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뚱뚱보 상인의 등장
주성진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상인의 목표를 낮게 설정한 것은 아닐까. 목표가 높아야 설사 목표에 미치지 못하더라고 근처까지 가는데 말이야.'
자신도 무인이 아닌 상인의 처지에서 본다면 똑같이 그가 제시한 예의 범주에 들 것 같았다.
'그렇지, 속해있는 곳의 관습과 전통은 무시 못 하는 것. 은연중에 길들여지고 자신도 모르게 그 잣대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야. 이거 만류귀종이라 하더니 그의 말을 들으니 나 자신 상인으로 가야 할 길을 너무 좁게만 보고 있었어.'
한데 마냥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는데, 순간 반박할 거리가 뇌리에 번쩍 떠올랐다.
'그래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겠다.'
주성진은 눈빛을 빛내며 이무송을 바라보았다.
"저. 지당한 말씀인데, 그래도 자신을 돌아보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주제 파악도 못 한 자가 허황한 목표를 가지면 안 된다. 그런 뜻이요?"
"뭐. 그렇지요. 우선은 먼저 자신을 알아야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러자 그가 논쟁거리가 생긴 듯 뜻밖에 좋아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하. 그러면 어떻게 자신을 알아가겠소? 가령 내가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판단하겠소?"
"그야 스스로 깊게 생각해보고 남들의 평을 들으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 말도 일견 맞소. 하나 설령 그런다 해도 자신의 감추어진 진정한 능력을 발견 못 한다면 어찌하겠소? 왜 우리 주변에 대기만성이라는 사람도 있지 않소이까?"
주성진은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본인은 일반적인 관점인 데 반해 그는 무공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많은 실전 경험과 주변의 다양한 의견을 섭렵한다면 그의 말처럼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싸움의 기교까지도 자연스럽게 터득하겠지'
"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싸우다 죽어 버린다면? 그러면 다 소용없는 일이야. 어쨌든 한계를 정하지 말자는 그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군.'
주성진은 이쯤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 했다.
그에게 무림의 최신 동향이나 눈여겨보거나, 주의해야 할 고수나, 단체에 대해 이야길 듣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번 논쟁을 져주면서 끝내야 했다.
"제가 깊게 생각해보니 감찰관님의 말씀이 지당한 것 같습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그런 것 가지고……. 자 그럼 계속해서 이야기합시다."
주성진은 속으로 뜨악했다.
'뭐라! 안 되지, 피곤하게. 정말 진드기가 따로 없군…….'
"저 잠깐만요. 그 전에 제가 여쭈어볼 게 좀 있는데요. 저에겐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오, 그렇소, 그러면 먼저 물어보시오."
그렇게 막 주성진이 입을 열려고 했다. 한데 이때.
우당탕탕…….
일단의 인물들이 음식점에 난입하더니 우르르 주성진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최고급 비단옷을 입은 뚱뚱한 중년인을 필두로 열 명의 건장한 장한들이 그를 에워싸며 보호하듯 뚱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척 보아도 그들은 호위무사 같아 보였다. 장내는 그들이 내뿜는 싸늘한 냉기에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특이한 건 그들 호위무사는 모두 변발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순간 주성진은 직감했다.
'뭐야, 저들은 요동 땅에서 온 자들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 순간 이무송과 장보옥은 뚱뚱한 중년인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느 순간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매우 놀란 듯 입을 벌린다.
그러다 곧바로 이무송은 소태 씹는 표정으로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고, 장보옥은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주성진의 뇌리에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허허, 감찰관 부부의 표정으로 보아 저 뚱보를 아는 눈치인데 무슨 일일까……. 아, 그러고 보니 저 뚱보, 장사꾼 같은데. 얼굴에 개기름이 번드르르한 걸 보니, 뭐 그다지 좋은 축에는 못 들 것 같고.'
나름 뚱보에 대해 주성진이 판단하는 사이. 뚱뚱한 중년인이 본인의 시선을 피한 장보옥을 보며 이죽거렸다.
"흥, 중놈하고 눈 맞은 년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잘도 돌아다니는군."
그러자 이무송이 발끈했다.
"이봐 증초익, 안 본 사이에 간덩이가 불어 터졌구나. 감히 나와 집사람을 모욕해?"
"왜? 또 그때처럼 알량한 무공으로 날 위협하려고? 이 무식한 중놈 새끼야……."
원한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가 독설을 퍼붓는다.
주성진은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자 내심 당황스러웠다.
'뭐야, 애정 문제인 것 같은데…….'
자초지종을 알아야 끼어들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눈을 내리깔고 있던 장보옥이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자애롭던 얼굴이 표독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언제 네놈을 좋아하기라도 했나? 네놈이 잘못된 태중 혼약을 빌미로 나를 쫓아다닌 거지. 더구나 넌 그때 결혼까지 한 몸이었어."
"내가 태중 혼약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뭐 그렇다 해도 작금의 시대에 이처, 삼첩이 흉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안 그래?"
"개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얼른 꺼져! 나와 남편이 네놈이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나이를 허투루 처먹어도 유분수지, 어디에 와서 행패야."
증초유는 악에 받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더니, 네년이 나이가 들더니 독 오른 살쾡이가 되었구나. 옛날에는 그래도 봐줄 만했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았구나. 세상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저 중놈하고 눈이 맞아 가출한 네가 잘못한 건지, 아니면 내가 잘못했는지 말이다."
"네놈이 나와 가문을 줄곧 괴롭힌 건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것도 모자라 넌 나에게 수면제를 먹여 겁탈하려고 했었잖아. 내가 무공을 익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평생 네놈 밑에서 허덕이고 있었을 거다."
