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총무련 감찰관의 등장
찌푸렸던 주성진의 얼굴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호. 그렇단 말이지…….'
사실 그의 목표 중의 하나는 얼마 전에 결심한 거지만 몸에 호신강기를 두르는 거였다.
그러려면 삼갑자 이상의 내공이 필요했고, 이번에 얻은 취구환을 먹는다 해도 그게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였다.
"저 그런데요, 생기가 뽑힌 자는 어떻게 되죠? 내 생각에 살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당장은 죽지 않겠지만 서서히 죽어가겠지요. 그러니 과거 혈교가 무림 공적으로 손가락질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 혈교는 한동안 무림을 어지럽히다가 결국은 마교 정예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마교에서는 혈교의 준동을 그냥 바라볼 수 없었다.
같은 뿌리라 그들에게 포섭된 자들이 점점 늘어나 자칫 존망의 기로를 느낀 거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그럼 잘 연구해 보지요. 하하."
'아. 배고파.'
이문량과 헤어진 성진은 저잣거리에서 화과 먹기를 포기하고 빠르게 유주 객잔으로 돌아왔다.
한데 오후가 훌쩍 지난 시간인데도 객잔에서 운영하는 식당에는 손님들도 붐볐다.
'무슨 사람들이 이리도 많아, 어중간한 시간이라 음식을 싸게 파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린 성진은 손을 들어 점소이를 불렀다.
점소이가 오자 성진은 빨리 나오는 요리를 주문하고는 식당에서 제공한 차를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후루륵…….
입에 묻은 물기를 소매로 닦으려다 성진은 그만 인상을 찡그린다.
'이런 젠장, 아침에 갈아입은 새 옷인데, 이리 더러워졌구나.'
혼자 투덜거린 성진은 문득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며 실없이 웃고 말았다.
'허허, 그깟 옷 더러워졌다고 짜증을 내다니, 나도 참 많이 변했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선 그였다.
거기에다 죽은 자의 시신을 땅에 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기억은 반복되는 일상처럼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고 자신은 고작 옷에 얼룩이 묻은 것을 두고 불평하고 있었다.
'음, 이런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난 무림인 이전에 상인이라고…….'
자신의 요즘 모습을 떠올린 성진은 그제야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웅성웅성…….
한데 대부분 탁자에서 이야기하는 주제가 거의 대동소이했다.
주성진은 개중에 여자깨나 울리게 생긴 용모에 옷을 한껏 차려입은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대략 약관 정도로 보였다.
"용천아, 여기에 온 사람들이 죄다 우리처럼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 같은데."
"그러게, 네 말이 맞아. 발 없는 소문이 천 리를 간다고 하더니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모양이야. 안 그래 민규야?"
"하하. 그렇지, 그녀들을 보면 내가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먼저 말을 걸어야겠어."
그러자 민규라 불리는 자가 손을 흔들었다.
"아서라. 그냥 가까이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그녀들은 무림인이야."
"뭐라 무림인이라고! 그 이야긴 못 들었는데……."
"점심때 무관에 갔다가 관장님께 들었다고, 관장님이 그러시는데 충칭에도 미녀는 많지만, 제대로 무공을 익힌 여인은 별로 없다면서……."
용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열었다.
"음, 미인이면 미인이지. 무림인이라고 뭐 다른 게 있을까?"
"이 친구 뭘 모르는군, 그녀들은 무술로 단련된 몸이라고. 보통의 여인과는 달라."
"그래서 네가 주장하는 바가 뭐야?"
그러자 민규가 눈을 게슴츠레 뜨곤 꿈꾸듯이 말한다.
"난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인보다는 오히려 그런 여인이 좋다고."
"야, 그러다 밤마다 두들겨 맞으면……. 에이 그냥 가자, 좋다가 말았잖아."
"이봐 가긴 어딜 가, 기왕 왔으니 저녁까지 내내 죽치고 있어야지. 여긴 별실이 없으니 반드시 그녀들을 볼 수 있을 거야."
"……."
주성진은 눈을 슬며시 감고서는 자신은 어떤 취향인지 되짚어 봤다.
'전생이라면 얌전하고 자태가 고운 여자가 좋았겠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하하.'
한데 확실히 본인이 변했다고 느끼고 있을 무렵이었다.
'응, 뭐야…….'
사람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꿀꺽…….
"와 미인이다."
"와 경국지색이다……."
성진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그의 시야에 버들가지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허리와 헌칠하고도 우아한 몸매를 지닌 여인이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을 나부끼며 정면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뚝한 콧날에 당당한 자태는 그녀가 보통의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또 어디 그뿐인가, 그녀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사람들의 함성에 방긋방긋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어, 설현이네, 오늘따라 더 이뻐 보이는군, 치마를 입어서 그런가…….'
여행 내내 그녀는 활동하기 편한 가벼운 차림이었다.
성진에게 다가온 그녀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자 사람들의 시선이 성진에게 쏠린다.
부러움 반, 시샘 반…….
주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어떻게 왔어?"
"밖에 바람 쐬러 나가려는데 네가 보이더라고… 근데 옷차림이 그게 뭐야, 후줄근하잖아."
그러던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킁킁거린다,
"어휴 땀 냄새… 도자기 공방에 간다더니 아예 도자기를 굽고 온 거냐?"
"그건 아니고, 근데 왜 혼자야, 언니들은?"
"벌써 밖에 구경하러 나갔지. 나만 꾸물대다 늦어버렸지 뭐."
