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암기술을 논하다 (1)
주성진이 그녀에 대해 의아스럽게 생각할 때, 순간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녀석아, 말은 바로 해야지, 너 같은 젊은 처자들의 우상이겠지, 하하. 잘 생겼지, 무공 뛰어나지, 돈도 많지… 하지만 네 또래의 남자애들이 모두 다 좋아한다고는 보진 않아. 속 좁은 애들도 많거든, 그런 놈일수록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성진이 있는 탁자로 걸어오고 있었다.
주성진이 그를 바라보자 호남형의 남자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저희 객잔에 온 걸 환영합니다. 하하."
주성진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생각한 건 그의 말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는 거였다.
만일 마음에 둔 여인이 없다면 그런 여인들의 은근한 시선을 즐겼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처지에서는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혹 이곳 객잔의 주인장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의 아비기도 하지요. 지금은 손님이 뜸한 시간이라 저와 제 딸아이가 객잔을 돌보고 있습니다. 한 푼의 경비라도 아끼려면 어쩔 수가 없지요. 하하."
주성진은 대강의 상황을 짐작했다.
'점소이들이 쉴 동안 대신 두 부녀가 일하는 모양이야. 저런 모습은 상당히 좋아 보이는군, 객잔 주인이라고 거들먹거리며 밑에 사람을 닦달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주성진은 그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아, 그렇군요. 한데 저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그거야 남자들 심리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십시오."
"제가 뭐 이해하고 자시고 할 것이 있나요. 절 그리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시기를 덜 받을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객잔 주인의 얼굴에 얼핏 실망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내가 순간 헛된 꿈을 꾸었나 보다. 저자 정도면 당연히 애인이 있겠지, 쯧쯧 나도 참! 방금 내 입으로 미남에 부자에 고수라고 말을 해놓고선…….'
실망은 그의 딸도 동시에 했다. 그녀는 상당히 아쉬운 표정으로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같이 왔습니다."
"아. 정말요? 한데 어디에……?"
주성진은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 이럴 때 표정 관리하기 힘들군.'
"저보다 앞서 도착해서 지금쯤 여기 객실에서 쉬고 있을 겁니다. 아 그녀 혼자 온 건 아니고 다른 일행도 있습니다."
주성진이 친절하게 상황을 말해준 순간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무례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손님 앞에서… 마음이 좀 쓰라리지만 할 수 없지. 그래도 그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내가 태어나서 처음, 첫눈에 반한 사람인데 말이야.'
그녀는 구실을 찾기 위해 염두를 굴렀다.
'아. 그래 무공! 그와 암기술에 관해 논해보자. 설마하니 내 청을 거부하진 않겠지, 그러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고…….'
"저, 식사를 마친 후에 시간 좀 내주시면 안 될까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익힌 암기술을 보시고 평가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주성진은 그녀의 예상치 못한 요청에 잠시 눈을 껌뻑였다.
'허허, 암기술을 봐 달라고……. 당돌하지만, 용기가 가상하네. 초면에 남에게 부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뭐 나도 당가의 암기술이 궁금하니까 이참에 견식 한번 해보자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제가 암기술에는 조예가 떨어집니다. 아마 소저의 아버님이 평소에 말해주시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나요?"
그녀가 머뭇거리는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나섰다.
"사실 제가 딸아이를 봐주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제삼자의 눈으로 냉철하게 봐주는 것이 딸아이에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 잠깐 그러고 보니 손님! 두 분은 저희가 누군지 아는 것 같은데요."
감전동이 재빨리 해명에 나섰다.
"제가 몇 년 전에 여기에 묵은 적이 있는데 그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지요."
"아. 손님께서 여기를 다녀가셨군요. 이거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그때는 사업 초창기라 정신이 없었죠. 한데도 잊지 않고 이렇게 또 방문해 주셨으니 정말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하하."
"아이고 아닙니다. 그땐 제가 수염을 좀 기르고 있었고 옷차림도 달랐었지요. 그리고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제가 다신 오지 않았겠지요, 하하."
이야기를 듣던 주성진은 마냥 손님인 체하는 게 좀 걸렸다.
한 번 정도는 객잔의 손님이 아닌 무림의 예법으로 그를 대하고 싶었다.
'인사를 해야겠어.'
주성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맞잡았다. 무림의 예법인 포권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형산파 출신 주성진이라 합니다. 지금은 뜻한 바가 있어 상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는 주성진이 자신에게 예를 갖춘다는 걸 알아차렸다.
'휴, 역시 놓치기 아까운 인물이었어. 지덕체를 다 갖추었네, 그려.'
객잔의 주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주성진과 같은 방식으로 예를 갖추었다.
"하하. 반갑습니다. 당문의 부족한 제자 당가홍이라 합니다. 그리고 여긴 내 딸 당혜미이고요. 여기서 지내는 동안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 ? *
식사를 마친 주성진은 당가홍 부녀의 인솔로 객잔 근처의 야산에 올랐다.
한편 감전동은 피곤하다며 객실로 직행했다.
'다 왔군, 숲이 생각보다 울창한데.'
그들이 멈춘 곳은 산 정상의 공터였다.