순간 주성진의 귀가 쫑긋거렸다.
'뭐라. 수면제, 저놈 진짜 나쁜 놈이구나.'
그 순간 뚱보의 말이 이어졌다.
"흥, 결혼할 사이에 무슨 겁탈! 그리고 솔직히 이젠 나도 늙어빠진 너에게 관심이 없어! 젊고 귀여운 애들이 사방 천지에 늘렸는데… 하하하."
"이 새끼, 헛소리 집어치우고 안 꺼져!"
그 순간 뚱보의 뺨이 심하게 씰룩거렸다.
"흐흐흐, 흐흐흐… 이봐. 네가 가지 말라고 해도 내 발로 갈 것이다. 사실 내가 너희 연놈을 우연히 보고 이리로 온 건 아주 기막힌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다."
"……."
"그것은 바로, 바로……. 장백 산장이 하루아침에 소리 소문도 없이 멸문했다는 소식이다. 그간 요동에서 유세를 떨더니, 아주 꼴좋게 되었어, 하하하."
그녀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증초유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독설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뭐라고, 그럼 부모님은, 형제들은…….'
"정말이냐?"
"뭐 믿거니 말거나……. 나 같으면 다른 일은 제치고 당장 달려갈 것 같은데, 하하."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야멸차게 뒤돌아섰다.
"얘들아, 돌아가자, 하하하."
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순간 주성진은 급히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멍한 충격에 빠져 있는 두 사람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강설현이 눈에 들어온다.
"저, 제가 저들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요동의 소식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알아보고요. 그리고 설현아! 미안한데 오늘 저녁 약속 모임은 내가 늦을지도 모르니 양해를 부탁한다고 전해줘."
설현으로서는 주성진이 왜 굳이 따라 나가려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하나 말리기엔 감찰관 부부의 소식을 알아본다는 게 걸렸다.
한마디로 두 사람의 눈치가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무송으로서는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그가 나설 수도 있겠지만 충격에 빠진 부인을 두고 뚱보를 쫓아갈 수 없었다.
게다가 과거의 악연이 그의 마음을 주저케 하고 있었고.
이무송이 말문을 열었다.
"음, 부탁하네, 어찌 이런 충격적인 일이……."
사실 주성진이 그들을 따라가 보려는 이유는 비극적인 소식을 좀 더 알아보겠다는 것도 있지만, 그건 표면적인 일에 불과했다.
그는 상인의 행적이 궁금한 거였다.
정황상 그는 요동에서 활동하는 상인이 분명해 보였고 주성진이 보기에도 꽤 위압적인 무인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멀리 요동에서 사천까지 행보를 하였다면 상당히 큰 거래가 있을 게 분명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보통 재력이 있는 상인이라도 무공을 갖춘 무인 다수를 호위로 데리고 다닌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음, 저놈의 성정도 그렇고 뭔가 불법적인 냄새가 나는데…….'
주성진의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저런 놈이 가까운 미래에 나의 경쟁자가 되게 만들 순 없어. 정당한 거래라면 모르겠지만 사회 혼란과 미풍양속에 반하는 거라면, 내가 개입해도 거리낌이 없다고……. 어차피 국법에서 금지한 것이니까…….'
시간이 흐르고 주성진은 행적을 숨기며 그들을 미행하고 있었다.
그들 일행은 사륜마차 한 대와 말을 탄 15인의 무인들이었다.
애초에 음식점에 들어오지 않은 무인들이 있었기에 그들 일행 규모는 처음 주성진이 생각한 규모보다 컸다.
'음, 산길로 들어서는 군, 여긴 관도가 아닌데 마차가 갈 수 있을는지…….'
주성진의 생각을 여지없이 비웃기라도 하듯 마차는 험한 언덕길을 끄떡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야, 저 마차 갖고 싶군. 확실히 북방 쪽에서 뭐든 물건을 잘 만든단 말이야.'
주성진이 마차를 보고 감탄하는 순간 선두권에 말을 탄 무인들이 언덕 꼭대기에 멈추어 섰다.
곧이어 언덕을 올라간 마차도 멈춘다.
'음, 저들이 휴식을 취하려는 건가, 아 뭐야 누군가가 있어. 기다리고 있었구나.'
주성진은 길옆의 나무 틈을 비집고 조심스럽게 언덕 위로 올라갔다.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려다 보니 속도는 점점 늦어졌다.
'아이고 힘들어, 거의 다 왔다. 자 그럼 저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까.'
주성진은 몸을 숨기기 좋은 큰 나무 뒤에서 귀를 활짝 열었다. 내공을 끌어올리니 언덕 위 주막의 이야기가 그의 귓속으로 쏙쏙 들어왔다.
"하하. 증 상단주, 오신다고 고생 많았소."
"아니외다. 경 상단주, 지난번 그대가 나를 방문했으니 당연히 내가 찾아오는 게 예의 아니겠소. 덕분에 살도 빼고 우연히 뼈에 사무치는 연놈들을 만나 시원하게 분풀이해주었소, 하하."
순간 경 상단주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원수를 만났다고 하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의아해서였다.
"아. 그렇구려. 그건 그렇고 누추한 이곳으로 오라고 한 것은 그가 굳이 여기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증초익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사업상 중요한 자를 만나는 건데 장소가 문제가 되겠소이까. 어디든 달려가야지. 한데 그 밀염상은 언제 오는 것이오?"
"아마 밤중에 나타날 것이오. 그가 오기 전에 우리 사업에 대해 다시 한번 논의합시다."
"좋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그리 말할 참이었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