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언보숭과의 대결 (1)
충칭을 떠난 일행들은 긴 여행 끝에 오전 무렵에 성도와 하루 거리인 마을에 도착했다.
그간 여행은 별다른 사고 없이 평온했고 일행들은 마차를 운행하는 주최 측의 안내에 따라 성화객잔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사천성 성도를 눈앞에 두고 객잔에 투숙하는 게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중간에 쉴만한 객잔이 없었기에 성화 객잔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를 끄는 말들이 쉼 없이 달려와 지쳐있었다.
얼마 후, 주성진은 목욕을 끝내고 점심 식사를 위해 주섬주섬 새 옷과 선물로 받은 도자기를 포함한 귀중품들을 챙겼다.
'아이코 귀찮네, 귀중품들을 항시 가지고 다니려니. 아, 도둑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주성진은 푸념하며 급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얼마 전 미시(未時)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종소리는 투숙객을 위해 매 시진마다 객잔에서 알려주는 편의였다. 물론 늦은 저녁 시간만큼은 예외였다.
'음, 사람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목욕통에서 깜빡 조는 바람에, 쯧쯧.'
성진은 따뜻한 물에 들어가자마자 긴장이 풀려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다 미시를 알리는 종소리에 깨고는 그때부터 부랴부랴 젖은 몸과 머리를 말리며 부산을 떨어야 했다.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자 본인의 내공까지 동원해 물기를 제거했다.
쿵쾅쿵쾅…….
성진은 서둘러 2층 객실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웅성웅성…….
순간 화산옥봉의 목소리가 성진의 귓전을 스쳐 지나간다.
'뭐야.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데, 음, 시비가 붙었나.'
주성진은 누가 감히 화산의 중진 고수인 화산옥봉에 시비를 거는지 궁금했다.
'이것 참…….'
급히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성진은 음식점 내의 상황을 살폈다.
'아, 저기 다 있었군.'
음식점 내 왼쪽 구석진 곳에서 본인을 뺀 다른 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과 화산옥봉이 서로 마주보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또한,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 옆에는 체구가 엇비슷한 사내 둘이 그를 호위하듯 좌우에 서 있었다.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거로 보아, 이십 대 중반은 넘지 않아 보였다.
주성진은 곧장 청력을 돋우어 그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봐요, 싫다는 사람한테 왜 자꾸 치근덕거리죠? 나는 일 없으니까, 당신 볼일이나 보세요."
"허허.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한잔하자는데 그게 뭐 어때서 그러시오? 나도 이제 어엿한 정파의 명숙인데,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군……."
언보숭이 태연하다 못해 뻔뻔스럽게 굴자 화산옥봉 감여군이 핏대를 세웠다.
"흥, 정파의 명숙! 언보숭 당신이?"
언보숭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방금 뭐라 했소? 그럼 내가 정파의 명숙이 아니란 말이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죠, 과연 본인이 정파의 명숙인지……?"
그러자 언보숭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 여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개 풀 뜯는 소리를 지껄이네. 이보시오, 나를 당신처럼 문파에서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착각하나 본데, 난 진주언가의 실질적인 서열 3위요. 내 위로는 오로지 가주 형님과 소가주인 조카밖에 없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이까?"
화산옥봉이 코웃음을 쳤다.
"호, 실질적인 서열 3위라… 그래, 좋아요. 어디서 내 소식은 주워들은 모양인데, 내가 화산에서 별 볼 일 없는 존재라 쳐요. 그럼 당신은 형님의 후광에 빌붙어 사는 치졸한 인생이군요."
언보숭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두 눈은 왕방울만큼 변해 튀어나오려 하고 덥수룩한 수염은 꼿꼿이 섰다.
"뭐라, 치졸한 인생, 예나 지금이나 주둥아리가 야멸차군. 너는 그래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거야. 그저 하룻밤 유희 대상이면 몰라도……."
