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회회마와의 일전
시간이 흐르고 장원에는 암흑전주와 부전주 그리고 그들의 부하 열 명이 성진과 함께 남아 있었다.
한데 주성진은 바로 조금 전 놀란 가슴을 아직도 부여잡고 있었다.
'휴, 암상이 대단하긴 대단하군…….'
성진이 경악한 건 떠나가는 천마상의 호송대를 보고 난 직후였다.
호송대는 암흑전주에 버금가는 고수 스무 명과 그 밑의 부하 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전력이라면 웬만한 거대 문파라 할지라도 하루를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들 호송대는 암상대주의 직속으로 오로지 천마상을 운송하고 보호하는 일만 수행했다.
그 외의 일에는 일체 눈길 한 번 주지 않기 때문에 암흑전주는 부득이하게 제3의 인물인 주성진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였다.
"자. 우리도 여기서 나갑시다."
암흑전주의 말에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러시지요, 한데 그들이 언제 나타날까요?"
"곧 나타날 거요. 이런……."
암흑전주가 인상을 찌푸린 순간 성진도 침입자의 인기척을 느꼈다.
침입자는 주성진과 암상의 남은 인원이 장원을 채 벗어나기 전에 횃불을 들고 장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회회마의 일행들로 천마상 호송대가 떠나는 것을 보고 그 즉시 장원으로 난입한 거였다.
그들이 점점 다가오자 암흑전주는 재빨리 성진에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회회마는 바로 저자요."
주성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뗀 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요령껏 그를 막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전주님과 휘하 여러분들도 무사하길 바랄게요."
"하하, 고맙소이다. 뭐 그대가 회회마를 잠시 막아준다면야 아무 문제없을 것이오. 내가 은발마녀를 맡고 부전주와 휘하 인원들이 완월당을 맡으면 되오이다. 그러면 탈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오."
"저, 은발마녀도 고수인데 괜찮겠습니까?"
암흑전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괜찮소, 기습적으로 암기로 공격한 한 후에 그녀를 따돌릴 것이오. 좀 비겁하다 해도 뭐 어쩌겠소, 하하."
"……."
암흑전주는 자신을 낮추어서 말했지만, 말투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럼, 나도 회회마를 상대로 시작해볼까…….'
잠시 후.
휙휙…….
"암기다, 조심해!"
팅, 팅, 팅…….
암상의 무인들이 일제히 암기를 내던지며 도망치고 있었다.
"놈들이 도망간다."
회회마는 소리를 내지르며 암흑전주와 그 일행들을 추적하려 몸을 움직였다.
'앗…….'
순간 희미한 달빛 아래 웬 인영이 빠르게 그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복장으로 봐서는 암상의 무인 같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회회마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빠르게 입을 놀렸다.
"당장 비켜라! 죽고 싶지 않으면?"
"하하 비킬 거면 애초에 여기에 나타나지도 않았소이다."
주성진이 이죽거리자 그가 눈살을 찌푸린다.
'저, 저놈이 간을 삶아 먹었나,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네놈은 누구냐? 누구길래 나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하하, 부탁을 받았소, 회회마."
"네놈이 감히 내가 싫어하는 별호를 함부로 지껄여, 당장 멱을 따버리겠다."
주성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한번 해보시오. 다만 길고 짧은 건 재봐야 알지 않겠소."
"이놈의 자식이……."
분기탱천한 회회마는 정체 모를 인간이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놈, 그때 객점에서…….'
하지만 금세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야, 내가 잘못 봤겠지, 서두르자, 어쨌든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빨리 처리해야 해!'
회회마는 곧바로 신형을 움직였다.
"죽어!"
순간 주성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휘이익.
회회마의 신형이 스르륵 연기처럼 사라진 거였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방금 차갑게 흘린 말만이 떠돌고 있었다.
주성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음, 이형환휘라… 역시 무시 못 할 고수군, 하나 나도 대비하고 있다고.'
주성진은 동체 시력으로는 어림없는 그의 움직임을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슷!
사라졌던 회회마의 신형이 주성진의 우측에서 불쑥 나타나고 있었다.
회회마의 두 눈에는 살기를 머금은 눈빛이 번쩍거렸다.
'하룻강아지 주제에 감히…….'
바로 그 순간 대지를 가르는 바람 소리가 강렬하게 터져 나왔다.
쐐애액!
주성진의 신형이 곧장 회회마를 향해 쇄도해 간 거였다.
주성진은 피하지 않고 허를 찔러 먼저 선공했다. 그 특유의 유연한 발상이었다.
거침없이 앞으로 쭉쭉 질주하는 성진의 검에서 푸른빛이 넘실거렸다.
회회마의 눈에 잠깐 당황한 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때뿐이었다. 침착하게 주성진의 공격을 바라보았다.
'흥, 알량한 검기 따위로 나를 어찌해 보겠다고!'
회회마의 미소가 짙어진 순간 그의 손가락에서 한줄기의 회색 섬광이 밤하늘을 갈랐다.
슈슈슈슉!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다.
따다땅…….
그의 검지에서 뻗어나간 한 줄기의 강렬한 강기가 성진의 검기와 맞붙었다.
"음."
"음……."
두 사람은 충격에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회회마의 놀라움이 더욱 컸다.
'저 새끼가…….'
회회마는 입술을 콱 깨물며 이번에는 벼락같이 주성진을 향해 좌수를 내밀었다.
'여기서 끝장을 본다.'
슈슈슉!
이번엔 장풍이었다. 순간 이에 질세라 주성진의 검에서도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캉, 카캉……!
마치 철판이 맞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주변에 메아리쳤다.
