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비단상인과의 만남
"이놈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두 놈을 추적하십시오."
장사치가 주성진에게 던진 말이다.
"할 수 있겠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날개 꺾인 저자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지요."
"하하, 알았소이다."
주성진은 그에게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곤 신형을 앞으로 쭉 뽑았다.
휘익!
그것은 바로 이형환위의 신법이었다. 형을 옮겨 위치를 바꾼다는 이형환위는 무림인이면 그 요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익히 알려진 신법이었다.
하지만 찰나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비집으며 성진처럼 능란한 몸놀림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형환위의 진가는 내외공이 조화를 이루어야 진가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이는 내공의 많고 적음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서 꾸준히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거기 서라!"
주성진은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하나 그들이 성진의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그저 죽으라고 도망칠 뿐…….
하나 그들과 성진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들은 항복하거나 성진과 한바탕 드잡이하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헉……!"
"어!"
그들이 놀라고, 동시에 성진도 놀랐다.
순간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누구지?'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도망자들 앞에 나타난 거였다.
도망자들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길이 차단되었으니 되돌아서 성진을 밟고 지나가야겠다고 판단한 거였다.
패애앵……!
강한 바람에 옷자락이 심하게 떨리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어느새 야바위꾼들이 옷 속에 감췄던 유엽도를 들고 성진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아니 저건 유엽도 아닌가?'
유엽도는 주로 군사들이 지니고 다니는 도로써 손잡이와 도신이 버드나무 잎의 모양처럼 휜 게 특징이었다.
순간 성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들의 도에서 살기를 읽은 것이다.
'저것들이! 날 뭐로 알고…….'
주성진은 곧바로 발검해서 검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그러자 검신을 타고 성진의 기운이 노도같이 밀려갔고, 곧바로 덮쳐오는 유엽도의 기세를 휘감더니 두 개의 유엽도를 동시에 주춤하게 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헉!"
"이런!"
둘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거센 충격이 밀려와 그들의 호흡을 여지없이 뒤흔들어버린 순간이었다.
성진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들끓었던 노기를 가라앉혔다.
백주대로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피를 보기 싫었던 거였다.
"이봐! 도를 내려놓고 빨리 항복하시지?"
성진이 공격을 멈추는 바람에 충격은 그들에게 거푸 이어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들은 두어 걸음씩 물러서서 거칠었던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휴……."
그 순간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한쪽은 고개를 흔들고 한쪽은 고개를 끄떡인다.
뭔가 뜻이 맞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인 자가 돌연 고함을 크게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야합!"
무모할 정도의 정면 공격이었다.
주성진은 검봉을 미간까지 끌어당겼다가 수직으로 짧게 내려쳤다.
쉐액!
섬뜩한 파공성을 동반한 예기가 유엽도가 뿌리는 기세의 한복판을 뚫고 들어갔다.
주성진을 향해 일격필살의 공격을 감행한 야바위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한 기운이
감돌자 몸을 떨었다.
자신의 도기를 일수에 갈라버린 성진의 검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휴, 어찌 이런 곳에 저런 고수가…….'
야바위꾼은 못내 억울한 듯 하늘을 한번 쳐다보더니 눈을 감았다.
팅!
그는 도를 놓아 버렸다. 곧 두 조각으로 갈라질 몸을 상상하며…….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성진이 검을 거둔 거였다.
팅!
그 순간 엉거주춤, 그 광경을 보던 자도 따라서 도를 떨어뜨렸다.
그는 제일 처음 성진에게 말을 건 자였다.
성진은 곧바로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점혈했다.
그리곤 곧바로 그들과 말을 섞으려다, 지켜보던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자 그만두었다.
잠시 후. 무리 중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색 무복이 돋보이는 자가 성진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주성진이 자신이 본 용모파기보다 더 영준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주 대행수죠?"
주성진은 살짝 놀라며 고개를 끄떡였다. 처음 보는 자가 본인의 직함을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날 어찌 알지?'
"네, 그렇습니다만……."
"하하. 이야기 많이 들었소이다. 난 천화각의 부총관인 이계립이라 하오. 그간 총무련 무림대회를 참관하고 왔더니 요 동네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소이다."
성진은 자신을 빗대어 저리 말한다는 걸 눈치챘다.
'말투를 보아서는 잘 모르겠네, 설마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렸다고 저리 말하는 건 아니겠지…….'
