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괴한의 침입
주약빙은 멍한 얼굴이었다.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다.
'다 된 밥이었는데…….'
옷깃을 여민 그녀가 주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벗어난 거죠? 완전히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내가 정신을 잃을 뻔했던 이유가 뭐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주성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된통 크게 당할 뻔했던지라 그녀의 미모가 별로 와닿지 않았다.
"음. 내가 사실을 말하면 그대도 진실을 말해줄 것이요?"
"호호. 상인이라 그런지 반대 조건을 항상 입에 물고 다니는군요. 좋아요. 그렇게 하죠."
"잠깐만요. 초면인데 날 어떻게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상인 아니신가요? 상인이라면 항상 그렇던데… 나 또한 항상 그렇고요."
"그러니까 댁은 뼛속까지 상인이라 말이군요. 하지만 난 작은 상인이 아니오. 큰 상인이지……."
"그게 무슨?"
주성진은 설욕할 기회를 잡았다.
'좀 골려 볼까.'
"무릇 큰 상인은 대세를 봅니다.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그래서 난 조건을 단 것이 아니라 대세를 본 것이오. 만일 내가 조건을 달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면 나와 암상과의 관계가 크게 틀어질지도 모르오, 원주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그대의 질문을 거절하면 우리와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기에 미리 그 원인을 제거한다, 그 뜻인가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좀 말괄량이 같고 엉뚱하긴 한데, 말귀 잘 알아듣네. 똑똑한 여인이야.'
"그렇소, 분명 그대는 내 질문에 답을 안 해주었을 거요. 설령 답을 해준다고 해도 날 애먹이다가 마지못해 말해주겠지. 그것도 극히 일부분만……."
"이봐요. 그대의 상단과 우리 암흑 상단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 아닌가요. 그대가 오늘 일로 나뿐만 아니라 암상을 미워한다고 해도 우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요."
"후후, 과연 그럴까……. 곧 나에 대한 소문이 급속도로 퍼질 거요. 과연 소문을 듣고도 그런 말이 나올지 모르겠소이다."
주약빙은 미간을 좁혔다.
'상당히 건방진 작자 아닌가, 과대망상이 심해도 유분수지 어찌 암상과 자그마한 상단을 비교해…….'
"흥, 그런 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하하. 두고 봅시다. 그건 그렇고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대는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뇨, 답할 생각은 있었어요. 왜냐면 그대는 어찌 되었든 우리가 정한 시험을 통과한 귀빈이니까. 손님 접대에 소홀히 할 수 없죠.'
주성진은 그녀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생각은 있었다는 건, 그렇지 않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니오?"
"음… 좋아요. 그렇다 치고 내가 작은 상인이라고 깎아내린 건 사과하세요."
주성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과할 생각이 없소. 그대는 작은 상인이기 때문이오. 난 혹시 내 이름을 말했을 때 최소한 어떤 반응이라도 있을 줄 알았소. 한데 그대는 무덤덤했소. 그게 바로 대세를 모른다는 것 아니겠소."
"이봐요. 그대를 모른다고 작은 상인이라는 건 순 억지 아닌가요? 모를 수도 있지……."
"무릇 큰 상인이 되려면 최소한 내부의 일은 잘 통달해야 하는데 원주는 방금 말처럼 나를 모르고 있지 않았소. 난 암상의 은인이란 말이요."
그녀가 깜짝 놀란다.
"정말인가요?"
"그렇소이다. 못 미더우면 확인해 보시오."
그녀는 머리에 맴도는 생각을 정리한다고 눈을 살짝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음… 그래도 그건 너무하셨네요. 아무리 그대를 모른다고 작은 상인이라 낮추어 보는 건 큰 상인의 덕목이 아닌 것 같은데요. 큰 상인이 되려면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고요."
"내가 포용력이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오. 무조건 상대를 감싸준다고 그게 좋은 일은 아니오. 때로는 준엄하게 꾸짖을 때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오. 내가 보기에 그대는 아직도 응석받이인 것 같소."
"뭐라고요. 내가 철이 없다는 것인가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아까 다짜고짜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 전에, 겸허히 내기에 진 것을 수용하는 것이 먼저 아니겠소?"
"내기라뇨? 내기한 적이 없는데."
"그럼 유사한 내기라 합시다. 어쨌든 내가 그대가 제시한 시험에 통과한 것이니까."
처음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슬퍼 보이자, 주성진은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계속하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음, 그대의 질문에 답하겠소. 난 오행의 원리에 따라 내공의 성질을 차게 바꾸었소. 사실 그렇게 한 것은 뭐 거창한 원리나 이론이 있는 건 아니고, 몸을 차갑게 유지한다면 불필요하게 흥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소. 한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소."
"……."
"옳다고 한 건 결과적으로 그대의 색색환락무에서 벗어난 것을 말하는 거요. 반대로 절반이 틀렸다고 한 건 그대의 색색환락무가 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오. 난 이성을 잃고 광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몸에 마비가 오고 눈이 감길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주약빙이 이야기를 듣다 손을 살짝 들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오행의 원리로 진기의 성질을 바꾼다면 양강지력이나 음한 지력 모두 가능하겠네요?"
"그렇소이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계속 믿음을 가지고 밀고 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가능해졌소. 자, 그러면 내 물음에 답할 차례요."
