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생사푸줏간을 가다
유비환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안 된다고 하니까 사정이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자세한 말은 안 하셨어요. 그냥 이틀 전에 삼촌과 독대를 했다며 연신 고개를 흔드시더라고요. 그리고 이틀 말미도 삼촌에게 크게 양보받은 거라 하면서 상단주님과의 거래는 하늘에 맡겨보자고 덧붙이셨지요."
"……."
"음, 저희 아버지는 대쪽 같은 분인데 유독 삼촌에게만 약한 면을 보여왔어요. 그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언도 크게 일조했고요, 삼촌을 잘 돌봐주라는……."
주성진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요즘 비단 가격이 많이 올랐나? 휘주 상단이 갑자기 왜 저렇게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네. 게다가 여기 사천 말고도 비단 산지는 중원 곳곳에 많지 않은가 말이야.'
주성진은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가격이 올랐거나, 유독 사천산 특제 비단을 요구하는 곳이 늘어났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주성진은 그가 말을 마친 것 같아 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제가 나타난 거군요."
"그렇습니다. 하하."
주성진은 납치사건으로 인해 일찍 오지 않았다면 하루 차이로 계약을 놓칠 뻔했다.
'빨리 서두르자.'
"자. 그럼 계약하시죠, 아버님을 뵈러 갈까요?"
그가 손을 흔들었다.
"일단은 저랑 계약하시고 아버님은 다음 기회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심경이 복잡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수결은 해야 할 텐데요."
"제가 받아드리겠습니다. 제가 계약서 초안은 작성해 놓았으니 보시고 이의가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그는 품속에서 계약서 초안을 꺼냈다. 주성진은 빠르게 계약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주성진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번진다.
'이거 기대 이상인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호조건이야. 그냥 계약해도 되겠어.'
성진은 계약서 내용을 두고 밀고 당기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좋았다.
"계약서대로 하시지요. 저는 만족합니다."
"하하, 저는 상단주님이 수락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요? 우린 마음이 통한 사람이니 앞으로도 변치 말자고요."
그가 힘 있게 고개를 끄떡인다.
"그럼요, 주 상단주님. 그럼 잠깐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후딱 다녀올 테니."
"네, 편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하."
* ? ? * ? ? *
'룰룰라라…….'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주성진은 터벅터벅 객잔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가 봤다면 비를 쫄딱 맞는 주성진이 가엽게 보일만도 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는 주성진의 옷깃에 닿지 않고 튕겨나가고 있었다,
마령단을 복용한 이후 또다시 공력이 상승한 주성진에게 호신강기가 발현되기 시작한 거였다.
처음엔 주성진도 몰랐다. 하여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자 본능적으로 피할 곳을 찾으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한데 그의 옷이 젖지 않는 거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성진은 그 자리에 멈춰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살피고 깨달았다.
'아, 이건 호신강기다! 드디어 나의 기운이 내 몸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어.'
호신강기는 의식적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외부의 위험이 닥치면 그 순간 나타났다가 위험이 해제되면 곧바로 사라지는 기운이었다.
주성진은 오늘, 두 가지 겹경사로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하나는 계약이 성사된 것이고 또 하나는 호신강기의 성취였다.
한데 또다시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비가 좀 많이 올 것 같은데, 음 이러면 땅이 젖어 이동이 늦어질 것이고 그러면 일행들이 오늘 중에 못 오겠는데…….'
순간 성진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날씨 변화였다.
날씨를 제대로 예측할 수만 있다면 물류비용을 아낄 뿐더러 물건을 제때 공급할 수 있어 납기지연에 대한 위약금을 면할 수 있었다.
'이거 내가 공부해야 할 게 생겼어. 천문에 대한 지식을 쌓자고. 그리고 추가로 날씨를 잘 아는 전문가를 초빙해야겠지. 대량 이동은 최대한 운하를 이용하는 게 좋겠지만 운하로만 물건을 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각 지역의 날씨와 도로 상태를 자세히 분석해야겠다.'
주성진은 생각을 끝내고 주변을 돌려보았다,
'비가 오니 사람들이 없군, 그러면 경공을 펼쳐볼까.'
막 경공을 펼치려 도약하려는 순간 어디선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주성진의 고막을 때렸다.
"어휴, 어쩌나 비가 막 쏟아지네……."
"그러게, 제길 좀 일찍 나올걸, 푸줏간 주인이랑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어."
"큰일이다, 하늘 좀 봐봐, 비가 더 쏟아질 것 같아. 푸줏간 주인에게 사정해서 가죽 우비를 빌려야겠어, 단골인데 설마하니 거절하진 않겠지."
"이봐, 우리는 생사푸줏간의 단골 축에 끼지도 않아, 대량으로 사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뭐 그래도 부탁 좀 해보자, 가죽 우비 대신에 도롱이라도 빌려줄지……."
주성진은 순간 귀가 번쩍했다.
'뭐라, 생사푸줏간!'
급히 가려는 걸음을 멈춘 성진은 말소리가 들린 곳으로 다가갔다.
푸줏간 처마에서 이야기하던 이들은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끼이익…….
주성진은 푸줏간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야기하던 세 사람이 말을 멈추고 일제히 주성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좀 전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고 나머지는 푸줏간 주인인 것 같았다.
그 순간 주성진은 한 사람의 눈동자가 영활하게 돌아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음, 푸줏간 주인으로 보이는 자, 무공을 익힌 게 틀림없어.'
주성진은 주인이 왜 눈동자를 빛냈는지 알 것 같았다.
