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암흑루에 가다 (2)
기세옥은 살짝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성진을 재차 바라보았다.
"음, 너의 말도 일리가 있군. 뭐 그건 그때 가서 확인해보기로 하고, 뭐 또 재미있는 건 없나?"
주성진은 자단목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검선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암상의 원로, 무인, 보검을 소지한 자… 거기에 안남이라.'
누군가의 얼굴 하나가 천천히 검선의 뇌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맞아. 안남 출신 이광요. 바로 그자야. 그자가 만년한철로 만든 검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어. 한데 그자가 실종되었다고……?'
검선이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실종된 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아. 그는 안남 출신인 이광요라는 자야."
"아, 그래요? 암상에 대해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무림에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어느 정도는 알지. 그들이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어둠의 상인이라 해도, 그간 정체를 자주 드러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어. 특히나 그들은 마교 출신 아닌가?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지.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니까……."
"……."
"아 오해하지 말게, 내가 수집한 정보는 아니야. 다 들은 걸세. 뭐 그렇다고 개방에서 들은 건 아니고. 하하."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면서 생각했다.
'내가 은연중에 정파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도 당당히 무림의 3대 축인데 말이야. 좀 더 보태면 무림의 4할은 정파의 세력권이라고! 하니 당연히 외부를 향해 귀가 활짝 열려 있겠지, 낮이나 밤이나…….'
주성진은 정파에 개방 외에도 수많은 정보조직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주의해야겠어, 내 주변을…….'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천상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삐리삐리, 딩딩딩딩…….
"하하하, 호호호……."
초저녁임에도 악기소리와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하지만 주성진은 입구를 들어서기 전부터 천상원의 오색 연등에 심취해있었다.
'와, 보기 좋은데! 휘황찬란하구나. 오색의 색깔이 조화를 이루면서 바람 물결을 이루고 있어…….'
주성진이 생각하기에 천상원 곳곳에 오색 연등이 걸려 불야성을 이룰 것 같았다.
'대낮같이 밝을 거야.'
그사이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건장한 청년의 호위를 받으며 조용히 나타났다.
그리곤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천상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주성진은 대표로 나섰다,
"오색 연등이 참 아름답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모두 가지고 싶습니다만. 하하."
"어머 그러세요. 그런데 어쩌죠, 칭찬은 정말 감사한 데, 드릴 수는 없답니다. 저희 천상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라서요."
"상징과 같은 거라……. 그리 말하니 더욱 가지고 싶군요. 평범한 오색 연등이 아닌가 봅니다."
그녀가 주성진을 바라본다.
한데 단순히 쳐다보는 것 같진 않았다. 주성진의 이모조모를 뜯어보는 것 같았다,
주성진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무공을 익혔음을 알았다,
'잠깐이지만 눈에서 광채가 났어. 역시 여기는 예사로운 곳이 아니구나.'
"호호, 그건 영업비밀이랍니다. 한데 검집이 참 멋있군요. 혹 무인이신가요?"
"뭐, 직업은 따로 있는데 무림에도 한 발 정도는 걸치고 있지요."
그녀가 긴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무림에 한 발을 걸치고 있다는 게……."
"그야 댁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댁도 뭔가를 익히고 있지만,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그녀는 좀체 잘 드러나지 않는 자신의 기세를 그가 알아채자 놀라워한 것이다.
'음, 보통 인물이 아니구나. 단순히 유흥을 위해 온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호호, 농담이시죠?"
"아뇨, 진담인데요."
"……."
주성진은 씩 웃으며 품속에서 소개장을 꺼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소개장을 써주더군요. 이곳 노태태 분께 전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소개장을 받고는 곧바로 펼쳐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안내해드릴 테니……."
"고맙습니다……."
주성진 일행은 그녀를 따라서 천상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작은 숲길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조경수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자박자박…….
그러다 자갈밭이 펼쳐진 곳을 지나니 아담한 가옥이 나타났다.
"노태태 어르신, 이랑입니다. 소개장을 가지고 온 분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누구의 소개장이더냐?"
"묘상택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호호, 생사푸줏간의 그 녀석이……. 알았다. 잠시 채비를 할 테니 손님들에게 기다리라고 전해주어라."
잠시 후 호호백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하지만 잔주름 없는 탱탱한 피부는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한데 일행 중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금상벽과 금상일이었다. 그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노태태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일 해가 서쪽으로 뜨려나? 너, 너. 여기엔 웬일이야?"
그러자 금상벽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 말씀은 저희가 드리고 싶군요.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이 녀석들아. 여기가 내 집이야."
금상벽이 목을 길게 빼며 입을 벌렸다.
"예에? 여기가 집이라고요? 성도 찻집에 계신 게 아니었나요?"
"거기는 일하는 곳. 그리고 가끔 낮잠을 자는 곳이지. 내가 잠이 많아서, 호호."
"저는 갈 때마다 주무신다고 해서 찻집에 가정집이 별도로 있는 줄 알았습니다."
