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역산도와의 만남
다음 날 이른 아침, 객잔의 식당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던 주성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수저를 놓고 고개를 들었다,
딱 봐도 팔 척이 훨씬 넘는 키에 딱 벌어진 어깨, 부리부리한 눈과 크고 우뚝 솟은 콧날 그리고 두툼한 붉은 입술에 턱까지 길게 기른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자였다.
남성미가 물씬 나는 그의 용모에 주성진은 적이 감탄했다.
'하, 대장부가 따로 없구나, 한데 뭔 일 일까?'
주성진과 눈이 마주친 자가 싱긋 웃으며 입술을 벌렸다.
'후후, 내 예상이 적중했어, 내가 아는 상인의 습관은 보통 일찍 일어나고 일찍 밥을 먹던데, 역시 그도 마찬가지군.'
"안녕하시오? 식사 중인데 결례가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주성진은 그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외다, 한데 내게 용건이 있으시오?"
"그렇소이다. 긴히 말할 게 좀 있소이다. 아, 그대에게 부담을 주려 하는 건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자, 그러면 자리에 앉아서 얘기해봅시다. 내가 그대를 올려보려니 목이 아프오, 하하."
주성진은 자신의 맞은편 빈 의자를 가리켰다.
"고맙소이다."
그가 자리에 앉자 주성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를 했소이까?"
"난 아침을 동이 트자마자 먹는 편이라 숙소에서 먹고 왔소이다. 실은 어제 지나가다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봤는데, 때마침 볼일을 보러 가는 중이라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소. 어제 그대가 입회인과 이야길 끝내고 객잔으로 들어가기에 여기 객잔에 머물 거로 생각해서 부랴부랴 지금 온 것이오."
주성진은 집이 아닌 숙소라는 말에 주목했다.
'저자도 여기가 본래 집이 아닌 모양이군.'
그러면서 그가 주변을 살피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육선문 소속이오. 휴가 중인 왕천유에게 그대 이야길 들었소이다."
"그러면 그의 동료요?"
"그렇소, 그는 본부소속이고 난 사천성 관할 부지부장이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 나와 왕 대주와의 약속도 알고 있겠구려."
"그렇소, 내일 낙산대불에서 만나기로 한 것을 잘 알고 있소이다. 실은 그 일 때문에 왔소이다."
"……."
"다름이 아니고 나와도 대련을 해주시오. 난 소림속가 출신인데 마음껏 내 무공을 펼칠 상대를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요, 부탁 좀 드리겠소."
주성진은 소림의 무공을 견식 한 적이 없었다.
하여 그와 대결을 펼친다면 비록 그가 소림의 속가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소림의 무공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합시다, 한데 사천에도 유명한 문파가 많은 거로 아는데 상대를 구하지 못한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오."
"하하, 자랑 같지만 여기 후기지수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하오. 그렇다고 그들 문파의 중진들이 체면 때문이라도 나와 대련을 하겠소이까? 지면 개망신인데……."
주성진은 그의 드높은 자신감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자신감인지, 자만감인지 상대해 보면 알겠지.'
"그러면 내일 왕 대주와 약속이 있으니 내일 한꺼번에 합시다."
그러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오늘 좀 시간을 내주면 안 되겠소? 내가 겨우 오늘 하루 휴가를 냈기 때문에 그렇소이다. 물론 그대도 일과가 있을 것이오, 무조건 내 사정만 강요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건 잘 아오. 그래서 나도 빈손으로 오지 않았소이다. 내가 그대에게 일과를 상쇄할만한 사례를 하겠소이다, 어떻소이까?"
주성진에게는 오늘 특별한 일과가 없었다. 있다면 일행들을 기다리는 것, 그게 다였다.
"그럼 왕 대주에게 연락 좀 해주시겠소. 내일 약속, 오늘로 변경하자고."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주성진이 수락을 한 것 때문에.
"하하, 그건 문제없소이다. 그도 초조하게 대련 날짜를 학수고대하고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한다면 기꺼이 응할 것이오. 한데 하루에 대련을 두 번 해도 괜찮겠소이까, 물론 그대의 무공실력을 고려하면 문제 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는 어제 비무를 보면서 주성진이 자신보다 훨씬 고수인 걸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괜찮소이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인 것 같고, 한데 우리 정식으로 통성명하지 않았는데……."
"아, 미안하오, 마음이 급해서… 나는 역산도라 하오."
"정식으로 인사하오, 난 구주상단의 주성진이오."
두 사람은 강호의 방식으로 포권했다.
역산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준비한 사례는 역근세수경 필사본이요. 이게 본산에 있는 걸 내가 직접 베낀 거라 진본과 다름없소이다."
주성진은 깜짝 놀랐다,
"뭐요? 역근세수경은 소림의 진산지보가 아니오? 그걸 어떻게……?"
"하하, 그대가 달마역근세수경과 역근세수경을 혼동한 모양이요. 달마 조사가 창안하신 달마역근세수경은 당연히 소림의 진산지보가 맞소이다. 나도 접한 적이 없고. 하지만 역근세수경은 심신단련을 위해 후대에서 별도로 만든 것이오. 포교를 위해 민간에 널리 알리다 보니 시중에 유출된 지 오래되었고, 서점에 가면 간혹 구할 수 있소이다."
주성진은 몰랐던 사실을 알고 고개를 끄떡이면서도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음, 그렇단 말이군. 그런데 왜 그걸 나에게 주겠다는 거지? 별 쓸모가 없는 것 아니야. 아니야 뭐가 있겠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걸 저리 뻔뻔하게 사례로 주겠다고 하진 않았을 테지…….'
