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화 청월무녀도의 등장 (2)
상대의 장력이 주성진의 검격에 막히자, 주성진은 그 여세를 몰아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순간의 움직임이 섬전 같았다. 상대의 무공도 대단했으나 주성진의 무공도 공력의 상승과 더불어 확실히 상승 영역에 접어들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주성진의 우위를 되돌리기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땅을 스치듯 뒤로 미끄러진 그는 일단 거리를 확보하는 데 만족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장풍으로 주성진의 전진을 주춤거리게 하였으니 충분히 시간은 번 셈이었다.
그가 강력한 내력을 끌어올리자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새끼! 가만두지 않겠다.'
그의 강렬한 눈빛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가 검을 휘두르며 주성진을 향해 돌진했다.
꽝, 꽝, 꽝…….
주성진은 물러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대결을 종결시킬 때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점점 사람의 인적이 크게 들려 온 까닭이었다.
'간다! 물러서지 않는다, 과연 이것마저도 정면으로 받을 수 있을까.'
힘껏 상대를 내려치려는 주성진의 검에는 일격 필살의 무시무시한 내력이 깃들어 있었다.
"야아합!"
낭랑하게 터지는 일갈 속에 주성진의 일검이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 나갔다. 둘의 충돌은 필연…….
꽈아앙!
두 자루의 검이 무섭게 충돌했다. 그 누구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들이 서로 상대를 노려보며 승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폭음의 여파로 주변의 먼지가 치솟고, 충돌의 여파가 지축을 흔들었다,
한동안 둘은 계속 검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이이이……."
"이이이……."
돌연 상대의 보검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크으윽……."
처음으로 고통 어린 신음을 발한 상대는 돌연 자신의 보검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쨍그렁…….
주성진은 쏠린 힘을 바로 잡느라고 일순 당황했다. 그 순간 그가 비틀비틀 물러나기 시작했다.
'저자가 무기를 버리다니…….'
달리 생각하니 그의 임기응변이 돋보이는 한 수 같았다. 그대로 계속되었다면 그의 패배가 자명했으니까.
'얄팍한 수지만, 저자의 수법들은 위기 때는 쓸 만하겠어. 아까 검을 구부려 튕기는 것도 그렇고, 기습적으로 장풍을 날리는 것도 그렇고.'
휙!
'어어어…….'
주성진의 눈이 돌연 하늘로 향했다.
그가 등에 메고 있던 대나무 통을 멀리 집어 던진 것이다. 그 방향이 공교롭게도 추격자들이 달려오고 있는 방향이었다,
주성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 사이 그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청월무녀도를 빼앗겼다!"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그의 입에서 한 움큼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그는 주성진과의 충돌로 이미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주성진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공중으로 신형을 띄웠다. 본능적으로 청월무녀도를 낚아채기 위해서였다,
'제길! 멀리도 던졌네…….'
단번에 낚아채기도 불가능한 거리다.
주성진은 공중에서 몸을 웅크려 힘껏 재도약을 시도했다.
휘리릭!
주성진이 커다란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빠르게 날아가고 있는 사이, 이를 바라보던 상대는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흥, 내가 어떻게 획득한 건데 포기할 성싶으냐. 제발 딴 놈들과 싸워서 양패구상이나 해라.'
그는 여하튼 기회를 틈타 청월무녀도를 되찾을 생각이었다.
'휴, 조금만 빨리 도망쳤어도, 일단 낙산대불 속의 동굴로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도 날 찾을 수 없었을 텐데.'
낙산대불 안쪽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로처럼 얽힌 동굴이 있었다. 그가 일전에 낙산대불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평생에 걸쳐 귀중한 골동품들을 모아왔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탐내는 물건들, 탐욕에 눈이 먼 자들 사이에서 나는 승자였고, 이번에도 반드시 내가 승자가 될 것이다.'
