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공주를 만나다 (1)
잠시 후 이한동이 나룻배에 피신하고 있는 공주를 데리러 떠났다.
북경에 빨리 돌아가려면 적의 해적선을 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배를 운용하는 건 여객선의 선원 일부를 차출할 거고.
육숭이 생각에 잠긴 주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시오?"
"아, 그냥 이것저것 생각했습니다. 그나저나 여객선이 침몰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생존한 승객들을 데리고 강둑으로 이동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이니까요. 안 그랬으면 피해가 훨씬 클 뻔했습니다."
"선원들과 금의위 위사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승객들을 많이 구했소이다. 아까 이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공주님께서 승객들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더이다. 본인은 괜찮다고 하며……."
주성진은 공주의 마음이 올곧은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잘된 일입니다. 아까 이 장군이 놈들의 정체를 알고 있던데 육 선배가 실마리를 주신 겁니까?"
"그렇소. 내가 저들의 정체를 이야기하니까, 대뜸 단심맹이라고 하더이다."
"그렇다는 건 황실에서 무림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말이네요."
육숭이 고개를 끄떡였다.
"내 생각에 꽤 깊이 알고 있는 듯하오. 한데 우리는 어찌하면 좋소?"
"음, 공주께서 이리 오면 배를 양보하고 무한까지 도보로 가야겠지요. 혹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아니요.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다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리되지 않을 듯하기도 하고… 아까 이 장군이 공주가 타고 있는 나룻배로 돌아가면서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길래……."
주성진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 그래요? 한데 이 장군은 소림사 출신인데 술을 마셔도 되나 보네요."
"주 상단주, 곡차라는 걸 못 들어봤소? 그게 바로 술이요. 도가나 불가에서 간혹 마시오. 특히나 그는 세속에 나와 있는데 세속의 법을 따라야지 않겠소이까?"
"하긴, 그러네요. 음 그나저나 만약 무한까지 공주님과 같이 가게 되면 불편할 것 같은데……."
육숭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대는 상인인데 이 기회에 공주님께 눈도장을 찍어두면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소?"
"하하. 언뜻 보면 그렇습니다만 아까 이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공주님의 적이 많다고요. 그러니 자칫 그리하다간 공주님의 반대 세력에 찍힐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사를 잘하려면 한쪽에만 정성을 기울이면 안 됩니다. 이쪽, 저쪽 두루 발을 걸쳐 놓아야 한다니까요."
"하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대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소. 다만 그게 쉬울 것 같지 않소이다. 자칫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신세가 될 수 있소이다.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 하는 자들은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소이까?"
주성진은 육숭이 세상 물정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건 저도 유념하고 있습니다. 회색분자로 찍히지 않아야겠지요. 하지만 여러 곳에 비빌 언덕을 만들어 놓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화무십일홍이라 하지 않습니까? 영원한 권력은 없는 법입니다."
"……."
"그건 그렇고 이 기회에 장사를 한번 해보시지요. 저보다 잘할 것 같은데요."
"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전에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오. 다만 자본이 없어서……."
"사업에 관심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육숭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곧장 시무룩해졌다.
"이런, 내가 장사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닌데… 빨리 불진부터 찾아야 한단 말이오."
"제 느낌에 고물상에 그대로 있을 겁니다. 신품이면 모를까, 오래된 물건일수록 새 주인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요."
"뭐 그러길 빌겠소이다. 아, 나룻배가 다가오고 있소이다."
휙!
순간 세 여인이 갑판 위로 날아올랐다. 주성진과 육숭의 눈이 일제히 그녀들을 향했다.
"공주님이시오. 예를 갖추시오."
세 여인 중 오른쪽에 있던 중년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주성진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생각했다.
'뭐야, 공주가 무공을 익히고 있었네! 이거 상상도 못했는데… 황궁의 꽃인 공주가 무공을 익혔단 말이지. 음, 경공술이 날렵한 걸로 봐서는 무공도 오래전부터 익힌 게 틀림없어. 저런 몸놀림은 한두 해 익힌다고 절대 재현할 수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 순간 듣기 좋은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린다.
"예를 거두세요. 괜찮아요."
육숭과 천상일 그리고 임호풍은 곁눈질로 주성진의 눈치를 본다.
주성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그러자 눈앞에 공주의 늘씬한 자태가 눈에 쏙 들어온다.
'헉, 이럴 수가… 대단한 미인이구나.'
주성진은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신 주성진이라 하옵니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들의 소개가 연이어 이어졌다.
"반가워요. 편하게 절 대해주세요. 여긴 궁도 아니고 그대들은 무인들이니. 아, 한 분은 정체가 애매하네요. 무인인지, 상인인지……."
주성진이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사슴같이 큰 눈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공주마마. 무공을 익힌 상인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호, 무공을 익힌 상인으로 봐 달라. 그대는 좀 있다가 나와 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군요."
그러면서 공주가 차례로 주성진과 일행을 바라본 뒤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우선 여러분께 고맙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요."
주성진이 대표로 나섰다.
