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뜻하지 않는 인물들을 만나다 (2)
주성진이 자신의 별호를 본인 입으로 말한 건 자신의 명성에 빗대어 빨리 이 상황을 종결시키기 위함이었다.
임호풍의 목소리에 돌연 풀이 죽어 버렸다. 그도 고수이긴 하나 주성진은 차원이 다른 고수였기 때문이다. 비록 소문이지만.
"정말로 그대가 검호상인이요? 이기어검을 펼쳤다는……."
"뭐 제 입으로 말하기 그렇습니다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연배가 있으니 예를 갖추겠지만 댁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자초지종을 말해 주십시오."
"알겠소이다. 내가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해 드리겠소이다. 아, 나는 전진의 적통인 용문파 출신이오. 그러니 내 신분에 하등의 의심은 하지 말아주었으면 하외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음, 그러니까 임호풍 저자와 내 사제 천상일이 주루에서 처음 만났소이다. 그리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의기투합에서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 다음 날 깨보니 불진이 없어졌다고 하지 뭐요."
"그러니까 마음의 잡념을 쓸어낸다는 그 불진을 말하는 겁니까?"
주성진이 말하는 불진은 삼이나 짐승의 털로 만든 일종의 총채로 먼지털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일상에서는 종종 벌레를 쫓을 때도 사용하지만, 이를 전문적으로 무기 대신으로 사용하는 자도 있었다. 특히나 도가나 불가에서는…….
"그렇소이다. 그러니 범인은 자명하지 않겠소이까?"
그러자 임호풍이 주성진의 눈치를 본다.
"제가 해명하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그러니까. 천상일이란 분과 술을 마신 건 사실입니다. 한데 적당히 취기가 올랐을 때 그가 느닷없이 제안하였습니다. 내기하자고요."
"……."
"내가 좋다고 하니까, 그가 그냥 하면 심심하니까 각자 들고 다니는 걸 걸고 하자고 하더군요. 난 그래서 타구봉을 걸었고, 그는 불진을 걸었습니다. 솔직히 타구봉이야 마음만 먹으면 다시 만들면 되니까 전 크게 부담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내기에 지더라도."
"……."
"내기는 누가 숨을 안 쉬고 오래 참는다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간발의 차이로 제가 승리했지요. 그래서 난 그의 불진을 챙겼고, 다음날 근처 고물상에 불진을 팔았습니다."
주성진은 이야기를 듣고는 육숭을 바라보았다. 유치한 내기에 실소를 금하지 못했지만 애써 참고 있었다. 아마도 술이 빚어낸 촌극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내기했다는데 그 이야긴 사제에게 듣지 못했습니까?"
지금 육숭은 그야말로 내색은 못 하고 귓구멍이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저 미친놈이 천뇌불진을 고물상에 팔아버렸다고! 아아, 조금이라도 빨리 불진의 진가를 알아보았다면 사제가 마음대로 들고 다닐 수 없었을 텐데…….'
그도 사실 얼마 전까지 불진을 그저 먼지떨이나 벌레를 쫓는 데 사용했다.
한데 어느 날 창고를 정리하다가 오래된 책자를 발견했고, 호기심에 펼쳐보았다가 불진이 천뇌불진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왜냐면 불진이 천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책자를 계속 읽어나가다가 천뇌불진이 전진교의 장문영부이며 그 속에 태허무령심법과 천뇌팔준검이 숨겨진 위치도가 있다는 걸 알고는 기분이 너무 좋아 그 자리에서 뛰어올라 창고의 천장을 뚫어버렸다.
그리곤 급히 천뇌불진을 찾았지만, 자신의 사제가 그걸 가지고 출타한 후였다.
그의 사제는 용문파의 장문인이자 사부인 기성자의 명으로 멀리 심부름을 간 상태였다.
