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청월무녀도의 등장 (1)
"음, 기초라면 토납법 같은 것이오?"
"맞소이다, 내공이 쌓이지 않는 토납법이요. 대신 본격적으로 내공을 익힐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것이지. 사실 난 당시 어려서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이 소림 속가 제자가 되기 위해 그 토납법을 익히고 있었소이다. 속가제자 내정자들에게 소림에선 미리 토납법을 익히게 하고 있었소이다. 나만 형의 사고 때문에 예외가 된 것이고."
주성진이 싱긋 웃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 뭐요, 지금까지 날 놀린 거잖소? 토납법도 익히지 못한 그대가 그 속가 제자 분의 전설을 듣고 무턱대고 따라 한 거 아니오?"
"하하, 뭐 과장되게 이야기한 측면이 있지만 분명한 건 한 가지가 있소. 내가 그 이후에도 그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오."
"금강부동신법과 연대구품을 한꺼번에 익힌다는 거 말이오?"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난 소림에서 속가 제자가 익히는 경신법과 보법을 배우면서도 항상 그 둘을 익히겠다고 마음먹었소.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소이다. 7살에 소림에 들어와 고사리손으로 흉내 냈던 게 큰 역할을 한 것이지. 그리고 지금껏 뭣 모르고 흉내 낸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어 기분이 좋소이다."
주성진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름 추측해 보았다.
'내 생각에 후대의 속가제자를 위해 남겨놓았다는 경신법은 난해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없는 게 틀림없어. 그저 그분이 장난친 거겠지, 만일 그게 대단한 경신법이었다면 소림 본산에서 가만있었겠냐고, 회수하든지 무슨 조치를 취했을 거야……. 어쨌든 역산도는 우직하게 두 가지를 병행해서 익힌 것이네.'
그 순간 그의 뇌리를 번쩍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렇군, 나도 무공을 따로따로 볼 생각을 하지 말고 종합적으로 봐야겠어. 경신법이든 공격 초식이든 수비초식이든 검법이든 장법이든……. 가령 장법을 검법에 응용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지. 또한 경신법이나 보법도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공수의 초식이 될 수 있게 해보자고. 아 그러고 보니 마교에도 비슷한 수법이 있었네, 천마군림보라는.'
한데 그 순간이었다, 주성진의 귀가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쉬이익…….
'음, 옷깃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같은데, 그렇다면 누군가가 경공을 펼치고 있다는 건가…….'
주성진은 급히 민강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돌린 주성진을 역산도가 의아하게 바라본다.
주성진은 청력을 끌어올렸다. 희미하게 뭔가 들리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공력을 최고조로 올려보자. 지금껏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지만 내 능력의 한계치가 어딘지 나도 알고 싶거든.'
"와아아, 잡아라……."
"저놈 놓치면 안 된다. 청월무녀도는 우리가 가져가야 해……."
주성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깃소리처럼 가늘게 들렸지만 청월무녀도라는 말을 분명히 들은 것 같았다.
'뭐라, 청월무녀도! 그게 왜 여기에…….'
주성진은 급히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다음에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도록 합시다. 내가 당분간은 계속 객잔에 머물 예정이니까. 아니지 그대들의 숙소로 내가 찾아가겠소."
숙소의 위치는 좀 전에 역산도가 주성진에게 알려준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똥 마련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니……."
주성진은 자신이 서두르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아, 미안하오, 그게 강 건너 능선 위에 수상한 무인 다수가 출현했소이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내가 가봐야겠소이다. 자칫 낙산대불을 보러 온 관람객들이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오."
역산도는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얼굴을 찡그렸다.
'음,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제길…….'
주성진은 그의 표정을 보며 얼른 부연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소이다, 그러면 다음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주성진은 신형을 띄웠다,
쉬이익…….
'어어…….'
"이보시오… 이보시오……. 이대로 그냥 가면 어찌하오?"
역산도가 외쳤을 땐 주성진은 이미 포물선을 그리며 민강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한 마리의 새처럼…….
꽈꽈꽈…….
언뜻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물 한가운데의 물살이 생각보다 거칠었다.
'이거 그냥 보기와 딴 판이군, 그나저나 나도 조심해야겠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잖아.'
주성진은 몸을 튕겨 더 높이 날아올랐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주성진이 드높이 하늘을 날자 육선문의 포쾌들이 경탄해 마지않았다.
"와, 저게 사람이야……."
"정말 대단한 인간이군, 연구 대상감이야……."
주성진은 강을 건너자마자 다시 신형을 띄워 산을 빠르게 올라갔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 얼굴을 역용했다. 공력을 이용해 얼굴을 변용하는 건 그간 계속 독학으로 연구해 온 바였다.
완전히 다른 형태의 얼굴로 변용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남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지에는 도달해 있었다.
그가 역용에 열을 올린 건 자칫 무림의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리어 사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 염려해서였다.
싸우다 보면 악연이 생기고 그걸로 인해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었다.
'다 올라왔다.'
그러면서 능선 위 주위 풍경을 바라본 주성진은 낙산대불로 이어지고 있는 길을 우선 막고 섰다.
'곧 오겠군.'
주성진의 독백이 끝나기 무섭게 몹시 다급한 표정의 노인이 쏜살같이 능선을 가로질러 주성진의 가까이에 다가왔다.
그는 작은 키에 몸이 삐쩍 말라, 멀리서 본다면 어린아이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한데 특이한 건. 기다란 대나무 통을 등에 메고 있다는 점이었다.
'혹 저 안에 청월무녀도가 있는 게 아닐까……?'