그때였다,
"주문 대령이오!"
점소이가 음식을 들고 다가왔다.
한데 그 순간 때마침 그가 강설현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만 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덜거덕, 덜거덕…….
까딱하면 쟁반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잽싸게 일어난 성진이 쟁반을 받쳤다.
점소이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급히 말문을 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괘념치 마시오. 눈앞에 매력적인 여자가 미소 짓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게 남자겠소, 안 그렇소? 하하."
"……."
점소이는 거듭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갔다.
주성진은 차려진 음식에 코를 박으려다 급히 관두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헤헤, 내가 점심때를 놓쳐서 말이야. 한데 안 나가봐도 되냐?"
그녀는 성진의 외모 칭찬에 살짝 고무된 상태였다.
방긋방긋 미소 지으며 답한다.
"글쎄, 나갈지 말지 고민 중이야. 야 그러지 말고 내일 하루 더 여기 머물자. 그러면 내가 말 상대 해줄게, 혼자 식사하면 처량해 보이지 않겠니?"
"그 말은 내일 구경하겠다는 뜻이냐?"
그녀가 고혹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어. 여기 옷들이 질이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몇 벌 사 입으려고 하거든, 여행길에 빨래하기도 쉽지 않으니까."
"음, 좋아, 그렇게 하자."
주성진이 시원하게 허락하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이야. 그래도 되겠어?"
"뭐 지금껏 빨리 왔으니 좀 쉬다 가자고, 하하."
사실 안 그래도 성진은 내일 하루를 투자해 취구환을 먹고 운기조식할 생각이었다.
"한데 말이야 너도 옷을 좀 사야 할 것 같은데."
"부탁 좀 하자, 대신 좀 사줘라."
"알았어,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없기다."
잠깐의 대화지만 둘은 오랜만에 단둘이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다.
순간 강설현의 말이 이어진다.
"음식 식기 전에 어서 들어."
"그래. 한데 이거 주변 시선이 따가워서 밥이 제대로 넘어갈런가 모르겠네, 하하."
"어머, 그랬어? 생각보다 민감하네, 난 아무렇지 않은데."
주성진의 그녀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화각에서 많은 손님을 상대해봤으므로 그녀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여신처럼 흠모하는 눈길의 이면에는 주성진에 대한 따가운 눈초리가 함께 담겨 있음을 그녀는 잘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주성진이 식사를 마칠 무렵이었다.
음식점 중앙의 탁자에 자리 잡고 있던 중년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곁에는 한창때, 미모가 뛰어났을 것 같은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유람객 같은 모습이었다.
하나 그들의 서글서글한 눈빛엔 이따금 한 번씩 날카로운 안광이 주위를 쓸어가곤 했다.
곧이어 그는 자리를 벗어나 성진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주성진과 강설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실례하오."
묵직한 중저음에는 항거하기 힘든 위엄이 어려 있었다.
'음, 누구지?'
'어머. 내공이 실렸어…….'
둘은 이심전심으로 다가온 자가 무림인임을 알고 경계 어린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성진은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흥취를 방해해서 미안하외다. 잠시 이야기를 청하러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소이다. 난 총무련 감찰관 이무송이라 하오."
'총무련 감찰관?'
주성진은 순간 그의 직함을 되뇌었다.
사실 주성진이 아는 총무련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것뿐이다. 감찰관이라는 직책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척 보기에도 쉽사리 무시하기 힘든 인물이 자신들을 찾아왔으니 대응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성진의 뇌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혹, 저희 중 누구에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이무송은 성진을 보며 씩 웃었다.
"하하. 처음엔 그대에게 볼일이 있었는데 저 예쁜 아가씨가 누군지 알 것 같소, 그대의 동석자에게도 관심이 생겼소이다."
그러지 강설현이 생긋 미소 지으며 끼어들었다.
처음의 경계심이 다소 엷어진 상태다.
"저를 아시나요? 감찰관님?"
"이름은 강설현, 천화각 각주의 막내딸이고 우리는 구면이지, 하하."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구면이라고요? 죄송하지만 저는……."
"아가씨가 어릴 때이니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지. 더구나 그때는 환속하기 전이라 내 모습이 좀 달랐을 거요."
그녀는 환속이라는 말에 유의했다.
'그럼, 전에 스님이었단 말인가. 아버지가 만날 스님이라면 소림사의 무승밖에 없을 텐데…….'
이무송은 그녀의 머리 굴리는 모습을 바라보니 문득 자신의 귀여운 딸이 생각났다.
'아이코, 이뻐 죽겠어. 그나저나 천화각 각주도 천금 같은 딸을 시집보내려면 배가 좀 많이 아프겠는데, 내가 남인데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이니……. 음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저 녀석의 정체를 알아봐야겠다.'
이무송은 재빠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원래 소림사 달마원의 무승이었소, 지금은 속가제자의 신분이고."
주성진은 그의 정체를 안 이상 그를 마냥 세워두기가 그랬다.
"여기 앉으시겠습니까?"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소? 그쪽이 구석이라 여기보단 이야기하기 좀 편할 것 같은데… 그리고 감찰관인 내 처자도 마저 소개하리다."
주성진은 강설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군말 없이 일어서자, 성진도 따라 일어섰다.
순간 주변의 시선들이 일제히 강설현에게 향한다.
미인을 보러 일부러 모인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들의 입에서 침이 꼴딱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강설현은 미소 짓지 않았다.
총무련의 감찰관들이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