"아닙니다. 저희가 으레 나설 일이었습니다. 불의를 보고 이를 묵인한다면 무공을 익힌 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그래도 나로 인해 이런 일이 야기된 것 같아 마음 아파요. 애석하게 죄 없는 백성들이 많이 희생되었어요."
주성진은 이한동에게 그녀를 원망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공주마마. 그게 어찌 공주님의 잘못이란 말입니까. 공주님이 위험을 알고도 배에 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잘못이 있다면 무도한 자들! 바로 그놈들이죠."
공주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당연히 위안을 받아서 일 것이다. 설사 그것이 마음에 없는 입에 발린 말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세상을 두루두루 살펴보고 싶었는데… 난 무엇보다 백성들의 삶이 어떤지 알고 싶었어요.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다고요."
"아, 네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보고만 받아서는 실상을 모를 수도 있으니까요. 아! 제 말뜻은 보고가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보고한 내용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공주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돌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런데 화탄이라니… 나라에서 엄격히 사용을 금하고 있거늘."
"저도 태어나서 살상용 화탄은 처음 보았습니다. 피해가 난 건 누구 봐도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어찌 일개 해적 놈들이 화탄을 소지하고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공주님."
공주가 손을 흔들었다.
"너무 날 위로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지 혀가 매끄럽게 굴러가네요. 미안, 이건 칭찬이지 그대를 흉보려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아. 네……."
"어머, 금의위 위사들이 배에 오르네요. 여기가 정리되는 데로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요."
결국 그녀의 한마디로 인해 주성진과 일행들은 배에 남게 되었다.
거기엔 만일을 대비해 주성진과 일행들의 힘을 이용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이를 모를 사람은 배 위에 아무도 없었다.
* ? ? * ? ? *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두둥실 떠가는 배 안에서 일남일녀가 마주 보고 있었다.
툭!
순간 황 촛불이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렸던 촛농이 떨어져 내리며 소리를 냈다. 주성진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공주님, 지내시기에는 불편함이 없습니까?"
"만족해요. 그리고 이래봬도 나도 무공을 익혔다고요. 무공을 익힐 땐 아주 악조건 속에서도 있어 봤다고요. 물론 실제는 아니고 진법 안이었지만."
주성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하니 그녀의 입에서 진법이 거론될 줄 몰랐다.
'허허, 참… 황제의 딸이 무공을 익힌 것도 놀랄 일인데 이번엔 진법까지… 내가 아는 상식이 다 깨지는구나. 구중궁궐 안에 도대체 뭐가 도사리고 있는 거야.'
진법 안에서 무공을 익힌다는 자체가 주성진에겐 놀람 자체였고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상당히 획기적인 생각이야, 누가 생각해낸 건지 모르겠지만 존경스럽구나.'
"공주님, 진법이라고요?"
"그래요. 육갑오행진 안에서죠. 육갑의 상충상합작용과 오행의 상생상극 작용으로 천지가 뒤틀리는 환영이 일어나는 거죠. 호호."
"그러니까 일종의 미혼진이나 환영진 같은 것이군요."
공주가 갸름한 턱을 끄떡거렸다. 그 모습이 촛불 아래에서 그렇게 고혹적일 수가 없다.
'음, 이거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그래요. 혹 진법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잘 모릅니다만, 제가 오행상생의 원리는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공주가 의아해했다. 토끼 눈을 한 채로.
"몸소 실천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제가 오행상생의 원리를 이용해 내공을 변형시킬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주성진은 자신의 찻잔을 높이 쳐들어 거꾸로 뒤집어버렸다.
찻물이 탁자 위에 쏟아져 내린다. 공주는 주성진이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감히 자신 앞에서 물을 쏟다니…….
바로 이때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성진이 팔을 앞으로 뻗자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불어 닥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앗…….'
떨어지는 물들이 갑자기 얼음알갱이로 변해버렸다.
'아, 우박이 떨어지는 것 같아…….'
그녀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팅팅!
얼음알갱이들이 탁자에 부딪쳐 살짝 튀어 올랐다.
그 순간 주성진이 또다시 손바닥을 뻗었다.
그러자 주성진의 손바닥에 자석이 달린 듯, 얼음알갱이들이 모조리 주성진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니, 저 짧은 순간을 포착해 허공섭물을 펼치다니, 저 자는 정말 대단한 무위를 가졌구나.'
주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얼음알갱이들을 다시 찻잔 속에 집어넣는다.
한데 공주의 눈이 또다시 동그래졌다.
'저건 또 뭐야. 좀 전까지 얼음이었는데…….'
찻잔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서 다시 뜨거워진 거였다.
"무례했다면 용서를……."
조금 전까지 무례하다는 생각이 눈꽃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더니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가능한가요? 음한지력과 허공섭물 그리고 양강지력을 모조리 펼치다니……."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공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혔나 봅니다."
공주가 싸늘하게 눈을 흘긴다.
"뭐에요? 그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도대체 어떡하면 그리 할 수 있는지 설명해 봐요. 내가 납득하지 못하면 오늘 밤 잠은 다 잔 거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