육숭은 이 사실을 장문인에게 알리고 급히 자신의 사제를 찾으러 나섰고, 결국 사제를 찾았지만, 이미 그때는 사제에게 천뇌불진이 없었다.
불같이 화를 내며 그의 사제를 다그쳤고, 개방의 거지 놈이 천뇌불진을 훔쳐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육숭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내기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소. 다만 내 사제가 주루의 점소이와 주인에게 확인 결과 저자가 불진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이다."
그러자 임호풍이 끼어들었다.
"당시 그와 저는 술이 만취된 상태였습니다. 내 생각에 댁의 사제가 내기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먼저 내기를 제안해놓고는… 내가 고물상의 위치를 알려 줄 테니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종결하자고요. 어떻습니까?"
한데 그때였다.
다다다다!
누군가가 행인들 틈 사이에서 뛰쳐나오더니 임호풍을 쳐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성진이 서 있는 포구는 수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기에 주성진조차 누군가 갑자기 뛰쳐나올지 몰랐다.
물론 내공을 끌어 올리고 정신을 집중했다면 알아차릴 수도 있었을 거였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빈번히 내왕하는 대로변에서 기세를 끌어올리는 건 자제 중이었다.
자칫 일반인들이 놀랄 수 있기에.
"야, 이 도둑놈아! 내가 너와 내기했다고! 어디서 거짓말이 늘어놓는 거야, 확 주리를 틀어 버릴 테다. 내가 사형과 같이 네놈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그때마다 난 죄인처럼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고."
그는 사형한테 제대로 구박을 받은 모양이었다.
임호풍이 가만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상대가 그보다 연장자지만 꼭지가 제대로 돌아갔다. 본인은 애써 부인하지만, 개방도의 특징이 제대로 나오고 있었다. 한번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 새끼, 천상일! 몰래 도둑고양이처럼 나타나서는 뭐라 지껄이는 거야. 날 주리를 틀겠다고? 네놈의 면상을 갈겨 주겠다. 덤벼봐라, 이 비겁한 자식아."
주성진이 두 사람을 뜯어말리는 순간, 천상일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주성진은 고개를 흔들며 우선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자칫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천상일의 커다란 주먹이 임호풍의 턱을 향해 날아 왔다.
휙!
"이런 얍삽한 놈!"
임호풍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 손끝으로 천상일의 맥문을 찔러 갔다.
주성진은 임호풍의 손이 뼈 없는 동물처럼 구부러지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야. 멋진 금나수인데? 저 동작만 보면 나보다 훨씬 고수야.'
천상일은 임호풍의 반격에 급히 권을 거두어들였다.
그대로 공격해 들어갔다간 오히려 상대에게 맥문을 잡힐 것 같아서였다.
'저놈이! 별 볼 일 없는 놈 있는 줄 알았는데 숨겨둔 한 수가 있구나.'
천상일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더듬어 왼손을 뿌렸다.
쉐액!
흰빛이 번쩍하더니 임호풍의 손목을 할퀴고 지나간다.
깜짝 놀라 몸을 튼 임호충의 얼굴에 분노가 어린다.
"이 새끼. 정말 비겁하구나! 방금 암기를 던졌다, 이거지? 그렇다면……."
임호풍은 손가락을 뻣뻣이 세워 들고 상대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에서 바람이 일렁이더니 한 가닥 지풍이 발사되었다.
쉑!
"헉!"
천상일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옆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슬아슬하게 지풍이 그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놈! 가볍게 훈계 좀 하려 했는데 정말 제대로 해야겠구나, 어린놈이 생각보다 고수야. 어디서 영약이라도 훔쳐 먹었나…….'
주성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번엔 지풍까지… 음, 그렇다면 상당한 고수급인데, 저 나이에…….'
천상일은 그냥은 안 되겠는지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한줄기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날카로움이 임호풍을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임호풍은 상대가 무기를 들자 재빨리 몸을 사리며 반대편으로 피했다.
상대의 공격을 피했는데도 얼굴이 따끔거렸다.