"……!"
"달라붙는 남자들이 많으니 본인이 잘났다고 착각했겠지, 그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야. 누가 가시 많은 꽃을 좋아하겠어. 더구나 넌 화산파 출신이라 너랑은 쉽게 성혼도 못 하잖아."
점점 이야기가 험악해지자 성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참, 위험 수위를 넘었는데, 개인적인 은원이 있는 것 같으니 끼어들기도 뭣하고…….'
중간부터 들어서 시작이 어찌 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성진은 대화가 점점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화산옥봉의 서슬 퍼런 소리가 들려온다.
"네놈의 패악질을 만인이 다 아는데 정파의 명숙이라고! 네놈이 술만 먹으면 멀쩡한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병신 만든 걸 모를 줄 아느냐? 그것뿐이냐! 음식점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싫다는 여인을 강제로 능욕까지 했잖아. 그러고도 내가 사람이냐? 넌 개차반이야!"
언보숭이 열 받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삿대질했다.
"이게 어느 때 얘기를 지금 꺼내는 거야, 젊은 시절 한때 내가 방황한 건 맞아. 하지만 난 피해자들 모두와 원만히 합의 봤다고."
감여군이 그를 바라보며 냉소했다.
"흥, 합의가 아니라 협박이겠지……."
"이 계집이 생사람 잡으려고 드네. 네가 봤어, 봤냐고!"
"그걸 안 본다고 모르냐, 하여튼 긴말하기 싫으니 저리 꺼져!"
언보숭의 두꺼운 손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상대를 패려는 모습이었다.
"이이이……."
"흥, 그 손 조금만 움직이기만 해라. 아주 반 토막을 내버릴 테니까."
"넌,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날 모욕했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가만두지 않으면 어쩔래? 지금이라도 한번 대결해볼까?"
순간 언보숭의 비릿한 웃음이 그의 입가를 스쳐 지나갔다.
"후후, 비겁하게 검을 꺼내 들 생각은 하지 마라, 정정당당하게 맨손으로 붙자고!"
화산옥봉 감여군의 머리가 순간 띵해졌다.
물론 다른 무공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화산파하면 검법이었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고 맨손으로 붙자니 어안이 벙벙해진 거였다.
반면 진주언가 하면 권법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뭐 맨손? 네놈은 장점을 취하고 나는 단점을 취하라는 말이냐?"
"왜 꼬리를 빼는 거냐? 하하. 좋아, 이쯤에서 내가 가도록 하지. 단, 넌! 나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진주언가 전체를 모욕했다. 돌아가면 정식으로 화산파에 항의 서한을 넣을 테니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라. 넌 진주언가에 와서 세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할 것이다."
그의 말은 진주언가의 가주 명의로 항의하겠다는 뜻이었다.
"얼씨구, 착각도 유분수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다."
"흐흐, 두고 보면 알겠지. 넌 모를 거다, 화산파에서 별 볼 일 없는 존재니까. 하지만 난 형님 덕에 고급정보를 알고 있지. 곧 소림사, 화산파, 종남파 그리고 우리가 4각 협력체를 발족할 것이다. 사라진 모산파의 배반자가 애꾸눈을 하고 서안에 나타났거든……."
순간 감여군의 이마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뭐라, 임정영! 그놈이 나타났다고! 죽지 않았었나?'
임정영은 모산파의 금지구역에서 금단의 술법인 강시술을 훔쳐 달아난 인물이었다.
그가 빼돌린 강시술은 산사람을 실혼강시로 만드는 수법으로 엄밀하게 본다면 본연의 강시술은 아니었다.
그는 방문좌도의 부적술과 미혼약을 혼합하여 자신의 말만 듣는 꼭두각시 강시를 만들었다.
실혼강시는 음식을 섭취하는 대신, 사람이나 동물의 생기를 흡취하여 생명을 이어갔고, 그것이 폭발적인 공력의 원천이었다.
