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괴한과의 대결
괴한은 호기롭게 속삭였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없진 않았다.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주성진의 기세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자만하면 안 되겠다. 어디서 저런 놈이…….'
괴한은 다분히 주성진을 의식하며 부지런히 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그의 옷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그의 우람한 근육이 한껏 성을 내고 있었다.
주성진은 그의 모습에 그가 내외공을 겸비한 고수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이 구릿빛이다.
'그래, 금강불괴지신을 거저 얻은 건 아니겠지……. 피나는 수련이 있었을 거야.'
주성진은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짧고 굵게 승부를 봐야 해. 주변도 살펴봐야 하니까. 특히 노태태는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주성진에겐 생각하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아무리 금강불괴라 한들 불에는 못 배길 거야. 천하에 제일 단단한 금강석도 불에는 무용지물이라고.'
주성진은 검으로 공격을 시도하고 기회를 틈타 양강지력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슈우우웃!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몹시 매서웠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섬뜩한 예기가 대기를 가르고 날아왔다.
괴한은 눈동자를 뱅뱅 굴렸다. 상대의 검세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것이다.
'이거 너무 세잖아! 안 되겠다. 도를 꺼내야겠어.'
괴한은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박도를 재빨리 집고선 빠르게 날아오는 주성진의 검을 노려보았다.
'온다……. 그렇다면, 후후.'
괴한은 자신의 도를 힘껏 휘둘렀다. 누가 봐도 주성진의 검을 막으려는 동작이다.
하지만 그는 주성진의 검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고 바로 일보 직전에 손을 빼버렸다.
주성진의 눈이 한껏 커진다.
'이런 제기랄, 거짓 동작이었어.'
상대의 속임수에 허공을 가른 주성진은 급히 자세를 돌려세웠다.
바로 그 순간, 심상치 않은 파공음이 들려온다.
쒜액!
괴한의 도가 빠르게 주성진을 향해 날아온 거였다.
'저자가 내 손목을 노리고 있구나…….'
주성진은 허리를 힘껏 틀어 상대의 도를 마중 나갔다.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아주 유연한 몸동작이었다.
그리곤 힘껏 자신의 손목을 노리는 상대의 도를 내려쳤다.
탕!
주성진은 눈을 부릅떴다.
'검을 튕겨 내?'
상대는 금강불괴지신이 아니어도 초고수였다. 최소한 절정의 끝은 넘어선 무위였다.
주성진이 그리 판단한 건 본인 무기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도에는 두툼한 강기가 덧씌워져 있던 거였다.
휘익!
상대는 뒤로 잠시 물러나더니 다시 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햡!"
상대의 도가 내리친 곳은 주성진의 왼쪽 어깨였다.
'음, 공수 전환이 몹시 빠른 자구나.'
주성진은 상대를 도를 노려보며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쐐액!
까앙!
둘은 각자의 무기를 회수하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언뜻 백중세처럼 보인다.
깡, 깡, 까앙…….
검과 도가 계속 부딪혔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둘 다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주성진은 공력을 배가하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빨리 끝내야지. 나도 모르게 대결을 즐기고 있었어…….'
그 순간 주성진의 몸통에서 파란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놈! 전력을 다하는 모양이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괴한은 미리 세워둔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일단은 막는다. 그러니 두 번째는 날 보지 못할 것이다. 너의 검에 대응하지 않고 가까이 접근해, 너의 몸통을 붙잡고 부숴 버릴 테니까……. 네놈이 발악하며 검을 휘두른다면 한 대 정도는 가볍게 맞아준다. 그래 봤자 내 몸에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할 테니…….'
그 순간 주성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타앗!
지면을 박차고 뛰쳐나간 주성진은 상대를 향해 검을 날렸다. 얼마나 많은 힘이 쏠렸는지 팔뚝에 퍼런 힘줄까지 보였다.
'백번을 양보해 설사 공력이 백중세라 해도 무기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주성진이 공격해 들어오자 상대의 도도 물 흐르듯 움직였다.
한데 어찌나 빠른지 그들의 검과 도가 엿가락처럼 늘어나 보였다.
주약빙은 손에 땀을 쥐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잔상을 보았고 이미 그들은 거세게 격돌하고 있었다.
꽝!
천번지복의 굉음이 울려 퍼졌고 땅이 거세게 요동을 치자 주약빙은 그녀의 유모를 힘껏 끌어안았다.
피가 옷에 배 시뻘겋게 변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녀는 주성진이 승리하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바로 그때였다.
"욱……."
괴한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무릎은 심하게 꺾여 버렸고 양발은 땅속으로 깊숙이 파묻혀 버렸다.
애초 생각한 역공은 꿈에도 못 꿀 처지가 된 것이다.
'저놈의 공력이 나를 앞서다니…….'
찌이익.
설상가상으로 그의 도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기더니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주성진은 빠르게 검을 회수하곤 양손을 힘차게 뻗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괴한은 주성진이 왜 저러는 어리둥절했다. 순간 스쳐 가는 생각.
'맨손으로 붙자는 것인가? 명예롭게 이기기 위해서.'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다. 주성진은 눈곱만큼도 그럴 생각이 없다.
상대는 금강불괴지신이었다.
쉭쉭!
주성진의 열 손가락이 불을 뿜었다.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사방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괴한의 얼굴엔 가느다란 미소가 어려 있었다.
'후후, 저놈이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려는 모양이네. 그래 시원하게 갈겨봐라. 다 받아 줄 테니…….'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금강불괴지신을 굳게 믿었던 그였다.
