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밀염꾼의 등장
두 사람의 긴 그림자가 불빛에 일렁일 무렵, 그들은 동시에 서로를 바로보았다.
"하하, 증 상단주, 주변이 밝아져서 참 좋소."
"주최 측에서 미리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오. 곳곳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해놓았으니까."
"그런 것 같소, 불을 밝힐 기름도 충분해 보이고 바람에 불이 꺼질까 봐 곳곳에 유등을 달아놓았소이다."
"자, 경 상단주, 그럼 사업 이야기나 좀 해볼까요?"
두 사람은 호위무사들을 뒤로 멀찍이 물리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편 주성진은 밤인데도 대낮같이 밝은 유등이 좀 신경이 쓰였는데 그들이 호위무사들과 떨어져 이야기한다고 하니 마음 놓고 엿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하하. 오히려 잘되었군, 호위무사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경 상단주. 요즘 말 가격이 오를 기미를 보이고 있소이다. 조만간 명주실과의 교환 비율을 조정해야 할 듯싶소이다."
"알겠소이다, 내 담당자에게 그리 일러 놓겠소. 한데 증 상단주, 조선에서 홍삼을 수입할 의향은 없소? 지리적으로 가까운데……."
"뭐, 그대가 충분히 양만 보장해주시오. 그러면 내키지 않지만 수입해보리다."
경천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오?"
"그야 전에 조선 상인 아무개한테 치를 떤 적이 있어서 그렇소이다. 이자가 가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자신이 가져온 홍삼을 다 태워버리려고 하더라고. 내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가격을 양보한 적이 있었소이다."
"하하. 그 조선 상인 고단수군, 증 상단주가 반드시 홍삼을 사야 한다는 걸 꿰뚫고 있었던 것 같소이다……."
한편 주성진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각자의 특산품을 서로 물물교환식으로 거래를 하고 있었다.
뭐 그때까지는 그저 일상적인 사업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한데 그들의 입에서 밀염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주성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 밀염!'
그 순간 그들의 말이 이어졌고 주성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음, 나라에서 밀염을 엄격히 금지하는데도 저들이 밀염에 손을 대려 하는 건 이를 타개할 방법이 있다는 것인데, 그게 뭘까…….'
사실 그들은 대외적으로 버젓이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밀염을 전문적으로 불법 유통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아무리 밀염을 내다 파는 수익이 엄청나다 해도 적발되면 모든 게 끝장인 일을 굳이 밀어붙이려 한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단의 해체는 물론이고 자칫 그들 생명도 부지하기 힘든 일을 추진할 리가 없었다.
순간 주성진의 뇌리에 번쩍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저들이 나라에서 허가받은 소금전매권을 가지고 있다면! 음, 만일 그렇다면 가능할 것 같은데……. 정식으로 유통 허가를 받은 소금에 밀염을 섞어서 판다면 말이야…….'
주성진은 반쯤 확신했다.
'나중에 저 뚱뚱보에게 확인해 봐야겠다. 허허. 그나저나 나도 이런 쪽으로 너무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음……."
'어쨌든 저들이 소금전매권을 가지고 있다면 보통의 상인들은 아냐. 중앙 관서와 밀착되어 있다는 뜻이거든, 아마 고관대작이나 황실 종친, 그도 아니면 환관들일 것이야.'
사실 소금전매권은 나라에 신청한다고 해서 절차대로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권을 따내기 위해 물밑으로 엄청난 공을 들여야 했다.
주무 부서는 그저 실무자일 뿐이었다.
성진도 본인의 상단을 크게 일으키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권세를 가진 자들과의 우호 증진이었다.
싫든 좋든 지금의 시대에는 그게 현실이었다.
밀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정리될 무렵 또다시 주성진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말들이 그들의 입에서 오고 갔다.
"경 상단주. 양귀비는 언제부터 공급할 수 있으오리까?"
"그건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아직 재배 중이니까. 사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했소이다. 아무래도 원산지가 여기가 아니라서……."
"음, 그렇소이까? 좀 빨리 되면 좋을 텐데, 알다시피 황실이나 고관대작이 즐기는 양귀비를 요동에 풀기만 하면 그야말로 서로 달라고 아우성칠 것이오. 물론 은밀하게 거래해야겠지만……."
그러자 경 상단주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그건 걱정 붙들어 매시오. 전설의 화타가 양귀비를 마취제로 썼다는 기록이 있지 않소이까. 지금은 귀한 약재로 취급되고 있으니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소이다. 뭐 그래도 찝찝하면 관리들에게 기름칠 좀 해주던가요."
"음, 그래도 차차 양귀비에 중독된 자가 늘어나면 사회문제가 될 것이오. 그러니 긴장을 늦추면 안 되지……."
"돈 있는 놈들에게만 소량으로 팔 건데 뭐가 대수겠소. 설령 그놈들이 중독된들 대놓고 자신을 까발리지도 않을 것이고. 그리고 솔직히 재배에 성공한다 해도 대량으로 공급하지는 못한다오. 그러니 다수에게 많이 팔기보다는 소수에게 비싸게 파는 쪽으로 연구해 보시오."
그러면서 경 상단주가 품속에서 양귀비를 꺼냈다.
"이건 우리가 시험 재배했던 것이오, 선물이오."
환히 비친 횃불 아래서 뚱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하하, 고맙소이다. 나도 이럴 줄 알고 답례품을 가지고 왔소이다. 겉으로 보긴 평범해 보이는 장뇌삼이지만 자그마치 수령이 백오십 년짜리외다."
"와! 정말이오? 그리 귀한 것을!"