노태태는 고개를 살짝 젓더니 주성진과 기세옥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의 귀빈은 여기 두 분인 것 같은데……."
주성진이 나섰다,
"반갑습니다. 주성진이라고 합니다. 소개장을 써준 분이 저와 좀 아는 분입니다."
"아, 그래요. 가만 주성진이라고요?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름인데. 아……."
그녀는 주성진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찻집 손님들이 이야기하면서 자주 거론되는 이름이었다.
물론 남자보다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구주상단의 상단주면서 무공까지 뛰어나다는 그자로구나.'
"호호.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가워요. 주 상단주님. 다관에서 손님들이 자주 언급하는 걸, 들었어요."
"하하. 저의 이름이 다관에서 자주 나온다구요……."
다관은 다루라고도 불리는 찻집으로 차를 마시며 식사를 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여 정보 교환처로 이용하는 일종의 사교장 같은 곳이었다.
"다음에 저희 다관에 놀러 오세요. 제가 최고의 차를 대접할 테니까요."
"네. 꼭 한번 들리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녀는 주성진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음, 소개장을 가지고 왔으니 허투루 대접할 수는 없고 어쩐다……. 특급기녀 하나가 몸이 좋지 못해 쉬고 있는데. 천상 원주를 데리고 와야 하나, 그러려면 꼭 거쳐야 할 것이 있는데. 에이 모르겠다. 일단 자격 심사부터 하고, 떨어질 수도 있잖아…….'
노태태가 재차 입을 열었다.
"기왕에 저에게 오셨으니 빠르게 심사를 보겠습니다. 원래는 심사관들이 따로 있지만 생략하도록 하죠. 참고로 저는 당연히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답니다."
"아, 잘됐네요. 그럼 저도 빠르게 말하겠습니다. 여기에 천년이 넘은 자단목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그것 일부를 반듯하게 잘라서 젓가락 열 쌍을 만들어드리지요."
그녀가 해연이 놀라다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지금껏 아무도 자르지 못한 자단목을 자르는 것도 모자라 젓가락을 만들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음. 묘상택 그 녀석이 이야기했나 본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검기상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자를 수가 없답니다. 만일 성공한다면 그 젓가락은 역사에 길이 남을 보배가 되겠지만요."
주성진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심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꼭 해 보이겠습니다. 참고로 검강이나 검환은 쓰지 않을 테니 심려하지 마시고요. 그러면 자단목이 흉하게 파괴되어 버릴 테니까요."
그녀는 또다시 놀란다.
'뭐야, 검강은 그렇다 쳐도 검환을 구사할 줄 안단 말인가!'
그녀는 눈앞의 주성진이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검환은 지난번 검선과의 대화 이후에 시험 삼아 해본 적이 있었다.
잠시 후 주성진은 거대한 자단목에 섰다.
비를 피하고자 큰 창고에 보관했던 것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오색 연등이 바람에 흔들린다.
'음, 썩지도 않는군. 대단한 나무야.'
주성진은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곧바로 내공을 주입하자 검에서 검기가 일렁인다.
찬연한 바닷빛이었다.
주성진은 노태태와 일행들을 쓱 바라봤다. 모두 기대에 찬 눈빛이다.
'한 번에 가자고! 아니면 망신이라고.'
"야합!"
주성진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휙!
스각!
자단목의 일부가 횡으로 갈라졌다.
'성공했다. 그럼 젓가락을 만들어 볼까…….'
주성진의 검이 한 바퀴 회전한다. 그러자 잘린 자단목의 껍질이 흠집 없이 벗겨졌다.
마치 사과의 껍질을 칼로 자른 것처럼…….
주성진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수직으로 여러 차례 검을 내리쳤다.
그러자 자로 잰 듯 일정하게 나무가 갈라졌다. 점점 젓가락 모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 됐구나. 이 정도면 내가 할 일은 다 한 듯하구나.'
그냥도 젓가락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예품이 되기 위해선 가공이 좀 더 필요했다.
노태태는 주성진이 건넨 젓가락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떨리더니 백옥 같은 치아가 드러났다.
"음, 완전무결하군요. 절단면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그럼 합격입니까?"
노태태가 주성진의 얼굴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네, 일단은 말이죠……."
주성진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다시 굳어졌다.
'뭐래? 다 된 것 아니었어. 배고픈데…….'
"다 끝난 게 아니었습니까?"
다른 이들도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다름이 아니라 양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희 식솔 중에 몸이 안 좋은 아이가 있어서, 세 사람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주성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양보하지 뭐.'
"그럼 저는 없는 것으로 하지요. 그러면 됐죠?"
의외의 대답에 그녀가 잠시 당황했다.
"아아. 그건 저희 스스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에게 대접을 제대로 못 한다면 두고두고 오점이 남을 테니까요."
"아니. 제가 양보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문제인가요?"
"흥분하지 마시고 좀 더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주성진은 팔짱을 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제가 이곳 천상원의 원주를 데리고 오도록 하지요. 아마 거처에서 지금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가까운 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