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뜻하지 않는 인물들을 만나다 (1)
주성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저,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거요? 그것은 크나큰 실례요, 아시겠소?"
"난 어머니처럼 불행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에게 마음이 가는데 어쩌란 말이에요, 제가 그리 싫은가요? 미워할 정도로……."
주성진은 손을 흔들었다.
"싫은 건 아니요,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좋아하진 않소. 우리가 언제 봤다고, 겨우 오늘 본 사이인데……."
"그걸로 됐어요, 호호. 차차 나아지겠죠. 그리고 난 질투하지 않아요. 당신을 좋아하는 여인들을… 어쩌겠어요, 당신이 잘난 것을……."
주성진은 어쩔 줄 몰랐다. 생각도 갈팡질팡이다.
'이거 참… 기분이 나쁘지 않네, 혹 날 칭찬해서 그런 건가? 맞아, 순전히 칭찬이라서 그런 거야. 남이 칭찬하면 으레 기분이 좋은 법이니까. 한데 음… 정말 그럴까? 내가 눈곱만큼도 그녀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뜻하지 않게 고민을 안게 된 주성진이었다.
그 순간 그의 고민을 잠시지만 날려 보낼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검선이었다. 그가 코를 킁킁 거렸다.
"한참을 찾았잖아. 약탕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여긴 의방인 것 같은데……."
"노태태가 크게 다쳤습니다. 그래서 여기로 데리고 왔습니다."
검선의 얼굴에도 걱정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음, 그런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의원님 말이 조금만 늦었다면 장례를 치를 뻔했다고 하더군요. 아직 경과를 더 지켜봐야 하지만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다행히 구비 된 좋은 약재고 있었고, 의원님의 의술도 뛰어났습니다."
"다행이군, 한데 내 쪽에도 부상자들이 꽤 있어. 여기로 데려와야 할 것 같은데, 의원 한 사람으로는 벅찰 것 같기도 하고."
"아닙니다. 그를 보좌하는 의원 수습생이 몇 있습니다. 중증이 아니라면 의생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할 겁니다."
그 순간 주약빙이 벌떡 일어났다.
"이를 어째… 빨리 수습해야겠군요. 제가 명색이 이곳 원주인데 그걸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어쩌나……."
그녀의 호들갑에 검선이 빙그레 웃는다.
'처음 봤을 때와 영 딴판이군, 그땐 꽤 무게를 잡으려고 노력하더니만.'
"부원주라는 여인이 있더군, 그녀가 사태를 수습하고 있어. 아주 능수능란하더라고, 무공도 꽤 세고."
"아, 언니가 있었군요. 제가 정신이 없다 보니……."
검선은 그녀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대강의 상황을 짐작했다.
'여기는 부원주가 실제로 관리하는 모양이구나. 하긴, 어린 처자가 원주라고 하기에,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 ? ? * ? ? *
사천성 성도에서 호남성 장사로 돌아온 주성진은 문득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꽤 오랜 기간 자리를 비웠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나 환대해주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주성진은 장사에 돌아온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가운 해후도 잠시, 주성진은 일에 파묻혀 살다시피 해야 했다.
사천상단은 사천상단의 원로들에게 맡겨놓았지만 그렇다고 본인이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요한 사항은 자신이 직접 결정해야 했고, 거기에다 구주상단의 밀린 일까지 도맡아 처리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음, 이제 좀 체계가 서는 것 같군. 앞으로는 조직이 짜임새 있고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야.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권한 위양을 마무리했으니까…….'
주성진이 무리하다시피 일을 서두른 건 곧 또다시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휘주에서 볼일을 보고 다시 북경으로 향해야 했다.
'일정이 빠듯하구나. 서둘러야겠다.'
다음날, 주성진은 임호풍을 데리고 휘주로 향했다.
임호풍은 개방 장로의 제자로 일전에 개방 장로의 부탁으로 합류한 자였다.
주성진이 특별히 그를 대동하고 나선 건 개방의 촘촘한 연락망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주성진은 그에게 임시로 서기라는 직책을 줬으며, 그의 모습은 본인의 입으로 개방 출신이라고 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를 개방 제자로 보기 어려웠다.
주성진보다 훨씬 말쑥한 차림이었고, 그 스스로 자신의 그런 모습을 상당히 만족해하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주성진은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임 서기, 사람들이 그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구려."
"하하, 이게 다 상단주님 덕분입니다. 상단주님이 새 옷을 사주지 않았으면 어찌 사람들이 쳐다볼까요?"
"그게 어디 옷 덕분이겠소? 원래 그대의 모습이 헌앙해서 그런 것이지……."
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상단주님께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은데요, 개방에 있을 땐 늘 옷차림새 때문에 손가락질 당했는데……."
"그때는 새 옷도 아니지 않소?"
"그러게 말입니다. 그저 깨끗이 빨아 입고 몸을 깨끗이 씻은 것뿐인데…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주성진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뭐라고 했소이까?"
"빈대와 벼룩을 항시 자신의 몸처럼 소중히 해야 한다고."
