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충칭에 도착하다
주성진은 일행들과 사천의 관문인 충칭에 들어섰다.
충칭은 장강 상류에 있는 큰 도시로 험준한 산이 사방을 둘러싼 수로 교통의 요지로 예부터 도자기 공예가 발달한 곳이었다.
일행의 선두에서 주성진과 나란히 말을 타고 있던 김남선이 감개무량한 듯 시구 한 소절을 읊조린다.
"가을밤 아미산엔 반달이 걸려 있고, 달그림자 평강강에 비쳐 강물 따라 흘러가네, 한밤에 청계를 떠나 삼협으로 향하는데, 그대 생각하나 만나지 못하고 유주로 내려간다."
주성진은 그가 나직이 읊조리는 시구를 들으며 씩 웃는다.
"하하."
그러자 김남선이 고개를 돌린다.
"이 시를 잘 아나 봅니다."
"이백의 아미산월가 아닙니까, 유주는 충칭의 옛 이름이고……."
"뭐 물어본 내가 바보로군요. 박학다식한 상단주께 괜한 질문을 했어요. 그나저나 충칭은 미인이 많기로 소문났던데 그게 정말인지 모르겠군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려다 그만두었다.
"멀리서 찾기보단 가까이서 찾아보시지요. 주변에 미인들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쳇, 이미 그녀들 보기를 돌같이 한 지 오래됐습니다. 가시가 너무 많아서요. 에이 그냥 충칭의 명물 화과나 먹으렵니다."
"매운 것을 잘 드십니까? 청정한 무당산에 자극적인 음식은 별로 없을 텐데요."
"저의 튼튼한 위장을 믿습니다. 설마하니 위장에 구멍이라도 나겠습니까? 하하."
그때였다.
달그락달그락…….
뒤에 처져 있던 감전동이 급속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멈추고 감전동에게 고개를 돌렸다.
"감 대행수, 무슨 일 있습니까?"
감전동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빨리 갈 곳을 정해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보채네요."
"아니, 왜 그런답니까? 객잔을 정하는 건 내 소관인데요."
주성진은 지금까지 빠르게 왔으니 충칭에서 만큼은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었다.
게다가 그에겐 계획이 있었다. 이곳의 명물인 도자기 공방을 찾아 사업 거리가 있을지 탐색할 예정이었다.
그러려면 공방들이 모여 있는 곳 가까이에 여장을 푸는 게 좋았다.
"그게, 아무래도 먼지를 뒤집어쓰며 지금껏 빠르게 왔으니까요."
주성진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무림의 여인들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녀들도 여염집 여인들처럼 늘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치장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허허."
"상단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그것 외에도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화산옥봉 여협께서 충칭에 미인들이 많다고 한 게 큰 자극제가 된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래요. 눈에 번쩍 띄는 미인들이 많긴 많지요."
그러자 감전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 와본 적 있습니까?"
주성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방금 전생의 기억을 말한 거였다.
"아. 그게 아니고요. 책에서 봤습니다."
"무슨 책을 보셨는지 신통방통하군요. 뭐든 책에 다 나와 있으니까요."
주성진은 지금껏 자신이 아는 것의 대부분을 책에서 본 것이라 둘러댔는데 그 점을 감전동이 꼬집은 거였다.
"하하,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귀한 책이 있답니다. 그건 그리 넘어가고 감 대행수는 충칭에 와본 적이 있지요?"
"그럼요, 여러 번 와봤습니다. 그러면 제가 객잔을 구해 볼까요?"
"네, 그러시죠. 가능하면 여기서 가까운 곳으로 알아보세요. 괜히 괜찮은 곳 찾느라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 설사 나중에 괜찮은 곳을 찾는다고 해도 좋은 소리 못 들을 겁니다."
감전종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전동은 뚜렷이 기억나는 객잔이 이곳 근처에 있었다. 음식도 훌륭하고 내부시설도 상급이었다.
또한 객잔 내에 잘 꾸며진 커다란 정원이 있어 투숙객들이 좋아했다.
'유주 객잔으로 가자, 좀 비싼 게 흠이지만…….'
그러다 잠시 멈칫거린다.
'에이, 설마 그때처럼 무림인들이 잔뜩 있진 않겠지.'
감전동이 유주 객잔에 묵었을 때 사소한 시비로 무림인들 사이에 칼부림이 일어났다.
급기야는 패싸움으로 번져 자칫 그에게도 불똥이 튈 뻔한 일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유주 객잔에 투숙한 그들은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객잔에 투숙하자마자 부산하게 움직인 그들은 피곤이 누적되었는지 모두 일찍 잠이 든 거였다.
주성진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그는 일찍 잠이 깼다.
내공이 깊어져 그런지 모르지만 요즘 들어 잠이 줄었다. 그래서 그 시각에 운기조식이나 명상을 하거나 아니면 사업구상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객잔 내 정원을 산책해볼까, 밤에 보는 정원도 나름 운치가 있지.'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온 주성진은 야간 근무 중인 점소이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정원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주성진은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주성진의 눈에 비친 보름달은 음기를 머금은 세상에 창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달은 꽉 차고 밤은 시원하구나.'
주성진은 부서지는 달빛을 한껏 맞으며 정원 깊숙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여인 둘이 그의 발길을 막고 있었다. 그녀들은 다소 초조한 표정으로 말 대신 손짓으로 주성진을 가로막았다.
처음엔 손가락을 흔들더니 그다음엔 손가락을 입에다 가져다 댔다.