"기절시키는 거예요. 상대를 흥분시키는 건 미끼고요."
주성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섭혼술이란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당한 자는 이지를 상실하는 거요?"
"이지를 상실하는 게 아니라 죽는 거죠. 원래대로라면, 호호."
"그러니까, 정혈이 갈취되어서……."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네, 채양보음의 희생양이 되는 거죠. 상대를 기절시키는 건 사실 속임수에요. 춤을 추면서 무색무취의 마취산을 뿌리는 거죠. 상대가 딴 곳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말이죠. 사실 이건 알아도 잘 대응할 수 없어요. 아, 그리고 웃음소리는 음공이에요. 정신을 혼란케 하는 수단이죠."
"……."
"공력이 높다면 음공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주성진은 만화선자의 무공이 와전되어 전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무서운 무공이라고 생각했다.
마취산을 만드는 것 또한 상당한 고급 기술이었다.
'음, 나의 내공이 높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공의 성질을 바꾸었다 해도 마취산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 같아. 좀 오래 버틸지언정…….'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대화는 그리 길지 못했다.
느닷없이 변고가 닥친 것이다.
"우당탕!"
"아아악!"
주성진과 주약빙은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애초 노태태의 거처였다.
거기엔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노태태와 복면을 쓴 괴한이 있었다.
주성진이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크아악……."
"사람 살려……."
주성진은 난감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처리하마. 오랜만에 기분 좀 풀려고 했는데……."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검선이었다.
주성진은 본인과 주약빙이 다가오는데도 꼼짝하지 않은 괴한을 쳐다보았다.
괴한은 주약빙을 보자마자 복면을 풀었다. 잘생긴 중년이었다.
한데 주약빙이 그를 보자 경기를 일으켰다.
"하아악!"
두려운 정도가 아니라 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얼굴에 공포감이 가득했다.
주성진은 궁금했다. 이들의 관계가…….
'음, 무슨 일이지?'
"흐흐흐. 네년이 여기에 있을 줄 알았다. 너의 그 더러운 핏줄은 일찌감치 결딴냈어야 했는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모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상한 건 모욕을 당했는데도 대꾸하지 않는 거였다. 주성진도 이점을 괴이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성질이라면 분명 대들어야 정상이었다.
"네년이 지금 누굴 걱정할 때냐? 얌전히 목이나 길게 늘어뜨려라. 고이 보내줄 테니……."
순간 정적이 흘렀다, 주성진은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데 괴한의 말에 여전히 반박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르르르.
주약빙의 얼굴이 사정없이 떨린다.
주성진으로서는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노태태의 안위가 신경 쓰인 탓이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는 네놈은? 호위무사, 아니지 저 더러운 년의 기둥서방이냐. 어린 것이 벌써 꼬리를 쳤군.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니까, 흐흐."
주약빙이 고개를 쳐들었다. 처연한 얼굴이었다.
"아닙니다. 그는 제 손님입니다. 저의 목숨은 가져가도 좋으니 그를 제발 보내주세요. 부탁입니다. 흑흑."
"뭐, 그럴 것 있나. 둘 다 보내주지……."
주성진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눈썹이 활처럼 휘어졌다.
안 그래도 그가 거론한 기둥서방이란 말이 몹시 거슬렸는데 자신의 목숨을 마치 주머니에 구겨 넣은 것처럼 구는 태도가 기분 나빴다.
하지만 표정은 분노를 자제하고 있었다.
"당신의 무공! 얼마나 대단한지 봅시다."
"건방진 놈, 감히 나와 맞서려고 하느냐?"
"입 아프게 자꾸 말하지 맙시다. 무인은 입으로 말하지 않는 법이요."
순간, 주약빙이 주성진을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안 돼요. 그와 맞서서는……."
"내 걱정은 하지 마시오. 설사 잘못돼도 내가 선택한 일이니……."
말을 그렇게 했지만, 상대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는 금강불괴지체예요. 어떠한 무기로도 그를 흠집 낼 수 없답니다. 설사 그것이 만년한철이라도."
주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설의 금강불괴지체 말이오?"
"네. 그렇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살려달라고 빌어요."
주성진은 검선에게 들은 금강불괴지체가 현실이 되자, 기분이 착잡하면서 한편으론 묘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만 난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어찌…….'
그 순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그가 이죽거린다.
"놈! 이제야 두려운 게냐, 하나 늦었다."
주성진은 불끈 오기가 치솟았다.
"까짓것 한번 붙어봅시다. 저쪽에서 합시다. 저기가 넓은 것 같으니……."
"네 녀석이……."
잠깐 놀라던 그가 걸음을 옮기면서 주성진에게 손짓했다.
"용기가 가상하구나, 좋아 선공을 양보하지."
주성진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자, 그럼 갑니다."
스르릉!
주성진의 검이 천천히 검집을 벗어났다. 검에서 절로 광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보던 주약빙의 목울대가 꿈틀거린다.
'아아, 저자의 검이 보검이구나. 그렇다면 약간의 가능성은…….'
그녀는 괴한이 자리를 떠난 사이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유모를 돌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유모의 숨은 붙어 있었다.
괴한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주성진의 검이 심상치 않은 탓이다.
'저 녀석이 보검을, 뭐 그래 봤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