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남궁은하의 비밀
주성진은 사양하려다 내버려 두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점소이가 벌떡 일어나 다가온다.
잠시 후 주성진은 그녀의 의견을 묻고는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늦은 밤에 수고하는 점소이에게 넉넉히 돈을 집어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술과 안주가 빠르고 푸짐하게 나왔다.
이윽고 주성진은 그녀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건배할까요?"
"짠……."
"하하. 소저의 크나큰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다만 크나큰 성취까진 아니에요, 호호."
둘은 첫 잔을 완전히 비웠다. 그리고 다시 술잔에 술이 찰랑찰랑 찰 무렵 성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의 키 높이까지 공중부양할 정도라면 성취가 대단한 것 아닌가요?"
"호호, 제 내공의 특징이 차고, 가벼움에 있다 보니 단순 비교는 곤란할 것 같은데요."
"음, 그렇군요, 아까 은안공이라 하셨죠?"
그녀는 주성진이 자신의 무공에 궁금해한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호호,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지…….'
"네, 그래요, 구음진경에 들어 있는 무공이에요. 사실 난 구음절맥을 가지고 태어난 몸이라 원래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에요. 그것뿐인가요, 이십이 넘어가기 전에 요절할 운명이었죠."
"……."
"그런데 저에게도 천운이 내려온 거죠. 세가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구음진경을 할아버지께서 발견하신 거예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익히면 익힐수록 음기가 넘쳐나, 무리하게 심법을 사용하면 외려 시전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키는데 아홉 군데의 경맥이 끊겨 있는 저에게는 그야말로 딱 맞는 심법이었어요."
"……."
"이유는 절맥으로 인해 음기의 과도한 분출을 효과적으로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렇다 해도 구음진경의 특성상 음기가 가득한 밤에 내공을 익혀야 하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에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익히지도 못할 심법을 누가 왜 만들었냐는 거였다.
"저. 남궁 소저. 그러면 구음진경은 익히면 안 되는 심법인데 왜 만들었을까요?"
"그게 아니라 구음진경은 사실 반쪽짜리 내공심법이에요. 원래는 구양음진경인데 구양진경이 없어진 거죠."
"아, 그렇군요, 허허."
순간 그녀가 잔을 부딪쳐온다.
짠…….
성진보다 먼저 한 번에 술을 비운 그녀가 음식을 먹고는 고운 입술을 오물거린다.
'귀엽군…….'
성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 과거 이야기를 했으니 소협도 지난 일을 말해주세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워낙 이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아왔기에 말할 내용은 머릿속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뺄 것은 빼고…….
"……. 이상입니다. 소저."
"호호 잘 들었어요, 가만! 그러면 가는 방향이 같은데요. 우리 일행도 성도로 가는데요."
주성진은 그녀를 만난 게 인연인가 싶었다.
"아, 그런가요? 한데 무슨 일로?"
"사천당가 가주님의 회갑연이 있어요. 저희는 그 핑계로 윗분들보다 먼저 집을 나와 실컷 돌아다녔죠. 아, 그러고 보니 지금쯤 아버지와 큰오빠가 출발했을 것 같네요,"
주성진은 아버지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소저의 아버님이 혹 가주님이신가요?"
"호호. 눈치가 대단하네요. 맞아요, 그분이 우리 아버지세요."
가주의 친딸이라면 그 어떤 직책보다도 높다고 볼 수 있었다. 주성진 속 상인의 감각이 눈을 떴다.
'잘 사귀어 놔야 해.'
"아, 가주님의 따님이셨군요. 이거 제가 앞으로 잘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
"뭐, 그런 소리 하도 많이 들어서 별 감흥이 없네요, 그런 겉치레보다는 저에겐 평생지기가 필요해요. 왜냐면 난 아이를 낳지 못하거든요. 그러니 가정을 꾸밀 수 없죠."
순간 주성진은 그녀가 가엽게 느껴졌다. 한데 느낌이 이상하다.
'음,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저런 비밀을… 혹 그녀가 내게 호감을 느끼는 것인가? 뭐 나도 딱히 그녀가 싫지 않은데……. 하면 몇 살일까?'
"하하. 그럼 친구 합니다. 나이, 성별을 초월해서."
그녀의 눈이 반짝거린다.
"정말인가요?"
"장부는 허언하지 않습니다."
"호호. 그대는 장부이기 전에 이익을 좇는 상인 아니던가요?"
"장사도 따지고 보면 사람 장사입니다. 바꾸어 말해 상호 간의 신뢰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녀가 기분이 좋은지 또다시 잔을 부딪쳐온다,
"좋아 친구, 한잔하지, 그러고 보니 서로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네,"
그녀가 자연스레 말을 놓는다.
"난 스물한 살이야. 너는?"
그녀의 얼굴에 잠시 환한 미소가 머물렀다.
"호호, 나보다 어릴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동안이었구나……."
주성진은 요즘 들어 부쩍 그런 비슷한 소리를 많이 들었다. 동안 아니면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 등등.
'확실히 내공이 느니까 겉모습도 변한 모양이야, 그래도 여기에 만족할 순 없지. 내공을 더욱더 끌어올려야 해, 강호에는 고수가 많으니까.'
성진은 잔을 단박에 비우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커어. 갑자기 술이 달아, 하하. 그런데 너의 일행은 어떻게 되냐?"