"음, 알겠소이다."
그래도 주성진의 말투는 조금은 떨떠름하다, 이를 눈치채지 못할 그가 아니다,
"왜, 실망하였소? 그래서 내가 본산에서 베낀 것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시중에 유출된 거와 비교하면 훨씬 상세하다오. 뒷부분에 범어가 좀 나오긴 하는데 그건 그대가 알아서 번역하시오. 나도 그냥 베끼기만 했지 그것까지는 보지 않았소이다."
"한데 말이오, 시중에는 어떻게 유출되었기에 다르다고 하는 것이오?"
"그건 책이 아닌 구술 형태로 전해졌기에 받아 적은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가 나는 것이요. 내가 이걸 굳이 그대에게 사례로 선택한 건 소림과의 인연의 끈을 연결해주기 위해서요."
"……."
"물론 그대가 상인의 길을 가고 있다는 건 잘 아는데, 장사하다 보면 소림의 위세를 실감하게 될 거요. 무수한 소림속가 제자들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니 말이오. 그대가 그들과 인연의 고리를 만드는데 이보다 좋은 게 뭐 있겠소."
"그것도 그렇군요."
"그대가 역근세수경을 익혔다고 하면 그대가 소림속가가 아니라도 그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오. 그만큼 우리 소림속가의 유대는 끈끈하다오."
어찌 들으면 그가 소림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떠벌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성진은 그 사실 자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고맙소이다. 나도 소림과 인연을 쌓아보겠소이다. 불심이 깊지는 않지만, 불제자이기도 하니까."
"하하, 그렇소이까. 그대가 불제자라니 반갑소이다. 자 그러면 낙산대불 건너편에서 해가 딱 중천에 떠올랐을 때 만납시다. 오늘은 날이 쾌청하니 비가 오진 않을 것 같소이다."
"좋소, 그때 봅시다."
주성진은 준비를 마치고 곧바로 출발했다.
낙산대불이 성도 인근에 있다고는 하지만 거리상으로 그리 가깝지는 않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경공을 펼치니 주변 경물이 빠르게 지나간다.
한 시진 반이 지난 시점에 주성진의 눈에 거대한 낙산대불이 들어온다.
'산 하나가 불상이고 불상 한 구가 산이라니 그 위용이 어마어마하구나.'
주성진이 서 있는 공터에서는 낙산대불에 바로 갈 수가 없었다. 낙산 대불 앞에는 양자강의 지류인 민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 좀 풀어볼까.'
주성진은 대장장이 이무송이 알려준 건강도인법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늘 하루의 일과로 빼먹지 않고 하는 터라 이제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동작을 다섯 번 반복하고 휴식을 취한 주성진은 거대한 낙산대불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대단하군, 부처님의 힘으로 홍수를 막으려고 만들었다지. 나중에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그때였다. 주성진의 귀가 쫑긋거린다.
두두두두…….
일단의 무리가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주성진은 낙산 대불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오는군, 선두의 인물이 왕천유와 역사도군."
주성진은 이십여 기의 말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들이 도착하고 주성진과 왕천유 일행은 서로 안부를 물었다.
짧은 인사를 끝내고 육선문 제3대 대주인 왕천유가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이거 못 본 사이에 신수가 훤해진 것 같소이다, 무슨 비결이 있소이까?"
"비결은 무슨, 나보단 오히려 그대가 신수가 훤한 것 같소이다."
"뭐, 나야 푹 쉬었으니 그렇고. 그대는 그러지도 않았을 텐데……."
주성진 그의 말에 빙그레 웃었다,
"여긴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서 그런 모양이오. 어제 비단계약을 성공리에 끝냈소이다."
"아, 그렇소이까, 축하하오. 우리 육선문에서는 그대의 공을 잊지 않고 있소이다. 조만간 육선문 차원의 사례가 있을 것이오. 그에 덧붙여서 나의 개인적인 사례도… 이따가 이야기하겠소, 하하."
주성진은 그저 말없이 그를 보며 웃었다.
'음 좋은 소식이 있으면 나야 좋지만 아무래도 육선문에 뭔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그들이 나에게 비무를 청하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일에 국한된 걸까, 아닐 수도 있다고.'
주성진은 기회가 되면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자, 그럼 비무를 시작합시다. 그래 누구부터 시작하겠소?"
"나요, 내가 먼저 하기로 우리끼리 정했소이다."
역산도의 말이었다. 주성진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알겠소이다. 여기가 비무하기엔 참 좋은 장소구려. 다만 부처님이 지켜보고 있으니 지킬 선은 확실히 지키며 대련에 임합시다."
"그야 그대만 잘 지키면 될 것 같소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테니 적당히 해주시구려."
"음, 최선을 다한 다라, 이거 벌써 오금이 저리는 구려……. 하하.'
도도히 흐르는 민강을 옆에 두고 두 사람은 상대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순간 역산도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러자 마치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는 느낌이라 성진은 묘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그의 기세가 놀랍구나, 확실히 내외공을 겸비한 자야.'
"자, 손속을 나눠 봅시다."
주성진이 고개를 끄떡이자 그가 천천히 쌍장을 들어 올렸다.
스릉…….
주성진은 적수공권 대신 검을 빼 들었다. 똑같이 무기 없이 겨룬다면 그에게는 별 새로울 게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가 강호에서 상대하는 자들 대부분 검이나 도를 휴대하겠지만 소림은 속가제자들까지 검이나 도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달마삼검이 존재하긴 하나 그건 언제 햇빛을 볼지 모른 채 소림사 장경각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었다.
순간 역산도의 굴강한 어깨가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