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화 청월무녀도의 등장 (3)
괴인이 화를 벌컥 내려 할 때 문사 차림의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한조 선배! 지금은 자제하세요. 저자가 청월무녀도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곧 동창에서 몰려올 것이니 그땐 우리가 뭉쳐도 대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특히 한조 선배는 동창의 무인 스무 명을 죽였기에 그들이 반드시 보복하려 들 겁니다."
괴인 한조는 움찔했다.
'음, 그건 저놈 말이 맞긴 하지, 한데 저놈들은 어떻게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걸까. 설마 하오문에서 쫓겨난 망할 종자가 다 말한 것인가…….'
그는 하오문의 장로로 있다가 반역을 꾀하다 쫓겨난 염천익을 떠올리며 그가 자신에게 말한 내용을 하나하나 음미했다.
'그놈이 나에게 접근해 암상에서 황궁에 청월무녀도를 팔 것이라고 알렸었지. 하오문에서 나온 정통한 소식이라 전하면서… 그러면서 정보료를 준다면 파는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다고 했고 난 거액의 정보료를 지급했어. 한데 내가 동창의 무인을 죽이고 청월무녀도를 탈취하는 순간 갑자기 쥐새끼가 나타나 청월무녀도를 탈취해갔지…….'
잘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일목요연해졌다.
'하오문 종자 놈이 내게만 정보를 판 것이 아니었어. 가만 그놈도 청월무녀도에 관심 있는 거 아냐? 우리가 서로 상잔하는 틈을 타 어부지리를 노리려고… 만일 그렇다면 염천익은 정보료는 정보료대로 챙기고 궁극적으로 청월무녀도 손에 넣으려고 일을 꾸민 것이겠구나. 하긴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 나 같아도 쉽게 포기하기 힘들었겠지. 본인의 무공이 약하니 그런 술수를 부린 것이고.'
괴인 한조는 청월무녀도 안에 측천무후가 감춘 보물 지도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부연하자면 보물 지도 안에는 재화뿐만 아니라 무림인들이 혹할 만한 무공비급들과 영약이 들어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한조는 급히 자신에게 몰려온 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분명 염천익 그놈이 어디엔가 있을 텐데, 맞아 그놈이 변장의 명수라고 했으니 모습을 감추고 있을 수도.'
한편 주성진은 주성진대로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음, 저들은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제법 한 가닥 하는 놈들 같은데, 어쩐다……. 저들이 떼로 공격한다면 무조건 필패야. 게다가 동창까지 몰려온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첩첩산중이었다.
'청월무녀도를 포기할까…….'
주성진은 순간 나약한 생각이 들었지만 강하게 그런 생각을 부인했다.
'안 돼, 갈 때까진 가보는 거다. 우선은 저들이 뭉치지 못하도록 분열책을 쓰자고! 그러면서 도망칠 기회를 엿봐야겠어.'
한데 그때였다.
뚜벅뚜벅…….
거구의 사내가 돌연 능선 위에 나타났다. 주성진이 그와 나란히 선다면 그의 어깨에 간신히 닿을 정도였다.
'흐흐흐…….'
그가 나타나자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주성진은 그와 정면으로 보고 있는 터라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고개를 돌린 자들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목도했다.
'으음, 새로운 강자의 출현인가…….'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몰려 있던 자들이 슬금슬금 길을 터주며 옆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주성진을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펼치던 괴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것들이 날 보고도 인사를 안 하는 거냐?"
그러자 재빨리 문사 차림의 사내가 나섰다. 그는 자신의 사부에게 들은 한 인물을 떠올린 것이다.
'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이겠군, 저 노물, 근 20년 동안 행방이 묘연해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 얼굴이 사부가 알려준 모습보다 젊어 보여.'
"혹, 강호제일권 심양수 선배님이십니까?"
그러자 그가 강한 눈빛을 풀고 징글맞게 웃었다.