한데 뜨거운 열기가 훅 자신에게 불어오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야, 열양지인가. 저놈이 나의 약점을 알고 있었구나…….'
그래도 웬만한 열양지라면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주성진이다,
'나보다 공력이 높은 자다…….'
자신감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었다.
'피하자. 무조건 피해야 해…….'
하나 피한다고 피해질 주성진의 열양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자세는 피하기에는 너무나 어정쩡한 자세다.
단지 피한다고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을 뿐이다.
퍽, 퍽, 퍽…….
열양지에 얻어맞은 부위가 노린내를 풍기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으아악……!"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허우적거렸다.
바로 그때, 한줄기 강렬한 열양지가 또다시 그의 눈을 강타해 버렸다.
'잔인해 보여도 어쩔 수 없어.'
결국, 그는 그대로 내버려 둬도 죽어가겠지만 주성진은 그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다.
눈은 가장 약한 부위 중 하나였고…….
쿵!
'잘 가시오.'
주변의 소란스러운 비명도 그가 죽자마자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있었다.
검선이 주변을 통제한 것 같았다,
주성진은 급히 주약빙에게 다가갔다.
"빨리 의원에게 데려갑시다."
"네, 그리고 고마워요."
"인사는 나중에 하고……."
주성진은 노태태를 들쳐 업고 의원에게 향했다.
한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어딘가로 간다.
"의원이 상주하는 모양이오?"
"네, 자체 의방이 있어요. 의원님은 꼬장꼬장한 성격이지만 대단하신 분이에요."
"다행이요, 실력이 좋다니……."
잠시 후 두 사람은 노태태를 의원에게 맡기고 의방의 뒷마당에 털썩 앉았다.
"휴, 그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겠소?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오. 난 괜찮소."
주약빙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말한다.
"휴… 그는 원래 저의 어머니의 약혼자였어요.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생전에 어머니는 그다지 그를 좋아한 것 같지는 않아요. 나이 차가 엄청났거든요. 거의 30년씩이나."
주성진은 중년으로 보였던 그의 나이가 그보다 훨씬 많았다는 걸 알았다.
'음, 그러면 지금 나이가 얼마야, 대략 일흔…….'
"어머니는 돌아가신 거요?"
그녀가 고개를 끄떡인다.
"제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요. 불치의 병에 걸려서……."
"음, 그렇구려……."
"사실 그가 날 죽이려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랍니다. 제가 열 살이 되던 해에도 있었고, 그 후 열다섯 살, 스무 살 때도 있었어요. 5년 주기였죠. 한데 지금은 3년 만에 나타났네요."
주성진은 치정에 의한 원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간 마음고생이 많았겠소이다."
"그렇긴 한데 저보다는 저를 호위하는 이들이 많이 고생했지요. 많이 죽기도 했고요. 그래서 아버지께 간청했답니다. 더는 폐를 끼치기 싫으니 멀리 보내 달라고요. 그래서 제가 3년 전에 여기에 온 거예요."
"……."
"철저히 비밀에 부쳤는데도 결국 어딘가에서 비밀이 새어나갔나 봐요. 내부에는 죽은 그 사람을 추종하는 인물이 더러 있었으니까요."
주성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 암흑상단의 상단주가 그대의 아버지요?"
"네. 어머니는 파혼하고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 되셨어요. 물론 이 또한 어머니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외조부가 그렇게 한 것이었죠. 저는 그래서 외가와는 예전에 절연했어요. 어머니의 가련한 신세를 생각하니 외조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더라고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음, 그렇구려……."
그녀가 빤히 주성진을 바라본다. 얼굴에 가득 미소를 담고.
"이제 제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어떡할 거예요? 호호."
"그게 무슨 말이요?"
주성진은 놀라며 되물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에이 별일 아닐 거야…….'
"외부의 사람에게 내부의 일을 알리면 저는 죽은 목숨이에요. 그게 암흑상단의 법도이니까요."
주성진은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러면 대답하지 말지. 왜 그걸 내게 말했소이까?"
"당신이 좋아지려고 하니까……."
주성진은 손을 내저었다.
'미치겠군, 이거야 원,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잖아.'
"이보시오, 만난 지 얼마 되었다고 이러는 거요. 너무 섣부른 판단은 마시오. 나보다 좋은 사람은 수두룩하니까……."
"수두룩하다고요, 어디서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죠? 전설의 금강불괴지체를 단숨에 깨부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것도 나이가 많으면 몰라, 약관의 나이잖아요. 내 말 틀렸나요?"
"소저, 무공이 다가 아니오. 그리고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소이다."
그녀는 주성진의 말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리고 직감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았어요. 처음에 저를 대하는 투가 그저 그랬거든요."
"소저, 자꾸 그러지 맙시다. 오늘 그대에게 들은 이야기는 입 밖에도 내지 않을 테니까……."
"첫눈에 반했다니까요. 당신을 본 순간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니까요. 내색은 안 했지만……."
"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감정이 사라질 것이요."
그녀가 빤히 주성진을 쳐다보았다.
"감정이 사라지지 않으면요?"
"음… 그러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합시다."
주성진은 어떡하든 현재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좋아요. 1년 후에도 내 마음이 불변이면 그땐 알아서 하세요. 아셨죠?"
"뭘 알아서 하라는 말이요?"
"진드기처럼 착 달라붙을 테니 각오하란 말이에요,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