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화 유가장 방문
주성진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곁눈질로 그의 손가락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다. 놈이 긴장을 풀었어.'
주성진은 빠르게 단검을 날렸다.
쉬이익…….
순간 승리에 도취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란 빛무리가 빠르게 그의 망막 속으로 들어온 거였다.
'헉……!'
불길한 예감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지만, 그땐 이미 늦어 버렸다.
"큭……."
짧은 신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는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몰랐다. 비명을 내지른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쿵…….
주성진은 이마가 꿰뚫려 절명한 그를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곤 다시 한번 자신의 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못 미더워 몇 번을 점검해 번 결과 몸에는 아무 이상 없었다.
'후후, 네 꾀에 네가 넘어간 거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곧바로 주성진은 점혈된 세 여인에게 다가가 차례로 혈도를 풀어주었다.
"흑흑흑……."
그녀들이 일제히 흐느끼자 주성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다.
'아니, 울긴 왜 울어…….'
주성진이 뭐라 한마디 건네려는 순간, 돌연 남궁은하가 그를 껴안았다.
'어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린 그가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다 끝났어……."
잠시 후, 그녀가 성진의 가슴에 파묻은 얼굴을 떼면서 입을 열었다, 조금은 진정된 모습이다.
"고마워, 구해줘서……."
눈가가 촉촉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한 떨기 수선화가 생각났다.
"고생했다."
"조마조마했어, 네가 괴로워하자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그를 속이기 위해 연극을 펼쳤는데 어색하진 않았나 모르겠다, 하하."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완벽했어."
"참, 그가 여기서 독을 만든 거야?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주성진은 그녀가 무안할까 봐 그렇게 말했다.
"맞아, 나의 진기를 이용해서… 버티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안 그러면, 친구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능욕하고 비참하게 죽인다고 했거든."
주성진은 죽은 그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 생각했다.
"자책하지 마, 그 상황이라면 나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근데 너 뭘 좀 아는 것 같은데……."
그녀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니 여러 가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주성진이 나타난 것부터 시작해서…….
주성진은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그렇게 된 거야."
"그렇구나……."
"자.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주성진이 남궁은하와 나머지 두 여인을 데리고 나오자 모든 이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가 아직은 어색한 주성진이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다 그에게 다가오는 청수한 인상의 장년인을 발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우리 당가를 두 번이나 구해주었구려, 난 당가의 가주 당운악이라 하오."
곧 환갑을 맞이한다고 했으나 여전히 그의 얼굴은 50대 초반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 아닙니다. 가주님, 인사드리지요. 전 구주 상단의 주성진이라 합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주성진의 손을 잡았다. 가주가 포권이 아닌 친근하게 손을 맞잡는다는 건 그만큼 주성진을 환영한다는 뜻이었다.
"연락 당주에게 그대의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그대를 칭찬하는 말이 한참은 모자란 듯하오. 그나저나 장차 무림을 이끌어갈 동량인데 어쩌다 상계에 투신했을꼬? 뭐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이지만……."
"하하, 저를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빈말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내 진심이오. 그나저나 그대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응당 사례해야겠소만, 미안한데 이번 행사가 끝날 때까지 좀 기다려 줄 수 있겠소? 대략 열흘 후가 될 것 같은데."
성진은 순간적으로 날짜를 따져보았다. 일정이 조금 늦춰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아, 네 문제없습니다."
당운악은 주성진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왠지 저 친구가 마음에 드는군, 데릴사위로 들이고 싶은데 그건 안 될 것 같고, 좀 생각해보자 저 친구를 엮을 방법이 있는지.'
"좋소, 그래 어디에 머물 것이오? 머물 곳이 정해지지 않았으면 우리 당가에 머물러도 되는데……."
주성진은 손을 흔들었다. 그냥 겉치레로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왜냐면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는데 혹여나 당가에 머물면 행동에 제약을 받을지도 몰랐다.
'그건 곤란하지, 게다가 이번 일로 나를 칭송하는 이들도 늘어나겠지만 나를 시기하는 자들도 늘어날 거야, 당가에 있으면 그런 자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어올 수도 있다고, 어떤 식으로든.'
"아. 아닙니다. 제가 사업상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객잔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주님의 회갑연 날에는 반드시 참석하겠습니다."
당 가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도 즉흥적으로 제안한 거라 성진이 거절한다면 굳이 강권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손님들이 묵을 숙소가 모자란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뭐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오. 아이코 내 정신 좀 봐, 우리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합시다. 내가 남궁은하를 다독여줘야 할 것 같으니까. 안 그러면 제 아비에게 이를지도 모르거든, 하하……."
"아. 네 그러십시오."
다음날 성도 제일 객잔인 청양 객잔에서 아침을 맞이한 주성진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일정을 점검하고 있었다.
