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백지가 된 청월무녀도
"헛!"
'이게 뭐야…….'
주성진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콧속 주변에 청아한 향기가 감도는가 싶더니 동시에 구린 냄새가 이어진 것이다.
'허허, 이거 향수와 오물을 동시에 뒤집어쓴 기분이군.'
주성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자신의 갈비뼈를 만졌다,
'통증이 전혀 없어, 그렇다면 요상 대법이 성공했다는 건데, 이 뒤죽박죽된 냄새는 도대체 뭘까…….'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걸 자각하지 못한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던 순간 품속의 청월미녀도에 생각이 미쳤다.
'아, 청월무녀도! 빨리도 생각났구나, 쯧쯧. 어떡하지 물에 빠졌는데…….'
그간 정신이 없어 청월무녀도를 살피지 못했다. 주성진은 급히 품속의 청월무녀도를 꺼내 펼쳤다.
"앗, 안 돼!"
주성진이 놀란 건 화선지가 젖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화선지 자체는 물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윤이 반들반들 나며 반짝이고 있었다. 한데…….
'아아, 백지라니…….'
잔뜩 기대한 그림 속의 미인은 화선지 그 어디에도 사라지고 없었다.
주성진은 그간 고생이 헛고생된 것 같아 얼굴을 찌푸렸다.
'제길! 물감이 물에 풀려서 사라진 거야.'
주성진은 그렇게 생각했고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듯했다.
한데 그때였다. 갑자기 두통이 몰려들었다.
지이잉!
―아아, 내 그림! 내 그림! 네놈이 날 빨아먹었어. 무엄하게 감히 신선의 선기를 흡수하다니!
주성진은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 뒤로 넘어갈 뻔했다.
'아이코 이건 또 뭐야!'
정신을 집중했지만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가 헛것을 들은 것 아니겠지? 분명 누군가가 소리쳤다고.'
신선의 선기를 흡수했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자신이 한 일이라곤 요상 대법을 펼친 것뿐이었다. 그러다 백지상태의 그림에 눈이 돌아갔다.
'아!'
불현듯 책에서 본 글귀가 생각났다.
'초월경에 들어간 자들은 자신의 기운을 그림이나 글자 속에 남길 수가 있다고 하던데, 혹 그것인가! 확인해봐야겠다, 내 몸에 무슨 변화가 있다면 그 말이 맞을지도.'
주성진은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슬쩍 띄워 올리고는 검지와 중지로 잡았다,
'지금껏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저 거리까지 성공할 것인가…….'
주성진이 시도하려는 건 적엽비화였다. 나뭇잎으로 암기를 대신하는 수법이다.
목표를 조준한 주성진이 손목의 탄력을 이용해 힘껏 앞으로 내던졌다.
'지금껏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저 거리까지 성공할 것인가…….'
쐐애액!
나뭇잎이 예리한 파공성을 흘리며 먼 거리의 고목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 모습이 마치 예리한 암기를 방불케 했다.
퍽!
고목에 나뭇잎이 박히는 소리가 들린다. 한데 보이지가 않는다.
바로 그 순간 주성진의 미소가 크게 그려지고 있었다.
'하하, 보기 좋게 성공했구나!'
나뭇잎이 고목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이었다.
'공력이 늘어났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진기의 흐름도 빨라졌어. 생각하는 순간 나뭇잎이 날아간 걸 보면… 아마도 이는 진기의 흐름에 방해되는 불순물이 제거되고 혈도가 확장되어서 나타난 현상일 거야. 그 구릿한 냄새가 바로 불순물의 찌꺼기였고!'
하나 주성진은 아직 자신의 미세 혈도가 타통되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기조식을 해보면 곧장 알 수 있을 것인데…….
그러던 주성진이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번에 내 몸을 관조해보자고, 그간 명상은 잘 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꼭 해봐야겠어. 의식하지 말고 진기의 흐름에 나를 맡겨보자고, 그렇게 서서히 무아지경에 들어가 보는 거다.'
명상은 흔히들 참된 자아를 깨닫기 위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주성진은 몸속으로 들어온 외부의 진기를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알아보자고 한 거였다.
'내가 인지 못 한 걸 무의식은 알고 있을 것이니까.'
주성진은 환생한 몸이라 보통의 사람들과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그래서 책에서 본 기이하고 초월적인 현상은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귀신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점차 몸속의 감각이 알알이 깨어나 내부의 이질적인 존재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사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해는 이미 졌고, 이제는 별이 반짝이는 밤이 되었는데도 주성진의 감겨진 눈이 뜨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길 다음 날 새벽…….
주성진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었다. 한데 그의 눈이 몽롱하면서 아련했다.
눈앞의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전혀 딴 세상을 보는 듯하다.
돌연 주성진의 입술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말이 흘러나왔다.
"그대의 슬픈 눈동자를 볼 때마다 나의 가슴은 그대 눈처럼 변하는 것 같소, 제발 나에게 다시 한번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시오……."
그러면서 주성진은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앞에는 경국지색의 미녀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구름 같은 머리, 버들잎 같은 눈썹, 초승달 같은 눈, 앵두 같은 입술, 오뚝한 코, 잘록한 허리…….
'아, 너무 아름답다!'
화용월태의 여인이 그에게 점점 다가왔다. 한데 막 그녀가 주성진은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여보시오? 꼭두새벽에 거기서 뭐 하는 것이오? 이슬을 맞은 걸 보니 여기서 밤을 지새운 것이오?"
주성진의 눈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아쉽구나… 그래도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각인되었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셈인가, 허허.'
주성진은 그림을 배워 나중에 반드시 그녀의 모습을 재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 지금 가려는 참입니다."
