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사천상단에 가다
사천상단의 웅장한 대문 앞에 일단의 무리가 늘어서 있다. 바로 주성진의 일행들이었다.
그들은 마음껏 기세를 뽐내고 있어 사뭇 위협적이었다.
그 순간 사천 상단의 경비초소에서 잔뜩 주눅이 든 경비 조장이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그 뒤에는 역시 겁에 질린 경비 무사들이 여럿 보였고.
"무슨 일이시지요?"
이곽춘이 말을 받았다.
"난, 개방 장로 이곽춘이오. 상단주를 만나러 들어가야겠소."
"저. 죄송하지만 사전 약속이 없으면 그분을 못 만나는데요."
"사전 약속이라… 죄인에게 무슨 사전 약속. 어서 길을 비키시오. 여기서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경비 조장은 돌아가는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다.
'안 돼, 그래도 시간을 끌어야 해, 최소한 위로 기별이 갈 동안만이라도.'
주성진의 일행이 다가오는 순간, 경비초소에서는 모처에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에서 전서구가 괴조의 먹이가 된 걸 모르고 있었다. 괴조는 다름 아닌 낭낭이었고.
"제가 알기로는 무림과 상단은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허허. 그 말은 어디에서 들었데…? 이보시오, 사천상단은 그저 그런 상단이 아니오. 그들 수뇌부는 뼛속까지 사파의 일원이란 말이오."
"사파라고요?"
이곽춘은 고개를 끄떡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도 불법 단체로 규정한 사도련과 내통하는 사이요……. 아시겠소이까?"
경비 조장은 그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음, 사천상단 내원에 비밀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사천상단은 사천상단 외부를 감싸고 도는 외원이 있고 안으론 내원이 따로 존재했다.
내원에는 외원보다 더 높은 담장이 있었고 담장 위에는 철조망까지 처져 있었다.
이곽춘이 경비 조장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 기세옥이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는 설산검객 조천걸로 역용한 상태였다.
'저런, 답답한 친구 같으니. 쳐들어왔으면 기세 좋게 앞으로 쭉쭉 나아가야지, 안 되겠다. 내가 좀 나서봐야겠다.'
기세옥이 주성진에게 전음을 펼쳤다.
―쯧쯧, 이러다 밤새우겠다. 빨리 진입해야지, 안 그래?
―뭐 좋은 방책이 있습니까?
―우리 둘이 상황을 바꾸자고. 우선 내가 시범을 보여줄 테니. 앞으로 내가 주도적으로 나서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기세옥이 앞으로 나서더니 갑자기 외원의 경비 조장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너희들이 보낸 전서구는 이미 죽었어."
경비조장의 어깨가 잠시 부들부들 떨렸다가 멈추었다.
'뭐라고, 전서구가 죽었다고. 그럴 리가…….'
그 순간 주성진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전혀 낌새를 못 느낀 거였다.
"으음 전서구라뇨, 무슨?"
딴에는 부정하려고 애를 쓰는 경비조장이 말을 하다말고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건 기세옥과 눈이 마주친 바로 직후였다.
"허억!"
기세옥의 눈동자에서 섬광이 발했고 그 직후부터 경비 조장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반항할 수가 없었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 거부하고 있었다.
경비 조장은 자신의 내심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공포에 떨고 있다고?'
그는 애써 부정하고 싶지만, 또다시 전율에 휩싸였다.
'아, 내가? 그럴 리 없는데…….'
하나 이미 본능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세옥을 감히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울 지경이었다.
두려움은 점점 복종하고 싶은 마음으로 변해간다.
공포와 절망이 그의 뇌리를 덮는 순간 기세옥이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내 펼쳤다.
그건 바로 주성진을 죽이려다 역으로 당한 2인의 얼굴이었다.
"이봐, 이들을 본 적 있지?"
부정해야 한다. 모른다고 해야 한다.
이성은 거부하고 싶지만, 본능이 따라주지 않는다.
"아, 그것이……."
"사실대로 말하면 여기 말고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해주겠다. 설마 무림 공적으로 몰리는 사천 상단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기세옥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마지막 남은 책임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내가 보증한다."
그가 보증한다는 건 결국 주성진이 보증한다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본 적이 있습니다. 필요하면 증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경비초소의 나머지 경비 무사들이 모두 증인이 되겠다고 소리쳤다.
"저도 증인이 되겠습니다."
"저도요……."
외원의 정문을 통과한 일행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주변에 바삐 일하는 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기 일에 열중할 뿐 주성진의 일행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부지런히 짐을 나르는 사람도 있었고, 창고를 들락거리면서 물목의 수량을 파악하여 기록하는 사람도 보였다.
그 길로 한참을 나아가니 철조망이 씌워진 내원의 높은 담장이 나타났다.
순간 웃고 떠들던 무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내원 경비 무사들이었다.
주성진은 첫눈에 그들이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들임을 알아보았다.
'무공을 정식으로 익힌 자들이군, 뭐 그래 봤자…….'
기세옥의 충고를 들은지라 주성진은 곧바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뻗어 나오자 경비 무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후후. 본능적인 두려움을 안겨 상대를 굴복시킨다……. 자주 써먹으면 안 되지만 이럴 땐 유용하군.'
"내원의 문을 열라!"
주성진의 말이 북풍한설처럼 차갑다.
이미 스산한 기운이 자신을 옥죄고 있어 반항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안간힘을 써 본다.
"저, 저… 무슨 일입니까?"
"이곳 상단주는 무림공적이다. 사도련의 잔당들과 내통했으니까……."
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다,
"정말입니까?"
"나중에 살길을 도모해줄 테니 빨리 문을 열어라."
"아, 알겠습니다."
