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사라진 청월무녀도가 나타나다
강동휘가 공력을 크게 일으켜 가까스로 무형 진기를 벗어났을 때, 이번에는 노인 옆의 청의 사내가 갑자기 출수했다.
그의 두 손에는 어느새 날이 새파란 두 자루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쉐애액!
두 개의 단검을 양손으로 휘두르며 덤벼들었으며 그 순간, 마치 삼사십 개의 단검이 한꺼번에 강동휘를 공격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그것은 당연히 공격자의 손놀림이 그만큼 빨라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룻강아지 녀석 같으니라고!'
이를 갈아붙인 강동휘는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청의 사내의 단검이 덮쳐드는 순간 역시 그의 양손도 비슷한 숫자로 늘어났다.
그의 양손은 일일이 청의 사내의 단검과 마주치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서의 변화는 너무도 빨라서 제삼자가 눈으로 움직임을 관찰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다만 맨손으로 병기를 들고 있는 청의 사내의 공격을 받아내는 강동휘의 무공은 그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때 청의 사내는 자신이 병장기를 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격분하여 공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 순간, 이제까지 묵묵히 아무런 말도 없던 노인이 느닷없이 빠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청록아, 되었다, 그만하고 물러나라, 아직 너는 저놈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청록은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순한 양이 되어버렸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더니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강동휘는 노인이 모처럼 입을 열었기에 다소 긴장하여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
"더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 썩 물러가라."
"선배님, 그러지 말고 제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살짝 보기만 하겠습니다."
이강익의 하얀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음, 저놈이, 내가 청월무녀도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온 것 같은데, 어찌 알게 된 거지?'
"네놈이 정녕 목이 떨어지고 싶은 거냐, 알았다,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지."
이강익은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그러지 마시고 청월무녀도를 좀 보여주십시오."
"이놈이!"
그 순간 주성진의 목이 학처럼 길어졌다.
'뭐라, 청월무녀도! 송나라 멸망 때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그게 다시 나타났다고…….'
청월무녀도는 송나라 황제들이 대대로 귀하게 여기는 보물이었다.
그림 속에는 인세에 보기 힘든 아름다운 무녀가 그려져 있는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림 속의 무녀가 눈물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그림이라고 했던가…….'
주성진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이때, 이강익은 금방이라도 출수할 것처럼 하다가 돌연 행동을 멈추었다.
'가만, 저놈이 감히 내 앞에 떨거지들만 데리고 나타날 리는 없는데.'
"나타나라!"
돌연 객잔의 입구 쪽에서 한줄기 중저음의 음성이 들려왔다.
"눈치는 여전하군, 이강익, 이렇게 빨리 우리를 불러내다니 말이야. 하하."
휘이익…….
어느새 객잔의 입구 쪽에는 새로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칙칙한 회색 옷을 입은 노인과 은빛 머리칼로 뒤덮인 노파였다.
주성진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들의 인기척을 탐지한 순간 그들이 가까이 출현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고수들이다.'
주성진은 그다지 크지 않은 고을에서 연거푸 고수들을 보게 되자 잔뜩 긴장했다.
이는 비단 주성진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배낭 속에 넣어둔 무기를 언제든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돌연 나타난 두 명은 흡사 미끄러지듯이 움직였기 때문에 불과 잠깐 사이에 이미 이강익의 1장 밖에 이르러 있었다.
조금 전에 입을 열었던 노인이 이강익을 바라보았다.
이강익도 그들이 만만치 않은지, 시종 여유롭던 표정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하 이강익, 오랜만이다. 네가 여기에 나타날 줄 알았다, 모레가 행운이 깃든 날이니까 말이야."
"회회마, 네놈이 은발마녀와 같이 왔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너희들은 언제나 나의 아래였다."
"흐흐 이강익, 우린 한때 같은 배를 탄 사이지 않냐, 그러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가진 것을 좀 보여달라."
이강익은 음산한 시선으로 회회마를 주시하다 말문을 열었다.
"만일 내가 응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취하겠다는 거냐?"
회회마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권주는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는 건가? 보기만 하겠다는데 뭐가 대수냐?"
"보기만 하겠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이봐, 이 좁디좁은 마을에 신교의 후예들로 꽉 차 있다고. 우리가 소문이라도 내면 넌 절대 산목숨으로 여길 빠져나가질 못해."
그 순간 은발마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정말 일각 동안만 청월무녀도를 보겠다, 그뿐이다."
"네년이 짧은 순간 청월무녀도의 비밀을 풀겠다고, 하하."
"네놈의 쭈그러진 면상을 보니 너도 비밀을 풀지는 못한 것 같은데, 잠깐 본다고 뭔 대수냐?"
둘은 서로 날카롭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이었다.
펑!
"엇."
"앗……!"
순간 실내에 메케한 연기가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일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놀라 부르짖는 찰나, 어느새 이강익과 그의 일행은 뒤쪽의 벽면을 뚫고 사라지고 있었다.
"하하하, 고초탄(苦草彈)이다! 호흡을 멈추는 게 좋을 걸, 컬컬."
이강익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예의 그 두 명의 노인들도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일순 크게 허둥거린다.
"콜록콜록!"
"빠져나가자, 어서!"
강동휘가 입과 코를 가린 채 소리치자 그들은 대오를 정렬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실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주성진의 일행들도 놀라긴 했으나 다소 거리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었다.
