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검선과의 대화 (3)
기세옥의 물음에 주성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실은요, 당시 제가 그때 역용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는 저를 몰라요. 알면 이 세상 끝까지 저를 찾으러 올지도 몰라요."
기세옥은 주성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녀석, 심양수와 싸운 게 틀림없군.'
"너, 심양수 그놈과 싸웠지? 우선 그것부터 말해봐."
"네, 그렇습니다. 그때 그의 회전 권강에 죽을 뻔했습니다. 간신히 도망쳤는데 갈비뼈에 금이 갔었지요. 제가 무림의 강자를 여쭈어본 것도 그때 그 상황 때문입니다. 상대 무공의 특성을 몰라서 당했거든요."
기세옥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이봐. 그땐 왜 이거어검을 사용하지 않았나?"
"아, 그때는 이거어검을 잘 사용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 이후에 터득했거든요. 어쨌든 그의 무공에 영감을 얻어 회전 검강을 터득했지요."
기세옥은 주성진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음, 이기어검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짧은 시간에 뚝딱 완성했단 말인가…….'
"잠깐, 그전에 이기어검을 어떻게 펼치게 되었는지 말해봐. 시기적으로 아주 짧은 기간인데 그 어려운 걸,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완성했다는 거냐? 네가 신이냐?"
"아, 그게요, 실은 그전에 제가 기로 조정하는 비검술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실전에도 사용했었고요. 한데 저의 그런 모습을 본 관전자가 말해주더군요. 그게 비검술이 아니고 이기어검의 초입이라고요."
"……."
"그래서 펼치게 된 것이랍니다. 원래 위기시에 집중력이 최고조로 높아지잖아요, 헤헤."
기세옥은 주성진이 확실히 난 놈이라고 생각했다.
"음, 그렇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전부터 익히고 있었단 말이군. 누군가가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잘 몰랐던 거고."
"뭐. 결과는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사실 운이 좋았습니다. 앞으로는 미리 준비해서 대처하려고 합니다, 행운이 언제나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요."
기세옥이 손을 흔들었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야. 최고의 연습은 실전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만한 게 없지. 무공이 일취월장하기 위해선……."
"네, 사실 아찔하면서도 짜릿하더라고요, 하하."
"……."
주성진은 이후 그에게 심양수를 만나게 된 경위를 말해주었다. 물론 다는 아니다.
"……. 이상입니다."
"잘 들었다, 그나저나 아깝네, 천월무녀도의 그림이 사라져서……."
"그 당시 상황이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림을 배워 다시 재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세옥은 빙그레 웃는다.
'후후 잘되었군, 구실이 필요했는데 당분간 이 녀석을 따라다니자. 느낌에 나의 중증도 이 녀석과 같이 있으면 자연스레 풀릴 것 같아, 유쾌하게 웃고 떠들다 보면 말이지…….'
그는 주성진이 천월무녀도를 펼쳐 보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이봐, 내가 너의 그림 선생이 되면 어떻겠나. 내가 예술에 조예가 좀 있거든, 특히 조각이나 그림에 있어선 어딜 가도 빠지지 않아."
주성진은 그가 목검을 만드는 장면을 몸소 보았기에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당분간 같이 지내자는 말이구나, 이거 그를 무공 스승이 아닌 그림 스승으로 모시게 생겼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좋지요, 앞으로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그렇게 깍듯이 날 대할 필요는 없어.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면 충분하네."
"그래도……."
"괜찮다니까, 그리고 기왕에 너를 따라다니는데 이 모습을 하면 좀 불편할 것 같아. 나도 너처럼 역용을 해야겠는데……."
주성진은 그의 특이한 모습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 것으로 생각했다.
"저, 그런데 눈 색깔도 바꿀 수가 있는 건가요?"
"그럼, 평상시는 가능하지. 하지만 너와 대결을 펼칠 때처럼, 긴박한 상황이 오면 원래의 색깔로 돌아올 것이야."
"그게 혹시 내공심법의 영향인가요?"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피가 섞인 것이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천산이야."
주성진은 흠칫했다.
'허허. 이것도 인연인가, 천산이라니…….'
전생에 주성진의 선조가 만든 상단이 휘주상단의 모태가 되는 천산제일상단이었다.
또한, 연화랑이 건네준 비급이 모두 천산 일색의 무공이었다. 천산검해. 천산장, 천산보 등
"저 그럼 혹시 천산파 출신인가요?"
천산파는 대막으로 불리는 고비사막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천산산맥에 있는 문파였다.
위치상 몽골의 영역이었고 기세옥의 말처럼 다민족이 혼재해 사는 곳이었다.
"천산파를 잘 아나?"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저 책에서 본 게 다인데 그나마 그것도 짤막하게 기술되어 있더라고요."
"허허, 그런가, 언젠가 내가 천산파를 구경시켜주지. 지금은 그저 그런 문파로 전락하였다고 하던데 안 가본 지 50년이 넘었어. 사실 그리된 배경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몽골이 쳐들어와서 천산파가 초토화되었거든……."
"……."
"그때 대다수 무인이 몽공병과 싸우다 전사했어. 특히나 고수의 8할이 사망한 게 천산파로는 치명적이었지. 그들이 죽음으로 무공의 맥이 끊겨버렸으니까……."
주성진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무공서는 건재하지 않습니까?"