그가 손이 으스러질 듯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눈에 여전히 불타오르는 건 욕망의 찌꺼기였다.
한편 주성진은 숲으로 날아가는 대나무 통을 가까스로 잡아챘다.
'휴, 일단 됐고, 그나저나 서두르자!'
땅에 착지한 주성진은 급히 대나무 통을 열고 둘둘 말린 그림을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것으로 완벽하다고 볼 순 없으나 일단 본인 생각으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대나무 통은 제법 굵어 손에 쥐기도 뭐 했고, 등에 매달려면 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수중엔 그런 게 없었다.
'어서 여길 떠나자!'
쉬이익…….
순간 강한 기파가 느껴져, 주성진의 발길을 붙잡는다.
주성진의 시야 한쪽으로 강력한 기도를 뿜어내는 한 남자가 비쳐들었다.
흉악한 인상, 허름한 마의를 걸친 봉두난발의 괴인이었다.
"이봐 어딜 가지?"
"낙산대불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외다, 한데 왜 그러시오?"
주성진은 태연히 당당하게 되물었다. 검을 차고 있어 일반인처럼 겁에 질린 모습으로 연극을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어린 것이 요망하구나, 내가 귀머거리인 줄 아느냐! 좁쌀 같은 도둑놈이 외치는 소리를 내가 듣지 못한 것 같으냐?"
주성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좁쌀 같은 노인?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나는 본적이 없소이다."
한데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휘이잉…….
"이것이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럼, 저기 수풀 속에 떨어진 대나무 통은 뭐더냐?"
주성진은 곁눈질했다.
'이런 급히 수풀 속에 감추어 놓았는데, 망할 바람이…….'
"어, 저기에 대나무 통이 있었네, 원하면 가지시오. 그럼 난 이만……."
"꼼짝하지 말고 거기 서 있어!"
그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대나무 통을 끌어당겼다. 놀라운 허공섭물의 신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어어…….'
주성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내가 생각한 이상의 고수다, 저 거리에서 허공섭물을 펼치더니.'
생각을 짧고 동작은 빨랐다. 주성진은 그 즉시 신형을 띄웠다,
쉬이익!
취리리릭!
바로 그 순간 괴인의 팔에서부터 녹색의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일장에 이르는 길이의 채찍이었다.
게다가 보기 드문 기병으로부터 무서운 내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헉!'
채찍이 살아 있는 듯 움직이며 빠르게 날아오자 주성진은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퍼억! 퍼버벅!
녹색의 빛줄기가 닥쳐오자 주성진은 급히 검으로 채찍을 쳐냈다.
주성진은 자신의 검에 잘려나가지 않은 채찍을 보며 살아 있는 뱀을 떠올렸다.
탄력이 좋아 쉽게 휘어져서 검에 부닥쳐도 전혀 손상이 없다.
'음, 그게 다가 아니야.'
좀 전에 채찍에서 무시무시한 경기가 일어남을 목격했기에 주성진은 괴인이 능수능란하게 채찍을 조절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상대의 허점을 노리면서…….
잠깐 사이에 채찍을 회수한 괴인이 또다시 채찍을 휘두른다.
싸아악…….
주성진이 검으로 막으려 하자, 이번에는 채찍이 주성진의 검을 휘감으려 들었다.
채찍이 자신의 검을 감싸려 하자 급히 검을 회수한 주성진은 뒤로 널찍이 물러나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자가 좀 전 내가 움직이려는 걸 어찌 알고 공격해 왔을까. 분명 그때 대나무 통을 끌어당기고 있었는데, 다년간 경험에서 우러난 행동인가 그것도…….'
그 순간 그가 주성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청월무녀도를 어찌했어?"
"어찌하다니? 난 모르는 일이오, 그건 그렇고 대낮에 무고한 사람을 공격하다니, 당신 미쳤소?"
"날 우롱하는 걸 그만둬라. 난 대나무 통을 끌어당길 때 빈 통임을 직감했다. 생각보다 가벼웠거든……."