주성진은 그녀들의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녀들 사이의 공간 뒤에서 운기조식 중인 인물을 발견했다.
'뭐야, 여기서 운기조식 중이었나? 이것 참 괴이한 일이네…….'
순간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 주성진은 운기조식 중인 인물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슬그머니 옆으로 미끄러졌다.
앞을 막던 여인들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리더니 다시 주성진의 시야를 방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짧은 순간 볼 것 다 본 주성진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
한데 바로 그때였다. 놀랍게도 운기조식 중인 여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뭐야, 공중부양인가…….'
앞을 가로막던 여인들의 키를 훌쩍 뛰어넘어 솟구친 그녀가 허공에서 눈을 떴다.
그리곤 넋을 잃고 쳐다보던 주성진과 눈과 마주쳤다.
'헉, 눈부셔!'
그녀의 눈과 마주친 주성진은 급히 공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가슴이 진탕되면서 그녀의 깊고 그윽한 눈으로 자신이 빨려들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 씨, 이거 색안공이 아닐까, 남자를 유혹한다는…….'
주성진은 그렇게 추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책에서 본 것을 떠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순간 그녀를 호위하던 두 여인이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짓는다.
"축하해요, 아가씨."
"부러워요, 벽을 깬 것을……."
"고마워, 한데 모르는 사람 앞에서 그리 말하면 안 돼."
두 여인이 뒤늦게 급히 입을 막는다.
주성진은 그녀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부주의한 걸로 따지면 밖에서 운기조식을 강행한 그녀가 제일이지 아닐까. 한데 호위하던 두 여인 어딘가 닮았는데, 혹 쌍둥이인가…….'
순간 그녀의 샛별 같은 눈이 주성진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 포착했다.
"이봐요. 지금 비웃은 거죠?"
주성진은 얼른 얼굴의 미소를 지웠다.
'눈치가 빠른데…….'
"아. 아니외다. 그런 거…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원 구경을 끝내지 못해서."
주성진은 그녀와 호위로 보이는 두 여인이 있는 자리를 피해 정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쉬이익.
하얀 그림자가 주성진을 가로막는다.
사실 그녀는 주성진과 일행이 객잔에 들어올 때 혼자 늦은 식사를 하고 있다가 얼핏 주성진을 본 적이 있었다.
주성진은 살짝 인상을 그렸다.
"소저, 저에게 볼일이 있습니까?"
"호호. 소협, 이렇게 만난 건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주성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통성명 정도야 별문제거리는 아니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저는 주성진이라고 하고 직업은 상인입니다."
"상인이라고요? 나의 은안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긴 사람이 상인이라고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 눈빛이 요상하다 생각했는데 무공이었어.'
"뭐, 무공을 좀 익혔습니다만……."
"그래요, 사문이 어떻게 되시죠?"
주성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댁은 누구신가요?"
"아, 저요. 저는 남궁은하예요. 남궁세가 출신이죠."
"남궁세가라고요?"
주성진은 순간 당황해서 말을 내뱉고선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궁세가의 무공 중에 은안공이라는 게 있었던가? 내가 알기는 그런 무공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호호. 제가 남궁세가 출신처럼 보이지 않았나 보죠. 혹 마교의 색녀 정도로 생각한 건가요?"
이상하게 생각한 건 맞지만 굳이 그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제가 상인이다 보니 무림에 대해선 잘 몰라서요."
"이봐요, 보자 보자 하니 나를 가지고 놀려 하는군요. 무림을 모른다고요? 그러면 아까 같이 온 일행들은 누구죠? 제가 일행을 다는 모르지만 화산옥봉 여협과 천화각의 삼선녀 정도는 알고 있다고요."
주성진은 그녀가 객잔 어딘가에서 자신과 일행을 본 걸 알아차렸다.
"음, 그들은 모종의 일로 저와 동행하고 있지요.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요. 그만 정원 안쪽으로 가 봐도 될까요?"
주성진은 꼬치꼬치 캐묻는 그녀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녀가 싫다는 게 아니라 사업 초창기라 당분간은 무림에서 자신을 주목하는 걸 피하고 싶었다.
종종 소문은 와전되기 마련이고…….
"호호, 미인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나 같은 건 성에 차지도 않는 모양이죠?"
주성진은 즉시 손을 흔들었다.
"무슨 그런 억측을… 소저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별안간 밝아졌다.
"그래요, 그럼 저와 술 한잔하실까요. 제 청을 거절하면 절 싫어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주성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음, 잘못 걸렸다. 이거 피곤하게 생겼는데.'
변명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특히 잠을 자러 가겠다고 둘러대는 건 이미 자신이 한 언행과 정반대였다. 정원 구경을 하고 싶다고 말해버렸으니…….
일사천리로 정원을 둘러본 성진은 음식점에서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호위로 보이는 여인들은 옆 탁자에 착석했다.
"고마워요, 오늘같이 좋은 날엔 수다도 떨고 술도 마셔줘야 한다고요. 사실 객실에 있을 때부터 기운이 살랑거리는 게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기왕이면 큰 효과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와 본 거였는데, 결과는 보시다시피 대만족! 호호호……."
주성진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무공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처음부터 호기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기에…….
"그렇군요. 그럼 일단 주문부터 할까요."
"네. 좋아요, 제가 한턱내겠습니다. 오늘은 저에게 기쁜 날이니까요. 더구나 시간을 내준 분에게 대접하는 건 사람의 기본 도리이지요. 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