사냥꾼이 계속 말을 붙인다.
"어디 심란한 일이 있었소?"
"아, 아닙니다, 그런데 사냥을 나가시는 겁니까?"
"그렇소. 꼭 잡을 놈이 있는데 매번 허탕을 쳤소이다. 이번엔 기필코 잡을 생각으로 아침 일찍 나왔소. 하여간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 추스르시오."
주성진은 웃음을 머금었다.
'하하. 오지랖이 대단한 사냥꾼일세. 내가 여인에게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아나 봐.'
"고맙습니다."
"그럼 살펴 가시오."
"사냥 성공하십시오."
주성진은 얼른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챙길 걸 챙겨 다시 관도로 나왔다.
'그럼 달려 볼까나…….'
* ? ? * ? ? *
한편, 지난밤으로 시간을 거슬러 중원 5대 상가인 사천 상단의 화려한 전각 군 중 하나에서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다.
그 순간 창문 밖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선배님, 모처럼 들려주셨는데 좋은 소식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선배라는 자가 손을 흔들었다. 그는 각진 얼굴에 몹시 강한 인상의 소유자였는데 나이는 언뜻 50대로 보이나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방일우, 그게 어찌 자네 탓인가, 당청균 그놈의 운이 거기까지였는걸……. 어쨌든 그놈을 통해서 당가를 뒤흔들고 장차 사천을 장악하려는 계획이, 음 뭐 차질이 빌어진 건 사실이야. 돌아가면 다음 계획을 새롭게 준비해야겠어."
"……."
"한데 말이야 그놈이 누구지? 나 윤상혁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당천균 그자를 포섭하느라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말이야."
"그놈은 저도 이번에 처음 들은 놈입니다. 이름은 주성진인데 구주상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상단주 행세를 하는 놈입니다. 본거지는 호남성 장사인데 알아보니 형산파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는 주성진에 대해 파악한 정보를 상세히 말해주었다.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윤상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놈이 왜 하필 사천성에 온 것이야?"
"그게, 유가장과 대규모 비단 계약을 체결한 모양입니다. 제가 알기론 휘주상단이 유가장과 거래를 맺으려고 애를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엉뚱하게 그자가 나타나 거래를 가로챈 것 같습니다."
"이봐 후배! 자네 배가 불렀나! 휘주상단이고 나발이고 사천의 상권은 모두 자네가 차지해야지, 어떻게 된 거야?"
윤상혁이 힐난하듯 언성을 높이자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방일우가 찔끔하며 고개를 숙인다.
한데 그의 나이가 방일우보다는 더 들어 보였다. 거의 환갑을 바라볼 정도로…….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좀 살뜰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비단사업을 제 아들 녀석에게 전적으로 맡겨놓은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변명 같지만 제가 그 시간에 땅을 좀 보러 다녔습니다. 새롭게 들어설 사도련의 부지를 알아보려고요."
"이봐. 내가 자네를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왔는데 자네를 모를까. 분명 자네가 잇속을 챙기려 부지 주변의 땅을 몽땅 매입하려고 시간을 보냈을 게 분명해, 안 그런가?"
"뭐, 그거야……."
그가 얼버무린다.
"뭐 자네가 사도련의 부련주였던 날 위해 애를 쓰는 건 인정하지, 그건 그렇고 청성, 아미를 괴롭히는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청성, 아미는 당문과 더불어 대표적인 정파 세력이었다. 사천에서.
"네, 그들에게 물자를 납품하는 자들을 어르고 달래고 있습니다. 청성, 아미에 오랫동안 식자재와 부자재를 공급하던 자들까지도 하나둘 저희에게 넘어오고 있습니다. 뭐 장사꾼이 의리와 상도덕이 뭐 필요하겠습니까. 돈 버는 게 최고지요. 하하."
"좋아. 그들이 쫄쫄 굶고 피폐해져야 우리에게 좋은 것이니깐, 계속 밀어붙이라고. 사실 그 연놈들은 너무 고고한 척해서 문제야, 소림처럼 속가제자들이 튼튼해야 그들을 뒷받침해주는 건데. 안 그런가?"
그의 말은 정계나 상단을 위시하여 주변의 군소세력들을 속가로 묶어두면 소림의 예처럼 잘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한데 한 가지 걱정스러운 건 눈에 보이지 않게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천 상단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이봐! 사천 상단의 뿌리가 사파라는 건 아직은 알려지면 안 돼. 내 이 말은 차마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해야겠어."
사천 상가의 상단주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거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설마하니 내 목숨을 위협하는 건 아니겠지.'
"난 자네의 자식들이 자네와 비교하면 한참 능력이 못 비친다고 봐. 자네야 어릴 적 산전수전 다 겪으며 고생한 건 알지만, 자네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잖아. 배속에 기름이 잔뜩 끼였어. 거만하고 교만해졌을 게 분명해."
"……."
"말 안 듣는 자들을 무력을 동원해 위협하고 못살게 굴었을 거야. 그러니 민심을 잃고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는 것이라고. 자네와 자네의 자식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은 최소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지 그런데 사용하라고 한 건 아니라고. 상인이 상인답게 처신해야지 걸핏하면 무력을 동원하니 사파라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니겠나."
"아, 네……. 제가 자식들에게 권한을 위임한 것을 거두고 다시 제가 전면에 나서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반 은퇴한 저의 부하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제 나이가 먹을 대로 먹었습니다. 요즈음 팔다리도 쑤시고 아침에 일어나면 거동하기도 힘듭니다."
방일우의 말에 윤상혁이 피식 웃는다.
"허허. 젊음을 돌려 달라는 것인가? 자네 허구한 날 좋은 것만 먹을 텐데, 왜 죽는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