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도공과의 거래 (1)
주성진은 그에게 간단히 자신들의 일행을 소개하고는 본격적으로 대화에 들어갔다.
장생환이 희끗희끗한 머리를 젖히며 입을 열었다.
"손님들이 왔는데 별로 대접할 것이 없어서 미안하오. 손주에게 차를 내오라고 했으니, 많이들 드시구려, 그래도 이 지역 특산물이라 차 맛은 일품이오."
주성진이 대표로 말한다.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잠시 후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과 함께 차를 내어 왔다.
여인은 수더분한 인상으로 마음씨가 푸근해 보였다.
그녀는 재빠르게 집 안으로 달려가 간이로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가져온 다음, 작은 찻잔에 차를 따라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죄송해요, 탁자가 이거 하나뿐이라. 다 마신 찻잔은 여기 탁자 위에 올려놓으시면 됩니다."
"……."
노인은 며느리가 가져온 차를 후루룩 마시고는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에 비친 주성진의 얼굴에는 잔뜩 궁금함이 서려 있었다. 왜 본인을 불렀는지 말해달라는…….
"하하, 내가 주 상단주를 청한 이유를 설명하겠소. 사실 처음 그대에게 관심이 갔던 건, 마당에서 따뜻한 일광을 즐기고 있는데 난데없이 가슴이 뛰더라고. 이는 분명 내가 익힌 내공이 외부의 기에 급격히 반응한 것이었소."
주성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공 심법을 익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기세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으니까.
"아, 그래요? 혹 가슴이 뛴다는 건, 기의 작용 때문인가요?"
"그렇소이다, 내 내공이 불완전한 상태라 평소에는 꽉 눌러놓고 있었는데 외부의 자극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소이다."
성진은 노인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꼈다.
'음, 무슨 내공을 익혔기에 그리 반응 한단 말인가……. 가까이도 아니고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도.'
순간 성진의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나의 내공이 특별해서 동류의 내공에 스스로 반응한 거요.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오, 아무리 동류의 내공이라 할지라도 상대의 내공이 높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의 말은 주성진의 내공이 높다는 걸 시사하고 있었다.
"동류의 내공에 반응했다고요?"
"그렇소이다. 그 부분은 좀 있다가 설명하겠소.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그때 난 곧바로 뛰쳐나가 그대를 부를까 하다가 발길을 멈추었소. 나 딴에는 이미 무림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요?"
"한데 그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소."
"……."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땐 이미 그대는 흔적 없이 사라진 후였소. 한데 때마침 건너편 내 둘째 아들 녀석이 날 찾아오지 않았겠. 근데 둘째의 얼굴이 참 밝더이다, 난 녀석에게 물었지……."
"……."
"그랬더니, 방금 잘하면 괜찮은 거래를 틀 수 있다는 거였소. 나는 순간 기뻤소이다. 한데 녀석이 말이요, 느닷없이 만난 상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더니 이야기 말미에, 갑자기 그 상인이 어딘가 나와 비슷한 데가 있다는 거였소."
"……."
"뭐라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늘 나에게 느껴지는 기운이 느껴졌다는 거지. 그래서 난 옳구나! 내가 느낀 그 인물이 둘째 아들의 공방을 방문했구나! 라고 직감했소이다. 참고로 내 아들과 손자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소이다. 내가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주성진은 그 상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노인과 인상이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 순간 노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혹 이것도 인연인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더이다. 때마침 그대가 유주객잔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길 하길래, 그래!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만나보자고 마음먹었소."
"……."
"자, 서두는 이렇게 하고 이제부터 본론이오. 나는 그대에게 새로운 사업 거리를 제안하는 바이오. 물론 그대의 결정에 따라 내가 요구할 것이 있을 수도 있소이다."
주성진은 눈빛을 반짝였다.
'새로운 사업 거리라고, 이거 궁금한데…….'
"내가 그때 곧바로 그대를 방문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때마침 그 시간이 도자기 가마에 불을 끄고 도자기를 꺼낼 때라서 내 손주를 급히 대신 보낸 것이오. 뭐 솔직히 나의 인연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생각도 없지 않았소. 만일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끝인 게고……."
그러면서 노인은 탁자에 놓여 있는 비취색 술잔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걸 보고 솔직한 평을 말해 주시오?"
주성진은 아까부터 탁자 위에 올려놓은 술잔 조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특이하긴 한데 그렇다고 주성진의 시선을 확 끈 건 아니었다.
제일 아래에 주전자가 있고 그 위에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또 술잔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가운데 접시가 술잔의 받침과 주전자 뚜껑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구조였다.
한데 술잔의 가운데에 막대기처럼 생긴 기둥이 솟아 있어 잠깐 주성진은 '저게 뭘까'라고 생각하다 지나친 정도였다.
'음, 사업도 사업이지만 빨리 무공에 대해서도 듣고 싶은데, 뭐 나중에 이야기한다니 할 수 없지…….'
주성진이 궁금한 건 노인이 자신더러 비슷한 유형의 내공을 익혔다고 말한 부분이었다.
