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화 뼈아픈 패배
심양수는 주성진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저놈은 정녕 내버려 둘 수 없는 놈이다. 지금도 저러할진대 앞으로 십 년이 흐르면 누가 저 괴물 같은 놈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공력이 깡패야, 거의 나와 필적한다고!'
그는 사실 은거를 깨고 나오면서 나름의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은거하는 동안 자신의 무공을 갈고 닦은 것은 물론이고 반로환동은 아니더라도 절반의 환골탈태에 성공한 거였다.
그에게 환골탈태란 무공의 상승보다는 죽음의 사신을 쫓아버렸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었다.
향후 50년간은 노화로 죽지 않는다고 확신한 그는 동창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또다시 무림을 휘저으려, 무림에 등장할 생각이었다.
다시 냉정함을 되찾은 그가 주성진을 노려보았다.
'단시일에 공력이 상승했다고 해도 따라올 수 없는 게 있지, 그건 바로 경험이야. 난 놈을 흔들어 그 약점을 노린다.'
100살에 달하는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살기의 색채가 점점 짙어져 간다.
그는 주성진이 보란 듯이 커다란 손을 말아 쥐더니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네놈을 부숴버리겠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큰 키만큼이나 긴 팔이 쾌속하게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곧장 무시무시한 권강이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급속히 주성진에게 다가왔다.
날카로운 대기의 울부짖음이 권강의 무서움을 대변하고도 남았다.
쐐애액!
그가 내뻗은 권강은 단순히 주성진의 특정한 부위를 노리는 게 아니었다. 그냥 주성진 앞의 공간은 그가 모두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성진은 큰 위험을 느꼈다.
'음, 전면 공간이 모두 그의 세력권이다. 저걸 막으려면 검막을 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주성진은 곧장 검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검막을 펼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손목이 빠르게 돌아가는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파라라락!
하나 이를 본 심양수가 비웃음을 흘렸다.
'쯧쯧, 검막이 덜 영글었구나. 하기야 저 나이에 초고수에 오른 자이니 언제 방어라는 것을 제대로 해보았을까……. 이럴 땐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걸 해야 하는 건데, 역시 내 예상대로 경험 부족이야.'
주성진은 물샐틈없이 방어한다고 했지만, 그의 눈에는 허점이 훤히 보였다.
허점이 보이는 곳에 자신의 회전 권강이 들이닥치면 그것을 기회로 상대의 검막은 와르르 붕괴할 것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를 모르는 주성진은 곧 있을 폭음에 대비해 고막을 보호하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주성진의 동공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위이잉!
"앗!"
극히 짧은 순간 눈앞의 대기가 심하게 요동을 치는 걸 느꼈다.
'뭔가 잘못됐다. 내가 생각한 권강이 아니야, 안 되겠다. 역용에 쓰인 공력까지 모두 동원해야겠어.'
주성진은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역용이 스르륵 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조금 늦고 말았다.
순식간에 그의 신형이 폭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날아가고 주성진은 뒤늦게 귀청을 때리는 폭음을 인지했다.
꽝!
"아아악!"
상대의 송곳 같은 회전 권강이 그가 펼친 검막의 허점을 뚫고 오른쪽 가슴팍을 강타한 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심양수가 생각한 것처럼 온몸 전체를 직격당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실 끊긴 연처럼 한없이 날아가는 주성진의 신형이 무려 10여 장에 달하는 거리까지 튕겨 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빙글빙글 돈 채로…….
주성진은 심한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뼛속 같이 치미는 아픔을 더 감당하기 힘들었다.
갈비뼈가 몇 개는 금이 간 것 같았다.
'그나마 호신강기가 발동하지 않았다면…….'
주성진은 위기에 봉착한 순간 자연스럽게 호신강기기 발현하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호신강기가 전지전능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최소한 죽지 않을 정도의 방어막 정도이지…….
주성진은 어떡하던 자신의 신형을 수습하려 노력했다. 공중에서 방향을 돌려야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길, 완벽한 패배인가… 공력은 내가 우위인 것 같았는데, 역시 경험 부족을 실감하는구나.'
심양수는 만면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까짓 게…….
심양수는 주성진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생각했다.
'흐흐, 녀석이 지면에 나동그라지는 순간 즉사다. 내장이 파열되고 뼈마디가 모두 부서졌는데 죽지 않은 게 이상한 거지.'
만일 주성진이 그의 성명 절기를 제대로 알았다면 미리 대비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용권풍은 이름 그대로 권강을 회오리치듯 말아 올려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드는 권법이었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항상 권강의 전면에는 송곳 같은 날카로운 이빨을 앞세우고 있다는 거였다.
그 순간 주성진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되었다.'
쉬익!
가까스로 방향전환에 성공한 그가 그대로 능선 아래로 몸을 날렸다. 곧장 떨어진다면 흐르는 강물에 떨어질 운명이었다.
'사는 길은 이것뿐이야, 어쩔 수 없어! 목숨을 부지해야 복수든 뭐든,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고.'
그러자 그 순간 승리를 확신하던 심양수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앗! 저 녀석이!'
자신의 일격을 맞고도 도망치고 있는 주성진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내 공격이 완벽하지 않았나?'
그는 도리질 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저 녀석이 속에 갑옷이나 보의를 입은 게 분명해.'
구름같이 몰려오는 의혹을 애써 날려버린 그가 신형을 띄웠다.
하지만 그가 공중에 높이 치솟았을 때는 이미 주성진은 점으로 화해 거의 강으로 추락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길, 하필이면 강물에 뛰어들게 뭐람.'