끼이익…….
내원의 문이 열리고 일행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화원과 웅장한 전각들이 그들을 반겨 주었다.
'음, 대단하네, 여기부터가 진짜군…….'
한데 너무 조용하다. 사람의 그림자라곤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주성진의 눈은 계속 화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음, 사람이 있군…….'
화원은 온갖 기화이초들로 가득했다.
만발한 기화이초들의 아름다움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지경이고 기화이초들이 내뿜는 향기는 연신 코를 벌렁거리게 했다.
그 순간, 노인 하나가 불쑥 꽃밭에서 허리를 폈다,
"댁들은 뉘시오?"
노인은 땀을 훔치며 주성진을 위시한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목금양 선배님, 선배님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이곽춘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하하,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군. 가만 누구더라……?"
그가 이곽춘을 자세히 뜯어본다.
"오라, 그러고 보니 방가용의 제자였군. 방가용 그 친구는 잘 있나 모르겠네."
방가용은 이곽춘의 사부였다,
"네, 아직 정정하십니다. 개방의 태상장로로 계시지요."
"그런가, 한데 그대가 웬일이지?"
"그건 제가 오히려 묻고 싶은 말입니다. 목가장의 장주였던 분이 화원지기라뇨?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목가장은 정파에 속한 문파로 규모 면에서 오대세가에는 못 미치나 그래도 나름 중견 문파로 인정받고 있는 문파였다.
더구나 장주의 무공은 군계일학으로 소문이 자자했었다.
목금양은 코를 씰룩거리며 화원에서 나왔다.
"아. 향기 좋군… 안 그런가?"
동문서답이다.
"저희는 상단주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무기를 패용하고 우르르 몰려왔다? 좋은 일은 아닌 것 같군."
"그가 좋지 않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선배님, 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목금양은 손에 묻은 흙을 바지춤에 쓱쓱 문지르더니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나 사연 하나는 있는 법이지. 나를 넘어선다면 이야기해주겠네……."
그의 말은 자신을 이겨야 상단주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흥, 화원지기도 모자라 호위무사까지 겸하고 계신 겁니까? 괜히 시간을 끌다가 상단주가 도망치기라 하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럽니까? 제가 알기론 그도 경공을 익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공을 익혔으니 말이죠."
"음… 하여튼 그건 내 몫이고 자네가 덤벼보겠나?"
"이런, 정말……!"
이곽춘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지만, 엄연히 상대는 자신이 넘볼 수 없는 강자였다.
그 순간 또다시 기세옥의 전음이 주성진의 귓전을 파고 든다.
―쯧쯧, 이게 정파 나부랭이들의 고질적인 병이라니까. 그냥 저놈의 말을 개무시하고 밀고 들어가면 될 텐데. 사람이 적어, 무공이 딸려, 나 원 참…….
―어르신이라면 정말 그렇게 하실 겁니까?
―나, 검선인데! 그렇게는 못 하지. 남들이 정파의 명숙으로 우러러보고 있잖아, 하하.
―에이, 뭡니까. 어르신도 그러지 못하면서…….
―그러니 네가 나서라 이 말이야. 그래도 가장 중립적인 인물은 너와 감전동뿐이잖아. 아, 감전동은 무공이 딸려서 안 되겠군.
사실 그렇지 않아도 주성진 본인이 나설 참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실마리는 내가 풀어야 하는군…….'
"주성진입니다."
주성진은 짧게 이름을 밝히며 전면에 나섰다.
"흐흐, 강호를 떠도는 낭인도 아니거늘 사문 정도는 밝히는 게 도리가 아닌가?"
"지금은 그 예를 갖추기 힘들군요. 제가 먼저 갈까요? 아니면 먼저 들어오시겠습니까? 무기가 없으시니, 저도 검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아, 고수의 방식 말고 전통적으로 해보자고요."
"감히!"
주성진의 도발에 그의 얼굴색이 변한다. 흰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게 화가 많이 난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주성진이 말한 진의를 이해 못 한 건 아니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주성진이 말한 고수의 방식이란 공간 대 공간의 싸움을 말하는 거였다.
그런 싸움을 일반인이 본다면 몹시 지루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고수들이 그런 싸움을 고수하는 건 방어를 우선으로 하면서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돌연 그가 양 손가락을 꼿꼿이 세웠다. 그러자 손끝에 회색의 기류가 맺히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주성진은 묵묵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언뜻 보면 아무런 준비 동작도 취하지 많은 채 서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주성진의 머리는 민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음, 지법의 고수인가? 요즘은 생각지도 못한 자들이 계속 내 앞에 나타나니…….'
순간 그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주변의 일행들이 싸움에 방해되지 않도록 흩어지기 시작했다.
'온다…….'
목금양의 양손이 기울어진 십자로 휘둘러졌다.
날카로운 경력이 빛살처럼 빠르게 쇄도해 왔다.
주성진은 한껏 물이 오른 보법으로 그의 지력을 피했다. 빠르고 위맹하긴 했지만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이 목금양이 거리를 좁혀왔다. 이는 애초부터의 목적이었다.
근접전이 그가 바라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주성진 역시 사양하지 않고 목금양을 마주해 신형을 움직였다.
'후후, 건방진… 어떻게 저 나이에 저렇게 무위가 뛰어난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저 녀석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고 말겠어.'
목금양의 입꼬리가 계속 말려 올라갔다. 주성진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금양은 모른다. 주성진이 형산에서 신물이 날 정도로 근접전을 펼친걸!
그의 사부나 사형제들과 함께…….
"야합!"
카랑카랑한 기합성이 터지고 회색의 빛을 발하는 목금양의 수강이 주성진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쐐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