"크흐흐흐, 해 입은 꼬락서니를 보니 천뇌 강유천의 제자더냐? 그놈이 내 눈빛을 피하지 않았지……."
"반갑습니다, 심양수 선배님. 저는 윤상일이라고 하고요, 천뇌 그분은 저의 태사부이십니다."
"그래? 손자뻘인 네가 설쳐 대는 걸 보니, 천뇌 그자는 흙 속에 묻힌 게로군, 근대 아이야. 너도 흙 속에 묻히고 싶은 게냐?"
그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단지 고금제일미인이라는 염상아의 얼굴이 보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쯧쯧, 별 시답지 않은 호기심으로 명을 재촉하지 말아라.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죽이지는 않겠다."
"아, 네. 그럼 이만 인사 올립니다."
중년 문사는 총총히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상일이 떠나자 그가 좌중을 보며 호통을 내질렀다.
"안 가! 모두 죽고 싶어!"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주성진도 그들에 묻혀 자리를 뜨려 했다.
"꼬마야, 넌 가면 안 되지……."
주성진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의 살인 안광에 눈이 따끔거렸으나, 그렇다고 얼굴을 찡그릴 정도는 아니었다.
"헤헤, 방금 가라고 하시기에……."
심양수는 주성진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놈이 나의 살인 안광을 받아냈단 말이지…….'
"좋아, 내가 백번 양보해서 그림만 건네준다면 그냥 보내주겠다."
주성진은 그가 여기에 오기 전에 이미 자신과 괴인이 나는 대화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대결을 지켜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어르신도 그림에 관심이 있는 겁니까?"
"그깟 그림이 뭐 대수라고, 난 동창 태감이 부탁해서 나선 것이다. 예전에 그에게 신세를 졌거든."
주성진은 그가 솔직히 말하자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창이 뒤에 있다는 게 몹시 꺼림칙했다.
'만일 내가 청월무녀도를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나면 내 신상에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다행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얼굴을 바꿨으니 날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야.'
"자, 그럼 순순히 내놓아라."
그가 손을 내밀자 주성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고분고분 자신의 말을 들을 줄 알았던 그가 분노하기 시작했다.
'저놈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구나, 감히 나를 앞에다 두고 겁을 상실하다니.'
그의 오만한 성격은 여전했다. 수십 년 전부터 강호 제일 권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그럴 만도 해 보였다,
'내가 한마디만 하면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건만, 세월이 흘렀나……. 하여튼 네놈은 지금 이 시점부터 지옥의 명부에 등재되었다. 강호 재출두 기념으로 가능한 피를 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는 자신의 말을 거역하거나 조금이라도 반한 행동을 보인다면 결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놈! 내 별호가 왜 저승사자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각오해라 애송아!'
순간 주성진은 느꼈다,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살기를…….
'휴, 일 났군, 어떡하던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제 남은 건 그를 상대로 최선을 다해 기회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심양수의 거구가 하늘로 치솟았다. 금세 그의 그림자가 주성진을 덮쳐 왔다.
"카아아앗!"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에 주성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단은 피하고!'
거구에 어울리지 않은 극쾌의 신법이 펼쳐짐과 동시에 그가 주먹을 내뻗는다.
위이잉!
주먹에서 대포알 같은 권강이 솟구쳐 나오자 주시하던 주성진이 급히 옆으로 피했다.
꽈아앙!
지축을 울리는 가공할 일 권은 주성진의 어깨를 스쳐 지나가 곧바로 땅을 내리쳤다.
심양수의 일권은 패도 그 자체였다.
대지를 강타한 충격의 여파는 끝을 모르고 달려 주변에 지진이라도 발생한 듯했다.
푹 패인 지면의 직경은 거의 1장을 웃돌았고 깊이 또한 어린아이 키 높이만 했다.
이형환위로 그의 권경을 가까스로 피한 주성진의 안색이 샛노래졌다.