전날 성도 외곽에서 잠시 헤어진 일행들을 기다리려다 돌연 생각을 바꿔먹었다.
'그래. 유가장에 가서 유비환을 빨리 만나는 게 좋겠어, 그와 만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그사이 어떤 변수가 생겼을지 누가 알아…….'
주성진은 바삐 객잔을 나와 점소이가 일러준 데로 유가장을 찾아 나섰다.
유가장은 자체 뽕나무밭과 직물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성도 중심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략 도착하는 데 한 시진을 허비한 성진은 유가장 앞에 다가섰다.
유가장은 웅장하거나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주변에 멋진 뽕나무숲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그 나름의 운치가 있어 보였다.
여느 보통의 장원과는 달리 문이 활짝 열린 장원 앞에서 열심히 비질하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에게 다가간 성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음, 음 실례합니다, 여기가 유가장이 맞지요?"
소년은 비질을 멈추고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것이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네, 그런데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는 구주 상단에서 온 주성진이라 하오, 유비환 소장주를 만나러 왔소이다."
그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헉, 정말로 주 상단주님이세요? 형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주성진은 소년이 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하하, 그러시오. 혹 그럼 유비환 소장주와는 친형제 사이신가?"
그가 고개를 끄떡인다.
"네, 제가 형님의 막냇동생입니다."
사실 주성진은 비질하는 소년이 유가장의 일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주성진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런 오해를 하였을 것이다.
'여긴 여느 곳과는 확실히 다르군, 이런 곳일수록 믿음이 가지. 장주의 자식들이 거드름 피우지 않고 허드렛일도 마다치 않고 솔선수범하니까.'
지난번 장사에서 만났던 유비환도 소장주의 신분임에도 직접 등짐을 메고 먼 곳까지 비단을 팔고 다녔었다.
"하하. 반갑소이다. 유 소장주의 친동생이었구려. 실은 내가 대략 이맘때쯤에 온다고는 했으나 정확히 오늘 온다고 정한 건 아니외다. 그래서 말인데 형님께 연락 좀 할 수 있겠소?"
소년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연락은 필요치 않고요, 얼른 저와 같이 가요."
성진은 소년의 표정에서 서두른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다.
'음, 무슨 일이 있나? 그래, 직접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그럼 부탁하오."
"네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잠시 후 객청으로 안내받은 주성진이 뽕잎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다다다다…….
누군가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그가 오는가 보군, 진짜 무슨 일이 있나, 왜 저리 서두르지…….'
주성진은 일말의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고생고생하면서 예까지 왔는데…….'
바로 그때 유비환이 뛰어 들어왔다,
"아이코, 정말로 오셨군요.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휴… 그나저나 정말 다행입니다."
그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주성진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만, 혹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맞은편 자리에 앉은 그가 성진을 바라보았다.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유비환의 모습은 다소 들떠 보였지만 풍기는 기세는 지난번 장사에서 봤을 때보다 좋아 보였다.
'음, 무공이 늘었나 본데, 한데 결론부터 이야기해 주면 좋을 텐데, 괜히 가슴이 벌렁거리잖아…….'
그 순간 그의 말이 이어졌다.
"실은 며칠 전 삼촌이 휘주 상단의 대행수를 데리고 여길 방문했어요. 삼촌은 고향을 등지고 멀리 북경에서 포목점을 운영 중인데, 그런 삼촌이 갑자기 나타나니까 순간 멍해지더라고요. 게다가 혼자도 아니고……."
"……."
"곧바로 삼촌은 휘주 상단과의 비단 거래에,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제가 지난번 주 상단주님께 들은 이야기를 아버지께 전달한 바가 있어 아버지도 휘주 상단과는 거래하지 않으려 작정하고 있었지요."
"……."
"그래서 제가 아버지 대신 가계약한 대량거래 건이 있어서 곤란하다고 했더니 위약금을 대신 지급할 테니 막무가내로 달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삼촌의 얼굴에서 다급한 표정을 읽고 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당시는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
"집안 이야기라 좀 그렇지만, 사실 전 삼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릴 적 기억하는 것만 해도 여러 차례 대형 사고를 쳤었거든요. 뭐 그때마다 수습한 건 저희 아버지였고요. 한 번은 누굴 죽일 만큼 때려 아버지가 상대 부모에게 손과 발이 닿도록 빌어야 했습니다……."
주성진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의 삼촌이 이번에도 뭔가 사고를 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혹, 휘주 상단에 책잡혀서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원만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일방적으로 휘주 상단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이 되겠지, 물론 내가 계약에서 배제된다는 전제하에서. 음 일단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그 순간 유비환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하여튼 제가 강경하게 나가자 그날은 유아무아 흘러간 것 같았는데, 다음 날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시더군요.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딱 이틀을 기다려보고 상단주님이 안 나타나면 휘주 상단과 거래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에겐 날벼락 같은 폭탄선언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