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사천상단의 상단주와 독대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가 입을 열었다.
"졌다!"
"물러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물러난들… 그뿐이다. 더는 날 욕보이지 마라."
주성진은 그의 말이 와닿지 않는다.
"내가 욕을 보였다고요?"
"그럼, 아니더냐? 충분히 날 이길 수 있음에도 가지고 놀지 않았느냐?"
주성진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오해하신 겁니다. 저는 치욕을 드리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인 거였는데… 음, 결과적으로 방법이 잘못된 것 같군요."
사납던 그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랬던 것이냐. 음, 그래도 난 먼저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싸움에 진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미리 항복할 순 없기에……."
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왜냐면 약정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그와의……."
"저, 그가 누군가요? 혹 사천상단의 상단주를 말하는 것입니까?"
목금양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방일우와 맺은 약정이다. 난 오래전에 그에게 목숨을 구명 받았다. 그때 꼭 은혜를 갚겠다고 했지. 그것이 말이 씨가 되어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결국,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던 거군요. 그러면 사천 상단주의 정체를 아십니까?"
"모른다, 오늘에야 알았다. 난 그저 여기를 지킬 뿐이다. 화원은 내가 좋아서 가꾸는 것이고. 음, 올해만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와의 10년 약정이 끝나거든……."
주성진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저에게 패배했다고 해도 방일우가 다시 싸우라고 한다면 다시 싸우지 않을 건가요?"
"아니다, 난 이제 여기를 떠날 것이다. 그에게 할 만큼 다했다고 생각하니까."
"하하, 잘되었군요. 부디 고향에 무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그가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고맙다, 한데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는가?
"무슨 일입니까?"
"말년을 무료하게 보내고 싶지 않다. 목표가 없으면 시든 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러니 내 부탁을 꼭 들어주길 바란다."
주성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했다.
'재대결을 원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내가 도전할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반드시!"
"하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이제 넘어서야 할 목표가 생겼으니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구나, 하하하."
"이거 무서운데요. 하하."
시간이 흘러 주성진과 일행들은 화려한 전각에 도착했다. 사천상단의 상단주 방일후가 칩거하는 곳이었다.
한데 문 앞에는 백여 명의 무사들이 겹겹이 지키고 있었다.
주성진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순간, 무사들 사이로 초췌한 몰골의 방일우가 나타났다.
"그대와 독대를 청하오."
주성진은 그가 순순히 나타나 본인에게 말을 걸자 무척 의외라 생각했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주성진은 자신을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초면인데 저를 잘 아시나 봅니다."
"상인이 상인을 알아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니오?"
주성진은 빙그레 웃었다.
"글쎄요, 저의 용모파기를 보셨겠지요. 그리고 상단주께서 저를 아시는 만큼 저도 상단주님을 알고 있답니다. 사파 소속에 저처럼 무공도 익혔다는 것을……."
"하하, 그런 부분에서 그대와 나의 공통점이 있구려."
그는 순순히 무공을 익혔음을 시인했다.
주성진은 그와 가볍게 대화하면서도 내심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지? 날 왜 날 따로 보자는 걸까? 혹 무슨 술수를 부리려는 건 아니겠지…….'
의문은 있었지만, 주성진은 일단 고개를 끄떡였다.
무조건 거절하는 것보다는 그의 말을 들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만약에 위험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무공을 믿었다.
"알겠습니다. 여기 근처에서 이야기하시죠?"
"나의 집무실이 좋을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그곳은 곤란할 것 같군요.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방금 생각난 것인데 혹 지금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닌가요. 식솔이나 중요 인물을 도피시키려고요. 이런 규모의 상단에 대피로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방일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뭐 상식적인 지적인데, 난 그렇게 하지 않았소. 그대가 목금양을 넘어선 순간 포기했소이다. 사실 그전에 정문에서부터 낌새가 좋지 않았지. 전서구도 나타나지 않았고."
주성진은 외원의 누군가가 그에게 정보를 알렸다고 생각했다.
'하긴, 중원 5대 상가인 사천상단이 허술하지는 않겠지. 더구나 상단의 핵심인물은 사파 출신 아닌가! 분명 위기 대응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을 거야.'
주성진은 그래도 의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도망갈 시간은 있었을 것 같은데, 내가 목금양과 싸우는 동안에라도…….'
주성진은 일단 자신의 의문을 머릿속 한편에 밀어 넣었다.
"여기 화원이 참 좋더라고요. 거기서 이야기를 하시지요. 단 독대는 좋은데 제가 임의로 모든 걸 결정할 수 없음을 서전에 알려드립니다."
"그거야, 나도 예상한 바이요. 하지만 모든 게 잘 될 것이라 믿소이다."
"……."
그들은 화원 속에서 급히 준비한 간이의자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꽃향기가 사방에 그윽하다.
방일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목금양 그 친구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나는 곳인데……. 그러고 보니 그는 어떻게 되었소? 내 생각에 여길 떠났을 것 같소만."