주성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
"음, 그 말이 걸작이긴 한데 그래도 이제는 변신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개방은 너무 전통을 고집하는 것 같소. 이제는 의젓한 무림 문파인데 굳이 거지 행세를 해야 하는 건지… 뭐 남의 집에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다행스럽게 아직은 소수지만 개방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갈 겁니다."
주성진은 돌연 궁금한 게 생겼다.
"혹 결혼은 하오? 그대의 사부는 독신이던데……."
"딱히 결혼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결혼이 어디 쉽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누가 거지에게 시집을 오겠습니까?"
"음, 내가 잘은 모르지만, 개방 내에 여성도 있을 것 같은데……."
그가 손은 내저었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간혹 있긴 있는데 남자처럼 꾸미고 다니죠. 아마 그녀들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을 겁니다."
"그렇소이까? 허허."
"하지만 저는 좋은 여자만 있다면 언제든지 결혼하고 싶습니다. 상단주님을 오랫동안 모시면서 돈도 많이 벌고요, 헤헤."
주성진은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나야 좋지만, 그대는 개방에서 소환령이 떨어지면 돌아가야 하지 않소이까? 내부 규율을 어기면 벌이 엄한 거로 알고 있는데……."
"뭐, 사부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사부님이 장수하도록 빌어야겠소이다. 하하."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포구로 향했다. 물길을 이용해 휘주로 가기 위해서였다.
포구가 눈앞에 보이는 순간 임호풍이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전용 포구로 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그가 말한 전용 포구란 주성진이 재개발 중인 포구를 의미했다.
과거 장사의 포구였으나 홍수로 인해 갈대밭으로 변한 바로 그곳이었다.
아직은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포구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구주상단 전용 상선도 몇 척 있었다. 다만 대형선은 아니고 중형선과 소형선이지만…….
"왜 전용선을 타고 싶어서 그러시오?"
임호풍이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상단주님의 체면을 고려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여객선을 타고 갑시다. 여객선을 타고 가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과 교분을 나누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알아보자고요."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헤헤."
주성진이 그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이거, 내게 너무 아부가 심한 것 아니오? 벌써부터 그러면 곤란한데……."
"아이고 아부라뇨, 진심입니다. 하하."
잠시 후 그들은 서로 웃으며 배에 오르려 했다. 아직 출발할 시각은 아니지만, 미리 배에 올라 배의 이모조모를 살펴보려 했다.
한데 저 멀리서 싯누런 그림자가 삽시간에 달려 여객선 앞에 도달했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한 점이었는데 어느새 배 앞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발걸음이 몹시 빠른 자였다.
나타난 자는 중년의 도사였다. 체격이 남들보다 유달리 컸고 부리부리한 인상이었다. 언뜻 드러나는 근육질의 몸매는 청정한 도관에서 원시천존을 모시는 도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무공이 뛰어난 자로구나.'
주성진은 단박에 그의 실력을 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범하지만, 은근히 남을 압도하는 위세가 있었다.
임호풍이 그를 아래위로 살피며 말문을 열었다.
"도인께서는 뉘십니까. 혹 저희에게 볼일이 있나요?"
도사는 가볍게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전진의 육숭이라 하오이다. 그대에게 볼일이 있어 찾아 왔소이다. 먼 길을 가려는 모양이니 장시간 잡지는 않겠소이다. 본인은 전진의 유물을 찾으러 왔소이다."
전진파는 남송 초기에서 원나라 시대까지는 흥했는데 여러 파벌로 나뉘어 지금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거기에다 전진파의 본거지는 원인 모를 화재로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전진의 분파 중에 대표적인 문파가 지금의 화산파였다.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듯하군요. 그럼 저는 이만……."
임호풍이 싸늘하게 돌아서자 그가 화가 난 듯 보였다.
"모른다고? 어디서 거짓말이야……!"
주성진이 급히 끼어들었다. 뭔가 곡절이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무공을 꽤 높은 경지까지 익힌 자였다. 그냥 말로서 끝난 일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전진의 유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흥, 옆의 인물에게 물어보시구려.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임호풍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진이 망한 지 언젠데 전진 출신이라고 하는 거요? 혹 당신은 유령이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내가 먹은 밥만 해도 네놈의 두 배는 족히 될 거다."
"한 세배는 되겠지. 난 소식하는 편이라."
"이놈이, 그래도 입만 살아 있네. 개방에서 내놓은 놈이라 하더니 아주 형편없는 자식이구나."
임호풍이 깜짝 놀란다.
'뭐야. 처음 보는 자가 내가 개방도라는 것을 알고 있네, 게다가 내가 왕따 신세라는 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음, 내가 내 이야기를 흘린 건 딱 한 번밖에 없는데. 가만, 그때 나와 술 마신 자도 도사였잖아? 정확히는 사이비였지만.'
주성진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자자, 두 사람 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해보시오. 검호상인인 내가 중재할 테니."
그러자 이번에는 육숭이 깜짝 놀란다. 주성진이 검호상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다.
하오문에서 제대로 소문을 낸 탓에 검호와 검호상인의 위명은 중원 널리 퍼지고 있었다.
한데 안타깝게도 주성진이라는 이름은 함께 널리 퍼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검호 아니면 검호상인이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