폭우 속에서 우비도 없이 들어온 자신이 이상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해 보였다. 비 한 점 맞지 않고 멀쩡했으니까.
"고기를 사러 오셨습니까?"
푸근하고 구수한 음색이다. 주성진은 푸줏간 주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 그게 아니라 다른 볼일이 좀 있는데… 뭐 여기서 고기를 구워 판다면 먹어볼 수는 있고요."
푸줏간 주인은 가죽 우비를 두 개를 내어 오더니 두 사람에게 말한다.
"반드시 반납해야 하네, 귀한 것이니까."
"고맙소, 나, 가리다……."
"고마우이……."
손님 두 사람이 가게 문을 열고 나가자 주성진이 푸줏간 주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가죽 우비, 제 눈에 상당히 좋아 보이더군요."
"하하, 행동에 지장이 없도록 얇고 부드럽게 만들었지요."
"그렇다면 공을 많이 들였다는 이야기네요. 가죽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무두질을 잘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가 경계를 풀고 환히 웃는다,
"하하, 손님이 뭐 좀 아시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무두질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가죽의 질이 결정되지요. 저 손님, 필요하면 제가 좀 팔 수 있는데요. 심심할 때마다 한두 벌 만들었더니 어느새 10벌이 넘었지 뭡니까……."
"아, 그래요, 저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대신 싸게 좀 해주세요."
그러자 그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떡인다.
"많이 사신다고 하면 당연히 깎아 드려야지요."
"아, 그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하, 이거 비 오는 날이라 오늘 장사 공치는 줄 알았는데 손님 덕에 하루 매상은 그럭저럭 채울 것 같습니다."
주성진은 손을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방금 나간 두 사람의 공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듣지 않았다면 그냥 여기를 지나칠 뻔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몇 벌 정도를 팔 수 있나요?"
"뭐,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고 남자용 5벌과 여자용 6벌이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원래는 팔 게 아닌데 손님이 원하시니 팔도록 하지요."
주성진은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기세를 많이 감추고 있군, 꽤 고수일 것 같은데.'
"고맙습니다. 다 사도록 할게요. 아 참, 제 소개를 드리지요. 전 구주상단의 상단주 주성진이라 합니다. 짐작하다시피 무공을 좀 익혔습니다. 제가 비에 젖은 모습이 아니라서 좀 의아해하셨지요?"
그러자 그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음, 저 친구가 내가 무공을 익힌 걸 알아본 모양이네,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있었는데도. 그렇다는 건,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고수라는 건데, 궁금하군, 그의 진짜 무위가.'
"하하, 제가 무공을 익힌 걸 알아보는 이가 드문 편인데 대단하시군요. 무공과 상술은 언제 다 익혔답니까?"
"뭐 운이 좋았지요."
"아, 그래요, 운이라… 하여튼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요. 저는 알량한 무공에다 고작 이 작은 푸줏간을 물려받은 게 다인데 말입니다……."
그는 주성진이 상단을 물려받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상단은 제가 만든 거랍니다. 아직 갈 길이 멀답니다. 하하."
그가 놀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죠, 그 나이에 범상치 않은 무공에다, 상단까지 운영한다는 게 어디 보통의 사람으로 가능한 일이랍니까?"
"너무 추켜세우지 마십시다. 너무 절 띄우면 떨어질 때 엉덩이가 몹시 아프답니다, 하하."
주상진의 농담에 그가 파안대소한다.
"하하하……."
"역시, 상인이시라 그런지 말솜씨부터 다르군요."
"아,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급히 연락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주성진은 그에게 일전에 만난 암흑전주의 직책을 대고 그에게 서신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그가 주성진을 다시금 바라본다.
한데 좀 전과 전혀 다른 기세가 그에게서 뭉클뭉클 일어났다.
어깨 품도 넓어지고 키도 조금은 커진 것 같다.
주성진도 그의 변화를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의 모습이구나. 그가 감춘 모습을 푼 건 이젠 완전히 날 경계하지 않는다는 뜻일 거야.'
"잘 알겠습니다, 부디 청월무녀도의 주인이 되길 바랄게요. 음 제가 특별히 전서구 대신 전서응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전서구는 비둘기이고 전서응은 매였다.
하지만 매를 전서의 목적으로 사용하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고맙습니다, 초면에 저에게 너무 잘해주시는군요."
"제가 사람을 볼 줄 아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 구운 고기 좀 드시겠습니까? 제가 최상의 부위를 내어드리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이건 저의 개인적인 사정인데 이야기를 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주변에 하소연할 데가 마땅치 않아서……."
"아, 네. 기왕이면 술도 한잔하면 좋겠는데요. 비 오는 날엔 술이 땅기는 법이니까요."
그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역시 뭘 좀 아시네요, 시원시원하십니다. 어차피 손님은 올 것 같지 않으니까 가게 문을 닫고 한잔하시지요. 그 전에 제가 전서응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주성진이 자리를 뜨려는 그를 급히 제지했다,
"잠깐만요, 저도 나중에 전서응을 기르고 싶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비법을 알려 달라는 건 아니고 그저 일반적인 방법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게 기왕에 전서응을 기른다면 북방의 송골매가 가장 좋습니다. 북방에 가서 송골매를 잘 다루는 자들을 찾아보면 될 듯합니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건 무공입니다. 만수문에 대해 알아보십시오."
"감사합니다."
성진은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생각했다.
'혹 그도 동물과 교감하는 방법을 아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