주성진은 가까이서 술잔을 바로 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하하, 특이한 조합이군요. 한데 전체적으로 중품 이상은 되어 보입니다만 비취색이 좀 탁한 게 아쉽네요. 또한 실용성이라 할까요, 뭐 그런 게 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그대가 도자기를 좀 볼 줄 아는구려, 한데 진짜 용도를 알겠소이까? 때론 보이는 게 다가 아닐 수도 있소이다, 하하."
주성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음, 그리 말씀하신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오랜 연구 끝에 최초로 만든 건데 그대가 대번에 쓰임새를 안다면 내가 좀 섭섭하지, 하하."
"아, 그런가요, 용도를 알려주시지요?"
노인은 한껏 목에 힘을 주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건 말이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술잔이오. 일정 이상 술이 술잔에 차오르면 술이 모두 새어나가도록 만들어진 구조라오. 자 그럼 내가 시범을 보여주겠소."
쪼르륵…….
노인이 술잔에 술 대신 찻물을 붓기 시작했다. 한데 곧장 찻물이 넘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찻잔의 찻물은 항상 찻잔의 절반 정도 높이에서 더는 오르지 않고 있었다.
'하. 기발하네, 저 찻잔의 가운데 솟아 있는 막대 하단부에 비밀이 있는 모양이군.'
의구심이 들었던 술잔의 독특한 매력은 술이 일정량 이상일 경우 가운데 솟아 있는 기둥 아래로 술이 빠져나가, 바로 아래의 주전자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주전자로 내려간 술을 다시 꺼내서 마실 수도 있겠구나.'
주성진이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자 노인이 미소 짓는다.
"하하. 어떻소? 이 찻잔이 그대를 전무후무한 거부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성진은 잠시 대답을 유보했다,
'아, 그건…….'
노인의 호언장담처럼 되면 좋겠지만 문제는 범용성이었다.
기발한 착상이야 본인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기를 쓰고 살 것 같지는 않았다.
'음, 도자기가 좀 더 고급스러우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아주 비싸면 안 될 것 같고…….'
성진은 저 술잔이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분위기 전환을 위한 여흥 거리로는 좋을 것 같았다.
특히나 서로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특이한 술잔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주성진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삼선녀의 맏이인 강설주가 끼어들었다.
"저, 도공 어르신,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하하. 아름다운 아가씨가 무엇이 궁금할까? 뭐든 말해보세요."
"제 생각에는 소장 가치가 있게끔 고급스럽게 만든다면 많이 팔릴 것 같아요. 단 가격이 너무 비싸서 술을 따라 마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우면 안 되겠죠."
노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좋은 지적이요. 튼튼하면서도 고급스럽고 그렇다고 너무 비싸면 안 되고 사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관점이었소. 물론 그대들의 요청에 따라 다른 대안도 마련해 두었지만……."
"호호, 그 말씀은 원래 저처럼 생각하고 계셨다는 거군요. 그러면 주 상단주님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아마 저와 그렇게 생각이 다르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녀가 생긋 웃으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성진이 짧게 대답하자 노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의 속마음은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자 환희에 차 있었다.
'잘하면 탁기를 몰아낼 수 있겠어…….'
"자. 이제 어떻게 만들지는 의견을 일치를 본 것 같소. 그러면 적당한 양을 과연 제대로 만들 수가 있는지가 남았소이다."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신지요? 무슨 문제라도 남아 있습니까?"
"아까 그대를 초빙한 이유를 말했는데 실은 내가 한 가지 이야기 안 한 것이 있소이다. 물론 그대들이 지금의 이 잔으로 충분히 만족한다면 거론하지 않았을 건데……."
"……."
"음, 다름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상황에서 그렇게 만들려면 두 가지 문제가 있소. 첫째는 대량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 두 번째는 단가를 맞출 수 없다는 점이요. 하지만 주 상단주가 도움을 준다면 일시에 이 모든 것을 해소할 수 있소이다."
주성진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를요?"
주성진은 생각지 못한 급작스러운 말이라 다소 당황했다.
"그렇소, 사실 이 작업은 나의 아들이나 제삼자에게 맡길 수가 없소. 오로지 내가 만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부작용을 겪고 있어서 말이오. 보시다시피 내 얼굴이 누렇게 떠 있지 않소이까?"
주성진은 처음 그를 대면했을 때 그에게 황달끼가 있나 잠시 생각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혹, 황달이신가요? 아니면 익힌 내공의 부작용인가요?"
"무엇인 것 같소?"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공의 부작용 같습니다만……."
노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살짝 귀띔을 주자면 난 양강 계열의 내공을 익혔소."
그러자 주성진의 뇌리에 번뜩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만……."
노인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하하하, 그럼 우리 동시에 말해봅시다. 그냥 말하면 싱거우니까……. 소저! 미안하지만, 셋을 세 주시오."
노인은 자신의 문제를 해학적으로 웃어넘기고 있었다.
강설주가 고개를 끄떡이며 수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그러자 그들이 동시에 외쳤다.
"열화문 열양공!"
"열화문 열양공!"
주성진과 노인의 말이 정확히 일치했다.
"하하하……."
'음…….'
노인은 웃었고 주성진은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