'이건 도대체가…….'
가슴이 서늘해진 주성진은 그의 무지막지한 주먹에 깜짝 놀랐다. 더구나 그의 성격이 그토록 직선적인지 몰랐다.
'한번 결정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끝장을 보는구나, 난 그래도 시작은 가볍게 출발할 줄 알았는데.'
주성진은 자신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뼈도 못 추리겠다는 걸 절절히 깨달았다.
"크크, 놈! 제법 빠른 발을 가졌구나."
먼지가 가라앉자 지상에 우뚝 선 그가 보였다.
"시신의 형체라도 남겨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구나, 아예 콩가루를 만들어 주지."
"흥, 길고 짧은 건 재봐야 하오,"
"뭣이, 이놈이!"
주성진은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오늘 최대의 강적을 맞이했지만, 그는 이미 수차례의 위기를 경험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마음을 굳게 먹으니 주성진의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호흡은 점점 차분해졌고, 흔들리던 마음도 안정을 찾았다.
심양수는 주성진의 변화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흐흐. 아이야, 기개는 제법이다만, 그게 과연 언제까지 갈지…….'
쉬이익!
주성진이 대가의 흐름을 느낀 순간, 그의 신형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땅을 박차는 모습도, 신형을 날리기 위한 예비 동작도 없었다. 유령처럼 스르륵 움직인 것이다.
'저건 초상비다, 그럼 나도…….'
초상비는 풀잎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경신법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주성진은 그 자리에서 뒤로 물러났다. 먼지 한 톨 일어남 없이 뒤로 쑥 미끄러져 간다.
그러자 심양수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한쪽은 거리를 좁히려고 하고 한쪽은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하나 산등성이의 평탄하지 않은 지형이 주성진의 발목을 잡았다,
뒤로 물러나다 삐쭉 삐져나온 돌부리에 챈 주성진이 잠시 지체하는 사이 그가 급속히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공격해 왔다.
'저건 조공(爪功)이구나.'
몸을 움직여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쇄애액!
그의 손가락에서 날카로운 경기가 뻗어오자 주성진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꽈아앙!
심양수의 손가락과 부닥친 검이 부르르 떨려왔다.
"으음……."
주성진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그 순간 뒤로 물러난 상대도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놈! 제법 좋은 검을 지니고 있었구나."
"억울하면 당신도 검을 쓰던가……."
주성진이 약을 올렸다.
원래는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자꾸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반발심이 솟구쳐 나왔다.
그건 아마도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여기는 자들에 대한 원초적인 미움일 것이다.
"뭐라 이놈이!"
심양수가 다시 주먹을 말아 쥐는 순간 이번에는 주성진이 먼저 반격했다.
검기가 형상을 갖춤과 동시에 검을 앞으로 쭉 밀어낸 것이다.
강력한 빛을 발하는 강기가 공간을 가르고 있었다.
"흥!"
심양수는 나직이 코웃음을 치며 길고 커다란 주먹을 휘둘렸다. 어느새 그의 주먹엔 짙은 묵광이 발하고 있었다.
꽝!
강기와 강기의 충돌이 거대한 폭음을 만들어냈다.
주성진이 발출한 검강이 반동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주성진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심양수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 있음을…….
그건 바로 자신의 검강에 실린 위력 때문이었다.
'저놈이…….'
놀랄 만한 무공을 익히고, 온갖 영약을 복용했다고 해도 나이를 초월할 수 없는 내력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혹 저놈이 반로환동의 고수?'
그는 곧바로 본인의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니야, 저놈의 공력이 기이할 정도로 높다고 하지만 반로환동의 고수는 아니야. 그가 반로환동의 고수였다면 이렇게 나와 드잡이질을 하고 있지 않았겠지, 싸우기 싫다면 이미 벌써 새처럼 날아 사라졌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날 초반에 격파했겠지. 아 말투도 노인의 그것에서 크게 바뀌진 않았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