"주 상단주, 실은 공주님이 이 시각에 들어오라고 하셨다오. 그러니 날 원망 마시오. 난 불청객이 아니외다. 하하."
이한동은 공주 앞에서 스스럼이 없었다.
'음, 둘이 친밀한 관계인가 보군. 공주가 의외로 털털한 구석이 있나 보네. 하나 좀 고약한데, 그가 날 놀리는 말투가…….'
"아이코 장군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제가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농담이었소. 실은 공주님께서 내가 배석한 자리에서 그대와 여러 일을 논하고 싶어 하시오. 딱딱하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술 한잔하면서 가볍게 말이오."
"아, 네. 부족하지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술은 가볍게 한잔하고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공주가 살짝 발그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 상단주, 현 무림을 어떻게 보세요?"
너무 포괄적이지만 그렇다고 공주에게 설렁설렁 말할 수는 없다. 자칫 경을 칠 수도 있었다.
주성진은 생각을 가다듬고서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상입니다."
"잘 들었어요. 나랏일과 무림은 별개라고는 하지만 무 자르듯 경계가 확실한 건 아니에요. 이번에 나를 시해하려는 자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네, 그렇습니다. 특히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살인과 노략질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입니다. 더구나 화탄을 쓴 행위는 더더욱 용서할 수가 없죠."
공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요. 그런 자들을 용서할 수 없죠. 아주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들이 무림인인지라 토벌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요."
"현상금을 내걸면 어떨까요? 기왕이면 듬뿍 많이 말이죠. 물론 총무련에서도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 단심맹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건 무림 내의 문제이고 나라에서 반도로 규정하고 현상금을 내건다면 관심 있어 하는 자들이 많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다만 나라의 재정이 문제인데, 그대 같은 상인이 도와준다면 모를까……."
주성진은 뭐든 엮으려는 공주의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헤헤, 저는 빼 주십시오. 그간 많은 일을 알게 모르게 해왔습니다."
"녹림의 일을 말하는 건가요?"
"네. 그것도 있고, 요번 일도 그렇고……."
주성진은 말을 하며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일락 말락 미소 짓는 게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보통내기가 아니야.'
"뭐든 계산적으로 생각하며 오히려 손해라고요. 그럴 땐 통 트게 수락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는 더 좋아요."
"아, 그런가요? 제가 생각이 짧은 것 같습니다."
주성진은 말을 그리했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흥, 만약 내가 수락했다면 또 다른 요구를 추가했을 거야. 뭐야, 거지도 아니고… 내게 원하는 게 너무 많은데? 황궁에 공주의 적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들과 척을 지지 않으려고 공주와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저렇게 나오면 기회를 봐서 나도 실속을 챙겨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