마음이 급한 회회마는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감히 나의 장력을 모조리 퉁겨내!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회회마는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답게 곧바로 신색을 회복하며 주성진을 노려보았다.
"놈, 좋아. 네놈의 무공을 인정하지."
성진을 깔보던 마음을 바꾼 그의 두 눈에서 강렬한 빛이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갈가리 찢어 죽일 것 같았다.
"이봐,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아. 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것!"
주성진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하하, 모든 일이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오."
주성진의 말투는 당당했다. 두 번의 격돌로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은 거였다,
회회마 입이 다시 싸늘하게 열렸다.
"그래? 그럼 잘 보아라!"
회회마의 양팔이 가슴을 가리듯 교차했다. 돌연 그의 얼굴빛도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고오오오!
쿠쿠쿠쿠!
성난 파도가 해안가를 몰아치듯 엄청난 기운이 그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사실 그는 성진에게 말을 걸면서 동시에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놓은 상태였다.
바로 그 순간,
"귀원창파!"
벼락같이 고함을 터뜨린 성진은 사방을 검기로 뒤덮으며 회회마를 마중 나갔다.
콰르르릉, 꽝 꽝…….
두 사람의 절기가 부딪치는 건 필연이었다.
무섭게 회오리치는 기운들이 서로 부딪쳐 부서지고 나면 뒤이어 또 다른 기운들이 몰려와 다시 맞붙고 있었다.
회회마와 주성진은 끊임없이 내공을 증강하고 있었다.
한데 한 사람은 양손으로, 또 한 사람은 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묘하게 점점 초식이 닮아가고 있었다.
이를 두고 만류귀종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주성진은 중첩적으로 몰아쳐 오는 상대의 장풍에 똑같이 상대를 쉼 없이 몰아치는 검식을 펼치고 있었다.
내공의 소모가 막대했지만, 이는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살벌하게 두 사람이 맞붙고 있으나 달리 본다면 두 사람은 이미 내력 대결로 접어들었는지도 몰랐다.
그 순간 놀랍게도 두 사람의 발끝에 닿은 청석들이 그대로 푹푹 패이며 먼지처럼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주성진은 자신에게 태산처럼 다가서는 무서운 압력의 그림자를 느끼며 정신을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그들의 대결은 장원을 뒤흔들며 치열하게 전개되어 갔다.
순식간에 열 합이 지나고, 또다시 열 합이 찰나 간에 지나갔다.
'육십 합, 칠십 합…….'
주성진은 속으로 부딪힌 횟수를 암기해 나갔다. 지금 사실 자신의 내력과 무공을 분석하는 중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으나 아직은 자신의 무공이 어느 수준인지 몰랐기에 그러는 거였다.
하나 열세에 몰리면서도 그러고 있다면 미친 짓이지만 주성진은 점차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반면 회회마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간다.
'음, 도대체 저놈의 내공은, 게다가 저 날카로운 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오늘 밤의 일전이 길보다 흉이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불길한 생각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급격하게 자신감이 떨어져 갔다.
자신감의 결여는 곧바로 투지의 상실로 이어졌고 이는 곧 전력의 약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져 버렸다.
'으으윽, 안 돼!'
잠깐 사이에 대결장 주변은 성진의 검기로 뒤덮였고, 자신이 쏘아낸 장풍은 성진의 귀원창파에 밀려 힘을 읽어가고 있었다.
둘은 일정한 거리를 격하고 대결을 펼치고 있었으나 한순간에 기운 균형추로 인해 그들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주성진이 거침없이 전진한 거였다.
회회마는 전율하고 말았다.
'아, 이럴 수가…….'
주성진이 그에게 짓쳐오자 그는 만 근 바위에 짓눌리는 듯한 중압감을 느꼈다.
곧이어 주성진의 기운들이 성긴 그물이 되어 그의 전신을 꼼짝달싹 못 하게 조여 버렸다,
'아, 아 끝이다.'
그는 신음했다.
반면 승리를 목전에 앞둔 주성진의 얼굴에 순간 갈등이 어렸다.
'목숨을 끊어야 하나, 살려줘야 하나, 음……. 암흑전주가 행실이 좋지 못했다고 했으나 내가 보기에 그건 약하게 표현한 것이고 저자는 살려두면 두고두고 해악을 끼칠 인물인데…….'
주성진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고통 없이…….'
휙!
한줄기 강렬한 검강이 솟구쳐 나오더니 회회마의 장풍을 뚫고 곧바로 그의 왼쪽 심장을 관통해버렸다.
"큭……."
회회마는 눈을 부릅뜬 채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잘 가시오, 그대의 몸은 내가 잘 묻어드리리다.'
얼마 후,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고 장원을 막 빠져나온 주성진은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쉬이익…….
'음, 이건 단순히 바람 소리가 아니야. 누군가가 경공을 펼치는 소리라고, 어! 점점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
전신에서 경보가 울리자마자, 성진의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온몸의 혈류가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얼굴 윤곽이 성진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저들이 다시 돌아올 줄이야, 어떻게 하지? 저들을 피해 우회할까?'
머릿속 한편에서는 귀찮은데 그러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 적의 숫자가 좀 많긴 하지만, 그다지 두렵지는 않구나. 내친김에 오늘 밤 정파의 협객이 되어 볼까나!'
회회마의 싸움에서 자신감을 얻은 주성진은 은발마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전력을 다하지 않고도 회회마를 이겼기 때문인데, 거기에 더해 그의 애검은 그 자체로 보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은연중에 고수의 풍모를 내비친 그는 하수가 아무리 수적으로 많다 해도 더는 숫자에 기가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