"나중에 드리겠소, 하하."
시간이 흘러 밤하늘에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도 밀염상은 나타나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주성진은 저들을 어찌할까 생각 중이었다.
주성진이 추산하기로는 양 상단의 인원은 합해서 모두 30명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호위무사일 게 틀림없었다.
'음, 일단 내가 저들을 모두 제압한다는 전제하에, 마음 같아서는 저 상단주 두 놈을 저승을 보내고 싶은데 말이야. 휴 차마 그럴 수는 없고.'
터무니없는 자신감 같이 보였지만 주성진은 요즘 들어 자신의 무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절정의 고수를 격파한 탓이었다.
그러다 그가 다시 인상을 찌푸린다.
'아, 그뿐만 아니지, 밀염상이라는 작자가 혼자 나타나지는 않을 거야! 그도 필시 수행원을 데리고 올 것이 분명해. 거기에 더해 밀염상 그자도 무공을 익혔을 가능성이 커. 원래 불법적인 곳일수록 위험도가 높으니까.'
그렇게 따져보니 저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주성진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음. 저들을 내가 모두 제압할 수 있을까.'
주성진은 밀염상을 꼭 산 채로 잡아 관청에 직접 데려갈 작정이었다.
왜냐면 우두머리급 밀염꾼들은 대부분 목에 현상금이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밀염꾼들이 극성을 부리면 나라의 재정이 큰 손실이 날 수 있으므로, 나라에서는 그들을 눈에 불을 켜고 잡아드리려 하고 있었다.
하여 전국에 방을 붙여 밀염꾼을 신고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걸고 있었고 붙인 방에는 주요 밀염꾼의 용모파기도 그려져 있었다.
'좋아 밀염상만 붙잡고, 두 상인 놈은 자필 자백을 받아내고 살려준다. 문방사우가 없으니 옷에다 혈서로 쓰라 하면 되겠군, 그리고…….'
주성진은 호위무사들은 될 수 있으면 살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을 때 이야기지 몇 번 경고 후에도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면 자비를 베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저들이 뿔뿔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친다면 애를 먹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주막 뒤가 절벽이라는 거였다.
'음, 내가 바삐 움직이는 수밖에 없군.'
밤이 깊었다.
시간이 얼추 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다다다…….
순간 주성진은 귀를 쫑긋거렸다.
'밀염상이 무리를 이끌고 오는가 보다. 대략 30여 명쯤 되어 보이는데.'
주성진은 공력을 일으켜 서서히 시력을 돋구었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주변이 하나둘 식별되기 시작했다.
'가까이 왔다. 나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구나…….'
잠시 후 회색 옷을 입은 자들이 우르르 주막 앞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경 상단주와 증 상단주가 눈을 번뜩이며 나타난 무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그들 무리 가운데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오더니 경 상단주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인다.
"안녕하세요, 참새가 방앗간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그건 그들끼리 사전에 약속한 은어였다.
참새는 밀염상을 일컫는 말이고 방앗간은 상단을 의미했다.
"음, 그런가… 한데 못 보던 참새인데……."
"대장 참새가 다리를 다쳐서 서열 2위 참새가 대신 왔습니다. 제가 대장 참새의 위임인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가지고 왔으니 확인해 보시지요."
그러면서 그가 봉투를 꺼내 보인다.
경 상단주는 자신의 호위대장에게 시켜 봉투를 가지고 오게 했다.
봉투를 꺼내 본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음, 맞는 것 같은데, 필적이 그자의 것이야. 그래도 모르니 그가 찍은 손도장의 진위를 확인해 봐야겠어.'
그러면서 자신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대조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일치하는구나…….'
상대는 경 상단주가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자 곧바로 전음을 펼쳤다. 그러자 경 상단주가 움찔한다.
―놀라지 마십시오, 전음이라는 것입니다. 주변에 듣는 귀들이 많은지라…….
경 상단주도 전음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부럽군, 나도 전음을 펼칠 수만 있다면…….'
바로 이때 상대의 전음이 계속 이어졌다.
―안녕하십니까? 경천일 상단주님. 저는 촉산염방 부방주 강일호입니다. 소금 광산에 축대가 무너져 시찰하던 방주님이 다리를 좀 다치셨습니다. 하여 부득이 제가 방주님 대신 왔사오니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음, 어미 참새는 괜찮소?"
경 상단주는 전음을 펼칠 수 없기에 계속 약속한 은어를 사용했다.
―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서 몇 달은 정양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 하지만 소금 광산은 곧바로 정비하였기에,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경 상단주는 고개를 끄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소, 무엇보다 그가 무사하다니 다행이오."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는 소금 광산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내심 더 반기고 있었다.
경 상단주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만일 방주의 손도장이 찍히지 않았다면 오늘 거래는 없었던 일이 되었을 거요. 그게 방주와 나의 약속이거든."
―하하. 저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앞으로 모든 거래도 손도장이 있어야 유효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경천일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게 서로에게 족쇄를 치우는 일이지. 그런데 말이요, 만일 내가 그대 방주의 손도장을 휴대하지 않으면 어찌하려고 했소이까?"
―뭐 그러면 오늘 일은 다음번으로 미뤄야겠지만. 방주님 말씀으로는 경 상단주님이 주도면밀한 분이라 반드시 가져올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허허, 그대 방주는 날 제대로 보고 있었군, 아무튼 오늘 거래가 잘 되었으면 좋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멀리까지 왕림해 주셨는데 저희가 잘 해드려야지요. 양만 보장된다면 저희는 최고 품질의 소금을 염가에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