'저자의 칼질이 위협적이군.'
천상일은 여세를 몰라 검을 휘저으며 맹공을 퍼부었다. 언뜻 보면 초식이 없이 마구 휘두르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위력과 빠르기는 상당했다.
임호풍이 맞대응하지 않고 요리조리 피하기만 하자 그가 또다시 소리친다.
"이 새끼! 피하지만 말고 무기를 들어라!"
"좋다. 몽둥이맛을 보여주지."
임호풍은 타구봉을 들어 상대의 검을 막아갔다. 언뜻 타구봉이 잘려나갈 그것으로 보였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내기로 덧씌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성진은 두 사람의 무공을 생각하고 있었다.
'둘 다 무공이 강한데… 아직 본 실력의 반의반도 꺼내지 않은 것 같은데도……."
그 사이 임호풍이 봉으로 검을 막았다.
챙!
상대의 눈썹이 곤두섰다.
'비리비리한 놈이 공력이 세구나!'
천상일은 자신의 공력을 좀 더 끌어올렸다.
"얍!"
천상일은 검을 쳐들고 부딪쳐 갔다.
그러자 임호풍은 히죽 웃으며 타구봉을 들어 곧장 내리쳤다.
그런데 두 병기가 부딪치는 순간 천상일의 검이 마치 흐물거리는 뱀처럼 요동쳤다.
임호풍은 그만 허공을 치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 순간, 흐물거리던 검이 벌떡 일어나 임호풍의 옆구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옷이 쭉 찢어졌다.
본능적으로 피해 다행히 상처는 면했다.
상대의 검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보통의 검 같았다. 하지만 그의 검은 낭창거리는 연검이었다.
'도사란 놈이 꼼수를…….'
술수에 걸려 손해를 본 임호풍은 작전을 달리했다.
'제길, 취팔선보는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돌연 임호풍이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갈지자 행보를 하기 시작한다.
상대가 왼쪽을 노린다고 준비하고 있으면 어느새 오른쪽에 가 있고, 다시 오른쪽을 방어하려 하면 중앙에 가 있다.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천상일은 얼굴이 샛노래졌다.
'제길…….'
천상일은 어디서 상대가 어느 쪽으로 공격할 줄 몰라 마구 칼질을 해댔다. 씽씽 칼바람 소리가 주위를 진동시켰다.
엄밀하게 방어한 듯 보였지만 임호풍의 눈엔 허점이 가득 보인다.
'어이구, 성질 같아서는…….'
마음 같아서는 갈비뼈 몇 대를 부러뜨리고 싶다. 하나 지금의 대결이 비록 친선 비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벌한 대결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일주일 정도는 밥을 못 먹게 해야지.'
휙!
돌연 임호풍의 신형이 사라졌다. 순간 당황한 천상일이 어찌할 줄 모를 때 까만 신발이 날아올랐다.
천상일의 사형이 보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위험해!"
하지만 그때는 임호풍이 발을 날려 천상일의 턱을 걷어차려는 순간이다.
한데 비명은 두 사람에게 동시에 나왔다.
"크윽!"
"컥!"
천상일은 저만치 날아가 고꾸라졌고, 임호풍은 그 자리에서 배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다다다다!
육숭이 급히 천상일에게 다가갔다.
"괜찮냐?"
땅에 널브러진 천상일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으로 엉덩이를 털었다.
"턱이 좀 얼얼하네요. 헤헤."
"너 이 자식, 말을 하는 것 보니 턱이 부러지지는 않았구나. 한데 너의 마지막 수는 뭐지? 못 보던 수 같은데."
"저도 발길질을 좀 익혔습니다. 아껴두었다가 사형과 비무할 때 써먹으려고 했던 건데, 오늘 그렇게 됐네요."
천상일은 임호풍에게 턱을 걷어차이려는 순간, 자신도 발을 들어 임호풍의 복부를 강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