"그게 말이야. 무공서는 패색이 짙어지자 불태워 버렸다고 하더라고. 비급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소각을 선택한 모양이야. 모르겠어, 얼마나 다급했기에 그리했는지. 정녕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는지……."
"……."
"음, 그리고 내가 천산파의 기본 무공을 익힌 건 맞지만 실상 내 무공의 대부분은 천산파와 관계가 없어. 천산 깊숙한 산중에서 기인을 만난 후 급격히 발전한 것이거든. 당연히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서 말이지."
주성진은 그의 말투에서 천산파에 그리 애정이 없다는 걸 느꼈다.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순간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천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얼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그분이 나타나서 나를 구해주셨지. 그리곤 나의 사정을 듣고는 같이 동거하게 되었어. 그 후 그분이 가르쳐준 게 단천비검(斷天飛劍)이야."
주성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소한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검이라……. 아무래도 이기어검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저 단천비검이 이기어검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니야, 단천비검 속에는 여러 검법이 있어. 그중에 하나가 이기어검이고. 하여튼 난 이후 그분과 같이 동거했는데 그리 기간이 길지는 않았어. 5년 후에 운명하셨거든. 아 그분이 키우던 새가 바로 저 친구이고,"
그는 손가락으로 공중을 배회하는 괴조를 가리켰다.
"아, 그렇군요."
"난, 그 후 20년간 무공을 익히고 하산했는데, 나를 쫓아낸 천산파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생각을 고쳐먹었지. 자꾸 그분의 말씀이 머릿속에 뱅뱅 돌았거든……. 그게 뭐냐면 바로 최고의 복수는 바로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거였어."
주성진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최고의 복수는 바로 복수를 하지 않는 거라고요?"
"후후,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 '가장 좋은 복수는 증오에 미소 짓는 것이다. 분노를 억누르고 무림에 우뚝 서서 그들을 멸시해라. 그것이 오히려 더 통쾌한 복수이니라.'라고 말이야……."
주성진은 저 말이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복수에 사로잡혀 사는 삶은 의미가 없지,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자칫 늦으면 그자들이 늙어 죽을 테니까…….'
주성진은 본인의 생각을 추스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 그 기인 분은 잘 알려진 분인가요?"
"아마 그럴지도. 음… 그분은 한사코 본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 그분이 나를 구해주었을 때 그분은 허무와 우울증과 싸우고 계셨어. 오히려 나로 인해 생기를 되찾으셨지. 그로 미루어 볼 때 그분은 특정 개인이나 단체에 복수하고 허탈감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
"……."
"목표에 도달하고 나니, 할 일이 없어진 것이지. 물론 처음엔 기뻐하셨을 거야. 음, 내가 이리 추측하는 건 나이가 드니 그분의 심정을 알 것 같아서야. 뭐, 사실 따지고 보면 후회하지 않는 삶이 어디 있겠냐마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면서도 자신은 허탈감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난 다르지, 하고 싶은 게 많거든. 복수도 중요하지만 달리 할 일도 많아. 결혼도 해야 하고, 자식도 낳아야 하고, 거부가 되어야 하고, 무공의 끝도 보아야 하고, 등등.'
이야기하다 보니, 그는 과거사까지 다 이야기한 셈이 되었다.
"그럼 그림과 조각은 언제 터득하신 건가요? 무공을 익히니 배울 시간이 없었을 텐데"
"그분이 돌아가시며 한 말이었다. 취미를 가지라고. 그래야 무공도 늘 것이라 하면서…….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 이해가 안 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하산하고 난 뒤에야 그분의 말씀이 속속 머리에 들어오더라고."
"……."
"강호를 주유하면서 난 점점 재미와 자신감이 붙었지. 그림과 조각도 원래부터 소질이 있었는지 점점 일취월장하게 되었어. 한데 그만 다시 아집에 사로잡히고 말았어. 그것이 바로 반로환동에 대한 염원이었지."
"……."
"좀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는데 고작 오십의 나이에 그것에 집착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후회막심이지 뭐……."
주성진은 그게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완벽한 인간이 있을까. 수시로 변하는 게 마음일진대. 아무리 명경지수 같이 마음을 닦으려 해도 자꾸 더럽혀지는 건 어쩔 수 없어……. 매 순간 그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도록 노력하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야. 제삼자의 생각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한데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이 들린 것이다.
발걸음이 안정된 것으로 보아 무인들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지?"
"네. 두 사람입니다. 무인이군요."
"할 수 없지, 좀 기다려보자고."
그 순간 그가 역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뒤틀리더니 금방 딴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겉옷을 벗더니 뒤집어 입었다.
알고 보니 그의 도포는 양쪽 겸용으로 입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주성진은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군요. 흑색 무복을 입은 30대 무인의 탄생입니까?"
"흐흐, 기왕이면 젊은 게 좋지 않냐 말이야. 자네 나이대와 비슷하게 바꾸려다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아서 그만두었네, 하하."
"그나저나 다가오는 무인들이 심상치 않군요. 무공이 꽤 높을 것 같은데요."
그가 빙그레 웃는다.
"설마 두려운 건 아니겠지?"
"헤헤, 상대적인 관점입니다. 강호에서 절정 초입이면 꽤 높은 무위 아니겠습니까?"
"그럼! 충분히 한 지역을 호령할 수 있지."
주성진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한데 조용히 넘어가진 않겠지요?"
"그야 저들 하기 나름이겠지. 우리는 상황 봐서 대응하면 되고."
"네,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