바로 그때, 당혜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멀리 있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주 상단주님, 제기 저기 멀리 떨어진 노송의 한가운데 지점에 동전을 던질 거예요. 한데요, 주 상단주님도 심심풀이 삼아 같이 던져보시면 어떨까요?"
주성진은 그녀의 속셈을 알고 씩 웃었다.
'허허 자신의 암기술을 봐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아예 내 실력까지 보자는구나. 그래 일단 다 들어준다.'
"음, 내가 소저에게 한 수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소이다."
"호호,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다.
'뭐라. 날 봐준다고! 난 그저 빈말이었는데…….'
주성진은 속마음과 달리 그녀의 말에 맞장구쳐주었다.
"고맙소이다."
"호호, 뭘요,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잠시 후 10장 거리의 노송에 목표 지점을 조준한 그녀가 바로 손을 휘둘렀다.
쇄애액!
경쾌한 소리와 더불어 동전이 빨랫줄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주성진의 눈동자가 동전을 향해 빠르게 돌아간다.
'정확히 맞추겠는데. 가만 저 여인의 공력이 내 예상을 웃도는구나, 나처럼 영약을 먹었나…….'
퍽!
동전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노송의 목표 지점을 맞추었다.
이를 본 주성진이 손뼉을 쳤다.
짝짝짝!
"하하, 단박에 명중했소이다. 대단하오, 소저. 한데 공력도 대단한 것 같소만……."
주성진이 그리 말한 건 먼 거리를 너무나 손쉽게 맞힌 데다 동전이 튕겨나지 않고 단단한 노송에 박혔기 때문이다.
당혜미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냥 던진 거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좀 더 다를 거예요……."
휙!
성질 하나는 급하다. 그녀가 곧바로 동전을 집어 던졌다.
팍!
이번에도 처음 던진 위치로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한데 똑같으면서도 달랐다.
이전에 던진 동전이 노송에 조금 박혀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굵은 노송을 절반이나 뚫고 들어간 것이다.
"호호, 보셨죠? 같은 힘으로 던졌지만, 결과는 달라요. 참고로 알려드리자면 암기술은 속도와 정확성도 중요하지만, 손목을 이용해 회전을 주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야 지금처럼 같은 힘으로도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
당혜미는 집중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이번엔 꽤 놀랄걸…….'
그녀는 차분하게 동전의 둥근 모서리를 매만지다가 어느 순간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위이잉!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위맹하다.
동전은 이전과 다른 속도로 날아가 순식간에 노송에 박혀 들어갔다.
한데 그러고도 멈추지 않았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
주성진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보고도 눈을 의심할 만한 장면이었다.
그녀가 던진 동전이 두꺼운 노송을 완전히 관통해버린 것이다.
보통의 표창이라면 이해가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전은 표면이 둥글고 쇠보다 단단하지 않았다.
'음, 암기에 기를 담을 줄 안다는 말인데, 내가 그녀의 무공을 과소평가한 것 같은데.'
주성진은 자신의 관점에서 그녀의 무위를 한 단계 위로 더 끌어올렸다.
사실 검으로 치면 검기를 발출한 것과 같은 상승무공의 초입을 그녀가 보여준 거였다.
당혜미가 자신의 암기술에 대해 만족해하며 천천히 몸을 틀었다.
"호호, 어때요? 괜찮았죠?"
"대단하오. 그대의 암기술은 일품이었소. 내 생각에 손목을 다루는 기술은 숙련이 많이 필요할 듯 보이오이다. 아아, 오해하지 마시오. 내 말은 그대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대만큼 손목을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는 말이었소, 하하."
"호호, 그런가요, 그럼 기를 다루는 기술은 어때요?"
"아, 그것도 일품이었소. 뭐 내가 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전 이번 성공이 대단히 기뻐요. 무엇보다도 부동심을 유지할 수 있어서 말이죠. 내색은 안 했지만, 처음에 많이 떨렸었거든요. 혼자 연습할 때나 아버지가 봐주실 때는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제삼자가 있는 상황에서의 시현은 처음인지라……."
"하하, 그 점은 내가 마쳐 생각하지 못했소이다."
그녀는 의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기뻤다.
더욱이 주성진과 진지하게 말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주성진과의 인연의 시작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옷깃을 스쳐 지나간 사이가 아닌…….
'뭐 어때, 친한 사이로 쭉 지내면 되지. 불꽃처럼 사랑해 결혼한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주 싸우잖아, 내가 보면 아무 일 아닌 것 가지고도 서로 티격태격이지. 어떨 땐 왜 결혼해서 사는지 모르겠다니까.'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한 그녀가 주성진을 바라보며 생긋 웃는다.
"자. 한 수 보여주세요."
주성진은 잠시 생각했다.
'적엽비화를 펼칠까?'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뭐, 특별한 게 없잖아, 동전 대신에 나뭇잎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단지 그걸 하려면 강한 공력이 필요한 것일 뿐, 기교면에선 나보다 오히려 그녀가 한 수 위라고.'
주성진은 암기술 대신 다른 걸 선택했다.
'그래, 비검술을 펼치자, 거리가 좀 멀긴 한데 이번에 공력이 좀 늘어났으니 될 것 같기는 해.'
"자, 잘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