날렵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 약속이나 한 듯이 반대쪽으로 피신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그 순간 주성진은 제일 마지막으로 객잔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완월당의 무리 하나를 붙잡아 놓고 점혈한 상태였다.
"이봐, 일행들을 따라가고 싶으면 빨리 내 말에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누구냐, 넌?"
"허허, 이놈 봐라!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니까, 아니면 분골착근의 맛을 보여줄 테다."
그러자 그자가 완강히 고개를 젓는다.
"흥, 내 입에서 아무 소리도 못 들을 것이다."
그는 주성진이 어렵다는 분골착근을 시전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위협하려는 수작으로 본 것이다.
"뭐, 할 수 없지, 분골착근을 당하고도 그리 나올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주성진은 그의 아혈을 점혈한 후에 곧바로 혈도를 짚었다. 서슴없이 분골착곤을 시전한 거였다.
"으으읍……."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을까? 잠시 후 말 그대로 뼈가 갈리고 살이 짓이기는 고통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입을 쩍 벌린 채 눈을 부릅뜨는 것뿐이었다.
죽음보다 두려운 고통에 그의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선다,
주성진은 그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살피다 분골착근의 수법을 거두고 아혈을 풀었다.
"헉헉헉……."
"이봐. 몇 가지만 물어보겠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대답할 거야, 말 거야?"
그가 처음과 달리 잔뜩 두려운 표정으로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열흘은 굶은 듯 그의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네, 뭐든지요……."
주성진은 빠르게 입을 놀렸다.
"좋아, 우선은 말이야 행운의 날이라는 게 뭐지?"
"그건, 초대 신교 교주님께 제를 드리는 날입니다. 교주님의 원본 동상에 절을 하면 1년 동안 행운이 깃든다는 속설이 있거든요."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신교 교주라면 설마 천마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 말하면 부정 탑니다, 1년 한 해 제수 옴 붙을 겁니다."
주성진은 급히 말투를 수정한다. 장사치치고 미신을 거역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미신을 믿는다기보다는 그 찝찝함이 싫은 거였다.
"좋아, 말을 고치지. 그러니까 신교 교주님께 제를 지낸다는 말이지? 한데 동상이면 동상이지, 원본 동산은 뭐지?"
"그건 초대 교주님이 직접 만든 동상이라서 그렇습니다."
"뭐야, 본인이 직접 자신의 동상을 만들었다, 그 말인가?"
그가 고개를 끄떡인다,
"네, 도구 없이 오로지 본인의 기운으로만 만든 동상이라 합니다. 혹자는 그래서 동상에 신령이 깃들어져 있다고 믿고 있지요."
"음, 그런가……. 그렇다면 교주님의 동상이 이곳 근처에 모셔져 있는 모양이군."
"그건 아닙니다. 동상은 암상이 소유하고 있어요. 올해는 이곳에서 제를 지내는 것뿐이에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주성진은 전생에 그의 부친에게서 들었던 암상이 생각났다.
'어둠의 상인이라, 밤을 지배하는 자들…….'
주성진의 눈이 반짝거린다.
'잘하면 암상을 만날 수 있겠는데…….'
"이봐. 누구나 제를 지내 곳에 입장이 가능한 것인가?"
"그건 아니죠, 신공을 익힌 자에 한해서랍니다. 간단히 신공을 익혔는지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다."
그는 주성진이 마교 출신이 아님을 확신하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니까 마공, 아니 신공을 확인할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기를 역행으로 돌리고도 멀쩡하면 신교의 후예라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또 하나, 암상이 파는 물건 중 하나 이상을 반드시 사야 입장이 가능합니다."
주성진이 아는 상식으로는 기를 역행으로 돌리는 건 스스로 주화입마 당하겠다고 자원하는 꼴이었다.
"음, 그렇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지, 청월무녀도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비밀도 아니지요. 청월무녀도에 보물 지도가 그려져 있다고 예부터 소문이 파다합니다."
주성진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보물지도라고? 한데 그걸 잠깐만 본다고 알 수 있다는 거냐?"
"그게… 저는 잘 모르겠지만 방법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방법이 있다고?'
주성진은 청월무녀도에 흥미가 더욱 끌렸다.
'음, 보아하니 이자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알았다. 풀어줄 테니 가라. 단, 오늘 있었던 일을 누설하면 그땐 분골착근이 아니라 능지처참을 해줄 것이다."
그가 간절한 눈빛을 성진에게 보낸다.
"그건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오늘 일을 저에게 들었다는 말을 그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어서 가봐."
그가 사라지고 바로 직후 감전동이 찾아왔다.
"어디에 계신가 했더니 여기에 계셨군요. 지독한 고초탄입니다. 아직도 메케하니."
"한데 고초탄이 뭡니까?"
"화약에 마비산과 매운 고춧가루를 섞은 것이지요. 구하기 쉬운 건 아니랍니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단 어디 주변에 농가나 알아봅시다. 돈을 주면 밥과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 있을 겁니다."
"네, 안 그래도 제가 그리 말을 할 참이었습니다. 더구나 마교 출신의 고수들이 출현했으니 이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입니다. 그들과 엮여봤자 좋은 게 없으니까요."
"감 대행수는 그들을 잘 아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