다만 하늘의 저주를 받은 수법이라 그 생명은 1년 정도로 아주 짧았다.
실제 실혼강시로 변한 자는 이미 그때 자아를 상실하였기에 죽은 목숨이라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감여군은 이제야 언보숭이 왜 큰소리를 치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문파의 힘이나 규모에 비한다면 진주언가는 소림사, 화산파, 종남파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
다만 그들이 과거 강시술을 연구했기에, 강시를 조종할 수 있는 작은 금종을 십여 개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실혼 강시와 이를 부리는 자 간의 교신에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아주 좋은 무기였다.
사실 그들은 200년 전 강시술 연구로 무림 공적으로 몰린 바가 있지만, 그 후론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다시는 강시술 연구를 하지 않겠노라 맹약하면서 간신히 가문의 몰락을 막을 수 있었다.
'큰일이다, 죽었다는 그자가 다시 나타났다면! 음 이번엔 단단히 준비하고 나타났을 텐데, 20년 전에는 그놈이 섬서와 산서, 하남을 오가면 잠시 행패를 부린 수준이라면 지금은 아닐 것이야. 더구나 지금은 느슨한 총무련 체제라 무림맹 차원의 일사불란한 대응도 못 할 터…….'
감여군은 왜 서둘러 4대 문파 간의 협력체를 서둘러 발족하려는지 이해가 갔다.
감여군이 생각에 빠져 있자, 언보숭이 이죽거리며 약을 올린다.
"이봐, 무릎 꿇고 사죄하려 하니까, 오금이 저리나, 하하. 뭐 그렇다면 내가 아량을 베풀어 주지. 여기 너의 일행 중에서 너 대신 나와 붙어 이기는 자가 있으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감여군의 화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이 비겁한 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들은 다 너의 조카뻘이야."
"흐흐, 아니면 말고, 한데 저기 저 친구는 조카뻘은 아니겠는데……."
그가 가리킨 이는 감전동이었다.
감전동도 그의 말도 안 되는 수작에 분개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권법의 달인이 아니었기에.
'나이를 거꾸로 처먹은 새끼, 아주 진상이구나……. 음 이럴 때 주 상단주가 있었으면… 대체 왜 안 나타나는 거야…….'
감전동은 주성진이 근접전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르륵…….
주성진이 지면을 미끄러지듯 달려왔다.
"제가 대결에 나서겠습니다."
감전동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감전동을 제외한 일행들의 눈에선 우려 섞인 모습이 역력했다.
주성진의 일취월장한 무공은 인정하되 상대는 진주언가의 상위 고수였다.
보다 못한 감여군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보다 앞서 언보숭이 주성진의 위아래를 훑으며 음침한 미소를 보낸다.
"누구지?"
"감 여협의 일행입니다."
"흐흐, 그렇단 말이지. 한 번 더 묻지, 나와 맨손으로 대결할 건가?"
주성진이 고개를 끄떡였다.
'새끼, 더럽게 의심이 많군. 생긴 것답지 않게 치졸한 놈이야…….'
"그렇습니다. 대신 그냥 하면 심심하니 내기라도 정하고 하는 게 어떻습니까?"
주성진은 즉흥적으로 내기를 신청했다.
미우나 고우나 그는 정파의 중진이었다. 한데 그런 그를 죽도록 팰 수는 없었다.
더구나 성진은 배경도 보잘 것 없었고, 자칫하다간 상단의 사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주머니나 털어야지 어떡하겠어…….'
그러자 그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가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저놈 뭐 있는 것 아니겠지?'
"그래 무슨 내기를 하면 좋겠나?"
"은자 오백 냥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다시 한번 주성진을 바라보자 주성진은 담담하게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좋아. 난 은자 오백 냥이 없으니까 대신 옥피리로 대신하지. 충분히 그만한 값어치를 할 것이야, 내가 장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