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주약빙을 만나다
주성진은 손가락으로 3층 건물을 가리켰다.
"혹, 저 건물의 3층을 말하는 겁니까. 아까부터 쭉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더군요. 아리따운 여인이……."
"눈썰미가 대단하시군요. 자, 그러면 궁금하실 테니까 빨리 말할게요."
그녀가 주성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주성진은 뜻 모를 그녀의 미소에 움찔했다.
'뭐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원주가 요즘 익히고 있는 무공이 있어요. 제가 굳이 익히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네요. 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그녀가 익히고 있는 건 과거 만화선자의 용봉만화공이에요."
그 순간 검선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잔뜩 분노한 표정이다.
"이봐, 무슨 수작이야. 그따위 요녀의 무공으로 말이야. 과거 그녀의 치마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혈을 갈취당하고 죽은 줄 알아? 암상이 마교의 일파라 하더니 아직 그 탈을 벗어 던지지 않았군."
노태태는 아까부터 거슬리던 인물이 처음으로 입을 열자 잔뜩 긴장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신분을 감춘 무공의 초고수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가 익히고 있는 주안공은 자신의 몸을 젊게 가꾸는 데 큰 도움을 주는데, 거기에 부가적으로 상대의 역용를 간파하는 데도 효용이 있었다.
하여 그녀는 설산검객으로 분한 검선이 역용하고 있음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거였다.
"잠깐만요.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원주가 정혈을 갈취하는 채양보음술만은 익히지 않았어요. 믿어주세요."
"흥, 그걸 어떻게 믿나. 어이 주 상단주! 별로 기분이 좋지 않군. 어디 편한 데 가서 마음껏 술을 마시자고."
주성진은 얼른 검선을 말렸다.
"갈 때 가더라도 잠시만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죠."
"이봐, 망신살 뻗을 일 있나? 아무리 공력이 높다 하더라도 용봉만화공의 유혹을 이기기 힘들어. 가만히 있으면……."
"알고 있습니다. 분명 시험을 하자는 것 같은데… 뭐 그래도요. 당사자 입으로 직접 들어보지요. 저기 오고 있으니까."
주성진은 걸어오는 여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얼굴에 면사를 쓰고 있었다.
순간 옥구슬이 흘러가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유모, 어찌 된 일이죠? 궁금해서 나와 봤습니다."
노태태는 자초지종을 그녀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성진의 신분을 포함해서.
"……. 그렇게 된 것이란다."
"어머, 유모가 잘못하셨네요. 그런 일이 있으면 정중히 다음에 오시라고 해야죠."
그녀가 지적한 건 특급기녀 하나가 몸이 안 좋은 걸 말하고 있었다.
"그게, 반신반의 했단다. 수십 년간 아무도 자르지 못했던 자단목 아니니……. 네가 지난번에 용봉만화공을 이겨낸 남자가 있으면 기꺼이 술 시중을 들겠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샐쭉한 표정으로 유모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주성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소녀, 이곳의 원주인 주약빙이라 합니다."
주성진도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소녀라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아닌가?'
"반갑습니다. 저와 같은 성씨군요."
"그러네요. 제가 용봉만화공을 익힌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게 문제인가요? 그걸 잘못 활용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음, 그러니까. 시전자의 문제라는 것이군요. 익힌 무공이 문제가 아니라……."
주약빙이 고개를 끄떡였다.
"맞아요. 바로 이해하시네요. 호호."
그녀의 웃음에 그녀의 면사가 들썩였다.
"외람되지만 용봉만화공을 왜 익혔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야, 호기심 때문이죠. 또 무엇이 있을까요? 혹시 모르죠. 용봉만화공을 이겨낸 자가 있다면 연애하고 싶어질 수도, 호호호."
그녀의 입담은 거침이 없었다. 주성진은 문득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단순히 이곳의 원주가 다일까, 아닌 것 같은데, 혹…….'
주성진은 그녀가 높은 지위를 가진 자의 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숨겨진 여식이거나…….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며 검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검선은 주성진이 시험을 받으려 하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 녀석이… 젊어서 그러나, 자칫 개망신을 당할 텐데. 혼자 옷을 다 벗고 추태를 부릴 수도 있다고.'
검선은 용봉만화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주성진을 상상했다.
'어이, 남사스러워라…….'
그 순간 주성진이 입을 열었다,
"제가 용봉만화공의 시험을 받아보죠. 그러면 되는 거죠?"
"네, 만일 이겨낸다면 제가 밤새 술 시중을 들지요. 대신 단둘이 말이에요. 할 이야기도 있고."
주성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단둘이라고, 에이 무슨 일 있겠어.'
"네. 어쨌든 제가 빠지면 인원수는 맞겠군요."
잠시 후 주약빙의 손에 피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곤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리리…….
아름다운 음률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주성진은 음률에 취한 듯 반쯤 눈을 감고 피리소리를 감상했다.
'피리를 잘 부는군……."
그녀의 피리 소리엔 사람을 몽롱하게 이끄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주성진의 경계가 조금씩 풀려간다.
주약빙은 주성진의 반쯤 심취한 모습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벌써…….'
그 순간 그녀의 피리 소리가 돌변했다.
삑삑삑, 삐익…….
그녀는 피리를 물고 길게 세 번, 짧게 한 번 소리를 뽑아내고 있었는데, 바늘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주성진은 음률에 취해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음률에 섞여 나오는 끈적끈적한 기운이 마치 거미줄로 칭칭 동여 감듯이 주성진을 꽁꽁 휘감고 있었다.