주성진이 그를 보며 입을 열려는 찰나 그가 먼저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뭐야, 빨리 안 비켜!"
그의 눈에는 다급한 빛과 동시에 살기가 번뜩인다.
주성진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그가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고색창연한 검을 빼 들고 주성진에게 짓쳐왔다.
주성진은 그의 검에 묻은 피딱지를 보고, 누군가와 일전을 치르고 온 걸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다짜고짜 날 죽이려고 드는구나…….'
주성진은 급히 검을 빼 들었다. 그 순간 그의 검이 주성진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쩡!
주성진은 그의 일격을 자신의 검으로 받아쳤다. 터져 나온 충격파에 자신의 검이 부르르 떨린다.
'음… 대단한 일격인데, 상승의 고수다.'
손목이 얼얼했다.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검이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보검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순간, 주성진은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며 몹시 노여워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새끼! 비루한 놈인 줄 알았는데… 갈 길 바쁜 나의 길을 막다니!'
이내 그는 치솟는 분노를 검에다 쏟아부었다.
쉬이익…….
꽝…….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살기가 그대로 내력이 된 양, 그의 보검을 타고 흐르는 진기가 엄청났다.
'저자가! 대충대충 상대하다간 내가 당하겠어!'
주성진은 한 발짝 물러나며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반격을 개시한 거였다.
챙, 챙, 챙…….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 부딪히며 수없이 많은 불똥을 일으켰다. 삽시간에 십여 합이 지나가며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흔히들 상대가 강하게 힘으로 밀고 들어올 때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정면승부, 또 하나는 상대의 힘을 비켜내고 허를 찌르는 방법, 마지막으로는 물러나 상대의 예봉을 피하고 기회를 노리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주성진은 지금 오기가 발동해 힘으로 맞서고 있는 거였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나 대단한 공력의 소유자였기에 양껏 맞서보고 싶었고, 본인의 검이 힘겨워할 만큼 상대의 검은 대단한 명검이었다.
"야합!"
상대와 거리가 벌어진 순간 주성진의 입에서 웅혼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파봐박…….
그이 신형이 강하게 땅을 박차며 용수철처럼 앞으로 튕겨 나간다.
'힘에는 더 강한 힘으로.'
상대는 주성진이 기세를 올리자 돌연 본인의 검을 구부렸다가 튕겼다. 순간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것을 주성진은 보지 못했다.
쩌어엉……!
"윽……."
고막이 찢어지게 아파 왔다. 주성진은 얼른 고막의 파열을 막았으나 한줄기 신음은 막지 못했다.
그 여파로 주성진은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힘껏 달려와 딱딱한 벽면에 온몸이 부딪친 느낌이라고 할까…….
'검이 연검처람 휘어지다니, 혹 말로만 들었던 탄검인가?'
탄검은 흔히들 검을 튕겨, 소리로 상대를 격살하는 음공이었다.
한데 그의 탄검은 단순히 음공이라기에는 어딘가 설명이 모자랐다.
주성진에게 전해오는 반탄력이 실로 막대했다. 덜컥 숨이 막히도록 만드는 위력.
'음, 검은 매개체일 뿐, 그가 기의 파동을 내게 뻗어낸 것이었어. 역시 무림에는 기기묘묘한 절기가 많구나.'
하지만, 주성진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오른발을 뻗어 대기를 밀어내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상대는 주성진이 일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검을 휘두르며 다가오자 흰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놈! 초고수구나, 설마 저놈도 청월미녀도를 탈취하려고?'
하지만 곧장 신색을 회복하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근접전을 펼치자는 건가? 감히 나에게, 좋아…….'
서로서로 원수처럼 뛰쳐 드니, 이제 두 사람은 육박전이라도 벌일 만큼 가까워진 상태다.
곧이어 무시무시한 충돌이 일어났다.
챙, 챙, 챙…….
검 한 자루의 길이가 채 못 되는 근접 거리 안에서 상대를 단박에 뭉개버릴 수 있는 공격들이 수십 번이나 오고 갔다.
파박!
성진은 살짝 옆으로 비켜났다.
부우웅…….
상대의 검이 종인 한 장 차이로 허공을 갈랐다.
그대로 맞았으면 머리가 날아갔을 일격. 대기를 찢어놓는 그의 검격에 그만 성진의 옷이 찢겨나갔다.
하지만 주성진의 두 눈은 점점 강렬해지고 있었다,
'지금이다!'
그가 검을 뻗었다 회수하는 순간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의 몸을 꿰뚫어버릴 듯하다. 그는 찔러 들어오는 검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급히 다시 검을 내뻗어 주성진의 검을 맞받아쳤다.
쩌어엉!
"큭……."
일시적이지만 그의 손목이 뒤로 꺾였다.
'밀어붙이자, 상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해!'
주성진은 몸을 흔들어 상대의 눈을 현혹하며 그의 사각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슉!
회심의 일격에 상대가 검으로 막지 못하고, 뒤로 쑥 물러났다, 빠른 반응이었다.
하나, 그는 만만치 않은 무공의 소유자, 그 와중에 물러나면서 왼손을 앞으로 밀어냈다.
'어, 장풍인가…….'
순간 그의 장심에서 허연 기류가 뭉글뭉글 솟구쳐 나오더니 그대로 주성진에게 쏘아졌다.
쐐애액!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움튼다.
'흐흐, 놈 한번 당해 봐라.'
주성진은 만만치 않은 장풍이 날아오자 급히 찌르려던 검을 죄에서 우로 휘저었다.
쫘악!
비단이 쭉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주성진의 귀를 아리게 했다.
'제길. 이런 소리 질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