"네, 그는 떠났습니다."
"그렇구려. 내가 그를 구해주긴 했으나 그도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소. 난 하등의 불만이 없소이다. 더구나 내가 그대와 독대하게 된 계기도 그가 이야기해준 덕분이오."
주성진은 그가 곧바로 본론을 꺼내자 귀를 기울였다.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한데…….'
방일우가 잠시 심호흡했다.
'과연 그가 나의 제안을 들어줄까, 현명한 자라면…….'
"나는 만성 독약에 중독된 상태요!"
주성진은 깜짝 놀랐다.
'뭐라, 독에 중독되었다고, 이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사실 그가 죽으면 곤란했다.
아무리 그가 죄를 지었다고 해도 죄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소정의 절차가 필요했다. 재판과 유사한…….
그 순간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난 정기적으로 해약을 복용하지 못하면 죽소이다. 아, 참고로 곧 약이 떨어질 것이오."
"음……."
"주 상단주, 난 이번에 이야기가 잘 마무리 안 되면, 이 자리에서 심맥을 끊고 자결할 것이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주성진은 그의 협박 아닌 협박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구나. 그가 자살하면 온전히 사천상단을 접수할 수가 없어.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고…….'
주성진은 당장 그를 제압할까 생각해봤다.
'제압한들… 해약을 먹지 못하면 어차피 죽은 목숨인 걸…….'
주성진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음,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들어나 보자.'
"허허 참, 만성 독약에 중독되셨다고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뭐 예전에 내가 원해서 그리 한 것이지만… 뭐, 원래 사파가 그렇소……. 서로서로 잘 믿지 못하니까, 후후."
주성진은 대략적인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옛 사도련에서 방일우에게 도움을 준 게 틀림없어. 그렇다는 건 사천상단을 키우는 데 그들의 역할이 혁혁하다는 말이네. 대신 방일우에게 독약을 먹여서 배신하지 못하게 한 거고.'
주성진이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요?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나요?"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일전에 목금양이 말했소. 자기를 넘어서는 강자라면 나의 중독을 고칠 수 있다고."
"그 말씀은 제가 상당주님의 중독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군요. 한데 전 의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습니다만……."
"그야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오. 방법은 내가 알고 있소. 사실, 이 이야기는 목금양에게도 털어놓았었소. 하지만 그는 내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소이다. 그의 공력이 2갑자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공력이 목금양을 훨씬 상회할 것이라 확신하오."
"……."
"단순히 목금양을 이겼다고 그러는 건 아니오."
주성진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그러면요?"
"내가 확신하는 건 그대가 약관의 나이이기에 그렇소이다. 난 그대가 깨달음보다는 엄청난 공력으로 초고수가 되었다고 생각하오. 물론 소소한 깨달음 정도는 있었을 것이오. 단순히 공력의 우위만으로 목금양을 이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소이다."
"……."
"하지만 확률적으로 공력 상승이 더 큰 원인일 것이오. 그래서 난 모든 수를 배제하고 그대에게 독대를 요청한 것이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내가 젊다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군, 그의 판단에…….'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저의 마음을 움직일 방법을 가지고 있겠군요. 우선,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말해 보시지요."
"간단하오, 나의 모든 내공을 격체전력으로 넘길 테니 그대는 받기만 하면 되오. 그대의 높은 공력이라면 독을 품은 이종 진기도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이오. 성공한다면 오히려 공력이 대폭 상승하겠지……."
"그러니까, 독이 상단주님의 내공에 스며들어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내공에 기생하는 독이요. 해서 일명 내공독이라 부르기도 한다오. 그렇기에 한번 중독되면 절대 벗어날 수가 없소이다. 해독약을 복용한다고 해도 그때뿐이지 완치는 불가능하오."
주성진은 세상에 별의별 독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내공을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항시 죽음을 염두에 두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은데. 내공 없이도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주성진은 손을 들었다.
"저, 내공을 포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내공을 포기하려면 단전을 파괴해야 하는데, 단전이 파괴된 순간 독이 발작해서 죽게 되오."
주성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지독한 독이구나. 분명 자연에서 얻은 독은 아닐 거야. 어떤 방식인지 모르겠지만 가공을 거친 것이 틀림없어.'
"상당히 위험한 독인데, 왜 여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죠?"
"내공독은 대량 살상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소. 독을 중독시키는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이오. 먼저 반드시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대를 붙잡거나 아니면 나처럼 자발적으로 응해야 하는 수밖에는 없소이다."
"음, 효율은 떨어지지만 한번 중독되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독이란 말이군요. 배신 방지 목적이거나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만들 때 많이 쓰였겠군요."
방일우는 고개를 끄떡였다.
"잘 보았소, 그렇소이다……."
"제가 만일 상단주님의 청을 받아들인다면 반대급부로 상단주님은 뭘 내놓을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