'이런, 제길… 처음부터 내공을 끌어올렸어야지…….'
주성진은 느슨했던 마음을 자책했다. 피리소리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었다.
주성진이 힘껏 내공을 끌어올리는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쇄액!
"앗, 저건……."
그녀의 오른발이었다.
제삼자의 눈에는 아름다운 호선이 그려지고 있었지만, 당사자에겐 지옥이었다.
칼끝이나 다름없는 발끝이 주성진의 턱을 걷어차려 했다.
절묘하고 쾌속한 솜씨에 박수를 보내야 하지만 그보다는 의표를 찌르는 예기치 않은 공격을 더 칭찬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제기랄. 설마 각법을 펼칠 줄이야. 난 그 와중에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솔직히 주성진은 치마를 입은 그녀가 치마를 말아 올리며 발차기를 시도할 줄 끔에도 몰랐다.
뚝…….
목이 부러질 정도로 고개를 젖힌 성진은 가까스로 그녀의 발을 피했다.
"호호호!"
"목뼈가 부러진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요."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왜, 내 목뼈가 부러졌으면 좋겠소?"
"아뇨, 여기서 송장 치우긴 싫거든요."
"다 보여준 것이오? 남았으면 후딱 합시다."
그녀가 싱긋 눈웃음을 친다.
"자, 처음은 몸풀기였고,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제가 펼칠 건 섭혼무의 일종인 색색환락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알겠소, 펼쳐 보이시오."
주성진은 단단히 대비하려 했다.
"제가 왜 무공 명을 공개했는지 모르겠나요?"
"모르겠소, 무슨 뜻이오?"
"이번 시험은 제가 춤을 출 동안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주성진은 기가 차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럼 법이 어디 있소? 움직이지 말라니."
"움직이지 말고 요령껏 이겨내 보세요. 대신 저도 살수는 펼치지 않을 테니까. 어때요, 공평하지 않나요. 호호."
주성진은 속았다는 기분이 가득 들었다.
'젠장, 괜히 한다고 했구나,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은.'
"흥, 그대 말고는 아무도 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안 하겠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해봅시다."
그 순간 그녀가 그녀의 유모에게 손짓했다.
"유모. 저기 손님 세 분을 방으로 모시고, 여기에 아무도 얼씬 못 하게 해주세요,"
"알았다."
"손님들 가실까요?
검선이 노태태를 따라가면서 주성진에게 전음을 펼쳤다.
―그래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망신은 당하지 않겠구나.
―제가 망신을 당할 것으로 보입니까?
―그래. 충고를 해주고 싶다만 그러면 안 되겠지……. 잘 해봐라. 나는 간다…….
그들이 떠나고 장내에는 주성진과 그녀만이 남았다.
순간 그녀가 면사와 겉옷을 동시에 걷어냈다.
"아!"
그녀의 보석 같은 눈빛이 주성진을 설레게 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대단한 미인이다……."
순간 그녀가 나비처럼 나풀나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성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색색환락무의 시작인가…….'
"호호호호, 호호호호……."
그녀가 춤을 추며 교소를 터트렸다. 한데 웃음소리가 묘하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듯 맑고 청아하다가도 요요하고 끈적끈적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음, 심장이 겉잡을 수없이 뛴다. 이것도 음공이겠지…….'
바로 그때, 그녀가 주성진에게 사뿐사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지 마시오.'
뒤로 물러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돌연 그녀가 몸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면서 뇌쇄적인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으음!"
잘록한 허리, 미끈하고 탄력 넘치는 다리. 상아같이 뽀얀 목덜미…….
거기에 향긋한 살 냄새까지 가세했다.
"호호호……."
또다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마치 주성진의 귀 옆에서 입김을 불어 넣으며 속삭이는 듯하다. 온몸이 짜릿하다.
주성진의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얼굴에 보조개가 파였다.
'정신 못 차리는데, 좀 더 가볼까.'
그녀의 춤이 격렬해졌다.
그녀가 가슴골이 살짝 보일 듯 말 듯 엉덩이를 흔들 때마다 주성진의 심장은 쿵쿵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헉!"
갑자기 힘이 빠지는 듯하더니 사방이 빙빙 돌았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온몸이 저리며 뻣뻣하다.
'이러다 쓰러질 것 같다. 뭐 이따위 무공이 다 있어…….'
눈이 가물가물, 자꾸 감긴다. 주성진은 안간힘을 썼다.
그전에 사실 그가 준비한 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쓸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잃을 상황, 어떡하던 펼쳐야 했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해보자고! 신지를 제압하는 무공에도 효과가 있을 거야.'
주성진은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내공의 성질을 바꾸기 시작했다.
'냉심이다. 몸이 차가워지면 정신이 번쩍 들겠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주성진의 몸이 급속히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너무 추워!
이가 딱딱 부딪치고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주성진의 찡그린 얼굴에는 어느새 홍조가 피어나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온다. 이제 빨리 끝내야 해!'
늦으면 자칫 기절하는 게 아니라 아예 동사할 지경이었다.
주성진의 눈이 번쩍 뜨이며 손으로 그녀의 접근을 막았다. 그녀가 순간 멈칫한다.
"우와 십년감수했네."
주성진은 무슨 귀신을 보듯 그녀에게서 급속히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