그는 천성적으로 물을 싫어했다.
강에 뛰어들 엄두를 못 낸 그가 오만상을 찡그렸다.
'동창 애들이 앵앵 짖어대겠구먼, 이거야 원! 체면 더럽게 구기게 생겼네.'
풍덩!
난데없이 강 위에 커다란 물보라 생겼다.
급류에 추락한 주성진은 강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푸합!"
'어어, 떠내려가잖아.'
전생에 수영을 배우긴 했지만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오른손으로는 검을 굳게 쥐고 있어 여러모로 수영하기엔 불편하다.
'음, 도약이다, 그것밖엔 없어.'
주성진은 거친 물살을 헤쳐 나가며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오르는 송어를 본 적이 있었다.
몇 번이나 실패하고 피부가 찢겨 상처를 입어도 기어이 오르고야 마는 모습에 몹시 절로 머리가 숙여졌었다.
'그래, 물고기도 하는데 내가 못 할 소냐.'
주성진이 절박하게 머리에 떠올린 건 금리도천파였다.
금빛 잉어가 엄청난 파도를 뛰어넘는 것을 보고 착안한 경신법이었다.
핵심은 몸을 완전히 뒤틀어 그 탄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위로 도약하는 거였다.
언뜻 간단해 보였지만 강한 내공력과 유연한 몸놀림이 바쳐주지 않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주성진은 단단히 마음먹고 남은 공력을 죄다 끌어모았다.
'강한 도약력이다, 물을 박차고 나가려면… 제발 갈비뼈야 버텨다오.'
만일 실패하면 급류에 휩쓸려 정처 없이 떠내려갈 것이고, 최악의 경우 익사할 수도 있었다.
"야앗!"
우렁찬 기합을 내지른 주성진이 수면을 박차고 떠올랐다. 갈비뼈가 심하게 욱신거렸지만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일단 성공이다! 자 다음은 무력답수!'
무력답수는 물 위를 걷는 경신법으로 몸을 가볍게 함과 동시에 발놀림이 무척 빨라야 했다.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정 이상의 고수라야 겨우 시도할 수 있는 경신법으로, 주성진은 틈틈이 이 기술을 연마해왔다.
물 위에서 연습하는 건 한계가 있으므로 가는 줄을 매달아 놓고 그 위를 걸어가는 것으로 연습을 대신했다.
그리고 무렵답수의 발전적 형태가 물 위를 스치듯 달리는 등평도수였다.
조심스럽게 공중에서 강물 위에 안착한 주성진은 빠르게 발을 움직여 강 위를 걸어 나갔다.
위태위태해 보였지만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마치 그 모습이 물 위를 떠다니는 소금쟁이 같아 보였다.
'다행이다. 내가 물을 두려워한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야, 모름지기 마음의 안정이 제일 중요하거든.'
그가 방향 잡은 곳은 육선문의 문도들을 처음 만난 곳이었다.
잠시 후 강변 가에 도착한 주성진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욱선문의 포쾌들은 모두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모두 갔구나.'
요행으로 강을 빠져나왔지만, 아직 완전히 위기가 끝났다고 볼 수는 없었다.
주성진은 전속력으로 객잔을 향해 치달았다. 하지만 갈수록 갈비뼈가 뻐근해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 되겠다. 대충 이쯤이면 안정권일 것 같으니 어디 가서 요상 대법을 펼쳐야겠구나.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요상 대법으로 치료가 될 거야. 아 그렇군. 간이 침술법도 배웠으니 여차하면 병행해서 써 봐야 하겠구나…….'
요상 대법은 운기조식과 비슷하나 공력증진보다는 상처 치료에 주안점을 둔 진기도인법이다.
주성진은 주변을 둘러보다 눈을 반짝였다.
'저기가 안성맞춤이군.'
그곳은 잘 눈에 띄지 않는 숲속 공터였다.
얼마 후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 잡은 주성진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과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주성진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곧이어 단전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나와 몸속 혈도를 휘휘 돌며 아픈 부위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주성진은 요상 대법에 열중했다.
시간이 갈수록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서 부처님의 염화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바로 그의 품속 청월무녀도에서 청아한 향기가 꽃처럼 피어난 것이었다.
청아한 향기는 주성진의 주변을 맴돌더니 곧장 주성진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주성진의 입이 들썩인다.
'음음, 향기가 너무 좋아…….
말하는 투가 잠꼬대를 빼다 박았다. 운공삼매경 속 나를 잊어버리는 단계에 돌입한 주성진은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러갔다.
화아악!
돌연 모공을 통해 우윳빛 기운이 몸 밖으로 흘러나오더니 곧장 그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기 시작했다.
기운은 계속 흘러나왔고 점차 그의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졌다.
톡톡…….
연이어 몸을 감싼 기운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이에 호응하듯 그의 내부에서 폭발적으로 기운들이 일어나 사지 백배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고요하던 주성진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요동을 쳤고, 내부에선 엄청난 기파의 회오리가 주성진의 혈도란 혈도를 모두 휘젓고 다녔다.
주성진이 가보지 않았던 미개척의 혈도까지 구석구석 돌고 돌았다.
일주천, 이주천, 삼주천…….
투투륵, 투투륵!
막혀 있던 전신 요혈과 세맥이 뚫려 나간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성진의 몸을 두들기든 기운들이 모조리 모공을 통해 흡수된 순간 주성진이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그의 동공에서 칠채 서광이 뿜어져 나왔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