주성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아하, 그거였군, 그러고 보니 자신의 품속에 있는 청월무녀도가 좀 묵직하긴 했다. 이유는 잘 모른다.'
그래도 괴인이 그걸 단박에 알아챈 것이 좀 수상쩍었다.
'저자가 그림이 든 대나무 통을 만져 본 적이 있는 모양인데.'
하여튼 지금은 여기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많은 이들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주성진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예비 동작 없이 신형을 띄웠다. 능선이라 딱히 갈 곳은 양옆 쪽 아래로 울창하게 뻗은 숲밖에는 없었다.
낙산대불 쪽으로 가는 건 일반 사람들이 있어 피해야 했고.
'엇! 저놈이!'
주성진이 그 자리에서 위로 솟구치자 그가 눈알을 부라렸다.
'저 나이에 벌써 어기충소를, 그것도 나의 눈을 속일 정도로 은밀하게.'
급히 채찍을 위로 펼쳤지만, 거리가 짧았다.
한편, 그 순간 주성진은 내심 시간을 허비한 것을 후회했다.
'이런 괴인과 말을 주고받을 게 아니라, 보는 순간 그를 회피해야 했어. 괜한 체면 때문에.'
주성진은 꽁지를 말고 도망치는 게 싫었던 거였다. 그래도 괴인을 떨쳐버렸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던 주성진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쉐애액, 쇄애액…….
그를 향해 여러 발의 화살이 연속적으로 날아온 것이다. 빠른 속도와 무시무시한 바람을 동반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내력의 고수가 쏜 게 분명했다.
'위험하다, 육선문의 쇠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화살 몇 대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계속 화살을 쏜다면 불리한 건 자신이었다. 왜냐면 공중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강한 바람이 불규칙적으로 그에게 불어닥치고 있었다.
'제길…….'
주성진은 급히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기껏 본인이 있었던 자리에서 몇 장 떨어지지 않는 곳에 착지한 주성진은 보기 좋게 인상을 구겼다.
그 순간 괴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이 새끼! 내 청월무녀도를 어디에 두었냐니까?"
"난 모르오. 오라, 그러고 보니 좁쌀 노인한테 청월무녀도를 빼앗긴 모양이외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얽히고설킨 상처들이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흉악한 얼굴이 더욱 흉악스러웠다,
"너 이 자식! 그건 알 것 없고 어디에 두었냐고? 좋은 말할 때 내놓아라, 내 목숨은 살려둘 테니."
주성진은 그를 보며 조소했다.
"내게 없는 청월무녀도를 자꾸 왜 달라는 것이오?"
"이놈이 정녕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실 것이냐?"
그는 주성진을 당장 죽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청월무녀도의 행방을 알아야 했기에.
주성진은 그의 뒤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은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착잡하다.
'음, 어떻게 하든 여길 벗어나야 할 텐데.'
"무뢰배들이 몰려들고 있소이다."
우루루루…….
그 순간 각양각색의 무리가 주성진과 괴인이 있는 곳에 당도했다. 개중에는 주성진에게 활을 쏜 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음, 저자구나, 내게 활을 쏜 자가, 딱 봐도 강자네……."
그는 어깨에 강궁을 걸치고 있었다.
괴인은 주성진이 말한 자들이 도착하자, 신경질적으로 소릴 질렀다.
"죽고 싶은 놈들은 모두 나서라, 내가 목을 싹둑 분질러주마."
그러자 무리 중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자가 괴인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뭐라 지껄이는 거야, 청월무녀도가 내 것이냐? 네놈도 탈취했다가 쥐새끼한데 빼앗긴 거잖아."
"흥, 색동마! 두고 봐라, 네놈이 죽음의 명부에 제일 위에 올라갈 것이니까."
"해봐, 해봐 지금 당장! 하지도 못 할 것이 입만 나불대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