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은발마녀와의 일전
주성진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서 은발마녀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반대편에 오던 은발마녀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회회마 녀석은 어디로 가고 저런 애송이가 서 있는 거지? 내 이 회회마 놈을 만나기만 해봐라.'
그녀는 주성진을 적수로 보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암상을 놓친 탓을 모두 회회마에게 돌리고 있었다.
회회마가 주성진에게 가로막혀 그들을 따라가지 못한 것을 모른 채…….
그녀는 한참 후에야 회회마가 없음을 간파했지만, 그때는 암상을 추격하기 바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은발마녀는 젊고 잘생긴 주성진을 보며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길, 채양보음하기 딱 좋은 녀석인데, 이젠 그림의 떡이 돼버렸으니…….'
사실 그녀는 무리한 채양보음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주화입마에 걸렸으나, 간신히 목숨을 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자신의 주안술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본래의 나이보다 더 쭈글쭈글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계속 전진하던 그녀가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대략 주성진과 3장 남짓 거리였다.
연이어 그녀는 바짝 뒤따라오던 인물에게 고개를 돌렸다.
"강 당주, 저 물건! 얼른 치워버리시오."
"네. 태상당주님, 안 그래도 분풀이할 대상을 찾고 있었는데 잘되었습니다. 좀 데리고 놀다가 끝내버리겠습니다."
"뭐. 그러든가, 말든가. 한데 회회마 이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야?"
여전히 두 사람은 주성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자극받은 주성진은 그의 결심을 더욱 굳혀갔다.
'저 두 인간은 정말 인간 말종이구나, 너희야말로 내가 깨끗이 지워주겠다.'
주성진은 검을 높이 치켜들어 검 끝으로 완월당 당주를 가리켰다.
"너! 비겁하게 부하들 내세우지 말고 직접 나와라. 다섯을 셀 동안 나오지 않으면 내가 가겠다."
그의 구레나룻이 부들부들 떨린다.
한편으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자신들 앞에 당당히 큰소리치는 성진에게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음, 설마 저 녀석 진짜 고수는 아니겠지……. 말하는 걸로 봐서는 맛이 간 것 같진 않은데.'
그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 은발마녀가 짜증스럽게 툴툴거린다.
"뭐해 강 당주, 빨리 처리하라고!"
바로 이때, 뒤에서 당주와 태상당주를 따라오던 인물 중 하나가 자신의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아, 저 인간은…….'
그는 주성진에게 붙잡혀 분골착근을 당한 자였다.
그는 다짜고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제일 뒤로 가자. 그게 좋겠어. 이유는 묻지 말고 무조건 내 말 들어……."
"허허, 참……."
이때, 은발마녀의 재촉을 받은 당주가 주춤주춤 앞으로 나왔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성진이 다섯을 셀 동안은 꼼짝하지 않다가 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움직였다.
'흥, 그래 봤자지…….'
주성진은 그 즉시 몸을 띄웠다.
'속전속결이다, 전광석화와 같이 바로 끝낸다. 내가 정말로 상대해야 할 사람은 저 여인이니까.'
"야합!"
주성진의 신형이 폭발적으로 솟구쳐오자 당주가 급히 낭아도를 집어 들었다.
순간 그의 눈에 주성진이 검지를 앞으로 펼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즉시 허겁지겁 반응했지만,
"큭……."
당주는 인상을 쓰며 크게 신음을 내뱉었다.
워낙 창졸간에 당한 일이었다.
느낌이 안 좋아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긴 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연이어 종아리 근육 전체가 뭉텅 날아가고 뼈가 부러지는 통증이 그의 온몸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그는 통증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골격이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느낌은 여타와 달리 소름 끼치기 이를 데 없었다.
"으으윽!"
그 순간에도 주성진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는 망연자실했다.
'어찌 파공성이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전설의 무음지력이란 말인가?'
죽음의 공포가 스멀스멀 밀려오자 급히 몸을 빼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아…….'
은발마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촌각 사이에 벌어진 일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그래도 고수답게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재빨리 당주에게 소리쳤다.
"멍청아! 빨리 피해!"
한데 그때였다. 당주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성진이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좋아, 그렇다면 송사리보단 대어지…….'
폭발적인 내공에 힘입어 어렵지 않게 신형을 틀은 그가 곧바로 은발마녀에게 돌진했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흐려지면서 기다란 잔상이 길게 이어졌다.
'앗!'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아니 방심했던 결과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순간, 주성진의 검지가 급격히 그녀의 동공에 들어온다.
'피해야 해!'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옆으로 이동했다.
파바박!
그녀가 위치했던 곳에 흙덩이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그것으로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성진은 그녀가 피한 곳으로 재차 몸을 튕겼다.
이번에는 천산장을 운용하며 손을 거세게 뿌렸다.
쉬쉬식!
무음장에 가까운 천산장이지만 강한 공력이 주입되니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소리 같았다.
'어어어…….'
은발마녀는 두 눈을 부릅떴다.
허공에 수많은 손 그림자가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음… 장풍에 몸이 스치기만 해도 끝장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급히 손을 비틀어 손목에 장착한 단검을 꺼내 들더니 가까이 다가온 손 그림자를 사정없이 갈라 쳐 나갔다.
슈악!
찌지직, 찌지직…….
마치 비단 폭 찢어지는 듯한 소리 같다. 하지만 좋아하긴 일렀다. 계속해서 성진의 장풍이 그녀에게 몰아닥쳤다.