"그러고 보니 그걸 말 안 했구나. 셋째 오빠인 남궁은호와 오빠의 친구인 황보일성과 제갈성우 그리고 나와 친구인 제갈연지가 내 일행들이야. 아 등잔 밑이 어둡다고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인 백화연, 백화란 자매를 까먹었네, 사실 둘은 쌍둥이야."
주성진은 옆의 탁자에서 조용히 음식을 깨작깨작 먹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식으로 인사하겠소, 주성진이오."
"반가워요. 주 상단주님."
"반가워요……. 아가씨를 졸라서 호위 겸, 강호 구경하러 나왔어요."
"아, 그렇군요.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하하."
그 순간 남궁은하가 부연 설명한다,
"연이와 란이는 총관 아저씨의 딸들이야, 무공도 상당히 잘한다고! 지금은 날 호위한다고 얌전한 척하지만, 사실은 나 못지않은 말괄량이지, 호호,"
주성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순간 모용세가가 생각났다,
"친구, 사천당가의 회갑연에 모용세가도 오겠구나? 거기도 5대 세가니까."
"잘 모르겠어. 아마 누군가가 오겠지, 한데 그건 왜 묻는 거야?"
"그야. 내 동업자인 삼선녀가 천화각 출신이니까 그런 거지, 알다시피 두 집안은 껄끄러운 관계잖아."
"맞아, 그렇지……."
그렇게 둘은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다음 날 일찌감치 홀로 도자기 공방을 찾아 곳곳을 들러본 주성진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오늘은 시장조사 차원에서 와본 것이고 다음엔 개중 눈여겨본 몇 군데와는 반드시 거래를 터야겠어.'
원래는 삼선녀와 감전동도 같이 가기로 했으나 그들은 간밤에 만난 남궁은하의 일행들과의 여러 주고받는 이야기가 많은지라 성진만 홀로 나서게 된 것이었다.
사실 감전동을 제외하면 다들 거대 정파 출신이니 서로 새롭게 교분을 터는 일은 그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반면 성진은 남궁은하의 일행들과 저녁 식사를 약속하고는 그 자리를 일찍 파하고 원래의 일정을 소화한 거였다.
주성진의 눈에 비친 충칭의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굳이 호남성 장사와 비교하자면 충칭이 규모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었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성진은 돌연 허기를 느끼고 배를 만졌다.
'배가 고프네, 잘됐다, 맛있는 화과를 먹으러 저잣거리로 가보자고…….'
주성진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화과 잘하는 집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저잣거리로 들어서려는 순간, 그 앞의 커다란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웅성웅성…….
'뭐야, 이번에도 야바위꾼인가, 야바위꾼이든 아니든 신경 쓰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자고.'
애써 호기심을 누른 주성진은 사람들이 군집한 곳을 피해서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한데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스쳐 지나간다.
"이 도둑놈아. 곱게 죽을래, 비참하게 죽을래? 감히 내 부하들을 상해했겠다!"
어떻게 하든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주성진은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미성이지만 다급하고 처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혹 나를 도와줄 분 안 계시오. 만일 날 도와준다면 내 주머니에 가득 든 묘안석의 반을 내주겠소이다."
주성진의 발걸음이 자동으로 멈춘다.
'뭐라, 주머니에 있는 묘안석의 반을 준다고! 그러면 그 가치는?'
생각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한편으론 그가 상당히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소리쳤으리라, 혹여나 무림 고수가 주변에 있을까 해서…….
'음, 도와달라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그 전에 먼저 자초지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야겠어, 무작정 도둑을 도울 수는 없잖아.'
주성진이 가까이 다가가니 일부 겁이 많은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몇몇 병장기를 든 자들은 좀 전보다 뒤로 물러서서는 돌아가는 추이를 보려 했다.
하나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는 없었다.
'쳇, 세상 재밌는 구경거리가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는군.'
주성진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그리곤 소리쳤다.
"잠깐! 일이 어떻게 된 것이오?"
대치하던 두 사람의 시선이 주성진을 향했다.
순간 땅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두 명의 모습이 주성진의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후, 다급한 표정의 젊은 사내는 고작 약관을 넘어선 성진의 모습에 실망하는 빛이 역력해 보인다.
아마 그의 눈에는 주성진이 그저 참견하기 좋아하는 혈기방장한 애송이로 보이는 것 같았다.
반면 젊은 사내와 대척점에 있던 장년인은 주성진이 공력을 끌어올리지 않은 채 태연히 서 있는 모습이 영 거슬렸다.
뭔가 좋지 않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그는 다시 주성진을 자세히 살펴봤다.
'음, 밋밋한 태양혈, 평범한 두 눈, 얼핏 보면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저런 자일수록 조심해야 해. 그리고 그의 배낭 속에 삐죽이 튀어나온 건 분명 검일 거야.'
그는 주성진의 겉모습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더 믿었다.
기실 그는 내공이 높은 자 중에서 외양에 신경을 써 일부러 젊게 보이려 하는 자들을 많이 봐왔다.
일류급 무인에게는 태양혈이 두드러지고 두 눈에 정광이 비치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절정 급에 올라선 무인들에겐 도드라진 태양혈은 다시 밋밋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본인도 그러했으니까…….
또한 절정급의 무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평상시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는 눈빛을 지닌다는 것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장년인은 자신이 위축되었다는 사실이 심히 못마땅했다.
'내가 저놈을 너무 과대 포장하는 건 아닐까……. 그저 별 볼 일 없는 놈일 수도 있는데, 아니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그가 주성진을 험악하게 쳐다본다.
"이봐, 애송이! 볼일이나 보시지! 여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