"이이이……."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기를 검에 주입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단검에서 뻗어나간 검기는 중첩된 성진의 장력을 가르지 못하고 점점 밀리더니 급기야는 힘을 잃고 줄어들고 있었다.
그 사이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성진의 시야에 그녀의 모공까지도 선명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그즈음 성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하, 금나수로 손목을 낚아채야지.'
반면 그녀로서는 이런 수모가 없었다.
과도한 채양보음의 후유증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미모로 뭇 남성을 홀리고 남자들을 발아래 두며 군림한 그녀였다.
공력 면에서는 회회마도 상대가 되질 못 했다. 다만 내공의 질이 문제이긴 하지만…….
'안 된다. 이리 당할 순 없다.'
그녀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공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것이다.
지난번 후유증으로 인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이후 도저히 몸에서 융합되지 않는 이종진기를 금제했었다.
금제한 공력은 대략 전 공력의 5할이 넘었다.
그녀가 금제를 풀자마자 그녀의 피부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투두득, 투두득…….
그녀는 피부가 터지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눈앞의 대적을 해치우자는 마음뿐이었다.
피부가 갈라진 틈으로 피가 흐르고 그녀는 점점 혈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
놀란 성진은 급격한 그녀의 변화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은발마녀에게 달려갈 것 같던 그가 어느새 그녀의 기세에 가로막혀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단검에선 새빨간 검기가 다시 폭죽처럼 피어오르더니 점점 굵어졌다.
'저건 검강!'
성진으로서는 공력을 더욱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밀리면 도리어 당할 것이기에…….
그 순간 내부의 압력을 못 이긴 탓인지 그녀의 피부 틈 사이로 피와 함께 싯누런 액체가 밖으로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주성진은 불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음, 뭔가 이상해, 그녀의 피부가 갈라지는 소리도 더욱 커졌고…….'
그 순간에도 그녀의 피부는 팽창력을 견디다 못해 이제는 숫제 갈라지면서 그 밑의 근육까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곤 곧바로 그 근육도 점차 부풀어 올랐다. 전체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이거 미치겠군…….'
근육이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팽창하자 성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급기야 새빨갛게 번들거리는 근육에 전율을 느껴야 했다.
그 상황에서 그녀의 검강은 점점 강해졌고 주성진은 그녀의 검강을 밀어내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힘에서 밀린 것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측면이 더 작용했다.
그리고 한순간, 주성진의 뇌리에 위급한 신호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일종의 안 좋은 예감 같은 거였다.
'아아, 안 되겠다, 어서 몸을 피하자!'
주성진은 그녀의 몸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정말로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랴부랴 그녀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난 성진은 지체하지 않고 신형을 띄웠다.
휘이익…….
공중으로 도약한 그가 땅에서 3장 위로 솟구칠 무렵이었다. 돌연,
꽈꽝!
그녀의 몸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헉! 어찌 저럴 수가. 정말로 터져 버렸어!'
도저히 인간의 몸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굉음을 내뿜으며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잘게잘게 부서진 시뻘건 뼛조각들은 그 하나하나가 엄청난 흉기가 되어 주위를 휩쓸어 가고 있었다.
"으아악……."
"아아악…….
가장 가까이 있던 당주의 몸이 그녀의 뼛조각에 의해 몸이 관통되어 구멍이 뚫렸고, 연이어 완월당의 무인들이 비명횡사하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랴, 장원의 대문도 결국 폭발력을 견디지 못해 아예 무너져 내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중에서 아래를 내다본 성진은 몸서리쳤다.
만약 그도 가까이에 있었다면 치명상을 면치 못했을 것 같았다.
'후유, 내가 죽을 뻔했구나.'
성진은 자신이 까딱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고 생각하니 방금까지 우쭐했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좀 무공에 자신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한 생각이었어. 음, 그래서 무인들은 고수가 되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평생 무공을 단련하는 거구나.'
성진은 저 상황에서 피하지 않고 엄청난 폭발을 견딜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답은 금세 나왔다.
'그래 호신강기……. 내공이 3갑자 이상이 되어야 펼칠 수 있다지.'
그때였다.
"으으윽……."
어딘가에서 신음이 들린다.
주성진은 신음이 들린 곳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낙하했다.
그리곤 온통 얼굴에 피칠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살갗이 베이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치명상은 면한 듯 보였다.
'폭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저들을 살렸구나…….'
그 순간, 왼쪽이 있던 사내가 위를 쳐다보며 급히 입을 열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주성진은 왠지 그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아, 저자는 객잔에서 내게 붙잡혔던 자구나.'
주성진은 애당초 완월당의 일반 무사들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알겠으니 몸이나 보정하시오."
"감사합니다. 대인! 제가 초대 교주님의 동상에 직접 절은 못 했지만, 마음속으로 빌었거든요. 그 덕에 대인 같은 귀인을 만났나 봅니다."
"내가 귀인이오? 난 그대의 상관을 저승으로 보낸 사람인데."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들은 벌 받아도 쌉니다. 보물에 눈이 어두워, 가까이 있는 초대 교주님의 동상을 배알하지 않고 외면했거든요."
이 정도면 가히 맹신 급이었다.
"뭐 알겠소. 저기 그건 그렇고 주변이나 정리 좀 하고 떠나시구려.
"……."
그 말을 끝으로 주성진의 신형이 그들에게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