"반갑습니다. 주성진입니다. 제가 어쩌다 보니 이곳 건달들을 몰아내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불편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하하. 건달들을 싹 몰아낸 건 정말 잘한 일이오. 덕분에 휴가에서 돌아온 부하들과 이곳 포구에 나들이하지 않았겠소? 오는 날이 장날이었지만……."
"아아, 그러시군요. 그럼 오늘 일에 대해선 잘 모르시겠군요."
그가 고개를 끄떡이자 주성진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 이상입니다."
"잘 들었소, 우리가 저들의 신병을 인도해가도 되겠소?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으니까."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장사는 어쨌든 천화각의 영역이었으니까.
"네, 그러십시오."
잠시 후 이계립의 일행들이 수적 출신 도망자들을 데려가고 구경하던 이들도 자신들의 돈을 되찾고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주성진과 장사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성진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비단 장사를 하나 봅니다."
"네, 그렇습니다, 아까 언뜻 들으니 대행수님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하하. 원래는 무림 출신인데 뜻한 바가 있어 사업을 해보려고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랍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면 상단주가 되셔야지, 왜 대행수라고……?"
"아, 그건 차차 그러려고요. 다 계획이 있답니다, 하하."
그 순간 그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저, 혹 비단을 취급해볼 생각은 없으신지요? 제가 사천 성도촉금 중에서도 최상품인 칠채 비단을 가지고 있거든요. 만일 대행수님이 제가 가진 걸 모두 사신다면 도매가격에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성도촉금은 남경의 운금, 소주의 송금, 광서의 장금과 더불어 중원 4대 비단으로 유명한 비단이었다.
"그러면 이윤이 적어질 텐데요."
"하하, 제게 사정이 있어서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실 주성진은 비단을 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럼 한번 볼까, 저 장사치가 나를 속이지 않는다면 거래를 해도 좋을 것 같은데, 특히 조선에서는 촉금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하, 그럼 저의 거처로 가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아, 그전에 저는 주성진이라 합니다."
"아. 네. 저는 유가장 출신의 유비환이라고 합니다."
유비환을 데리고 거처로 온 주성진은 그의 커다란 봇짐에서 꺼낸 비단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들여다본 주성진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흘렀다.
'음, 그의 말이 맞는군, 최상품이야.'
"얼마에 팔겠습니까?"
"비단 한 필당 은자 10냥을 받겠습니다, 물론 도매가격입니다."
그가 부른 가격은 주성진의 기대치와 엇비슷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격이 변한 게 없군, 저 가격이면 남는 장사야.'
"알겠습니다. 제가 운 좋게 좋은 비단을 얻게 되었군요. 한데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될까요?"
별다른 밀고 당기기 없이 비단을 팔게 되자 유비환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럼요, 제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헤헤."
농담이지만 뭐든 물어보라는 말에 주성진은 빙그레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제가 다량으로 매입한다면 이 가격보다 싸게 줄 수는 있습니까? 음 가령 오늘 가져온 것에 100배 이상 말이지요."
그가 화들짝 놀란다.
"정말입니까?"
"네, 농담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용의가 있습니다. 단 품질이 보장된다면요."
"하하, 그건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저희가 직접 비단을 가공하니까요. 그것뿐만 아닙니다, 저흰 뽕밭도 직접 소유하고 있답니다."
주성진은 그를 그저 무공을 좀 아는 장사치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의자를 바짝 당긴 그가 입을 열었다.
"하하, 사업을 크게 하나 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성도에서 세 번째 안에 드는 규모랍니다. 물론 제 소유는 당연히 아니고 아버님 소유지만요. 만약에 직접 성도에 오셔서 비단을 사 간다면 더 낮은 가격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업을 이어받는 위치라 그 정도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직접 오라고 한 건 왜 그렇습니까?"
"요즘 곳곳에 수적과 산적들이 날뛰고 있어서 표국에 의뢰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운임이 오른 것이야 그렇다 쳐도 표국이 워낙 바빠서요, 제 생각에 주 대행수님의 무공 실력이라면 표국을 거치지 않고 사람을 구해 직접 운송해도 될 것 같은데요."
주성진은 순간 이 기회에 표국업을 해볼까 생각했다.
'음, 당장은 아니더라도 한번 해봐? 어차피 비단을 사러 한번은 사천 성도에 갔다 와야 하니, 내 눈으로 직접 상황을 알아봐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아이코, 너무 시원시원하십니다. 제가 주 대행수님을 만난 게 일생의 행운인 것 같습니다."
"하하, 아니지요, 저야말로 행운이지요. 그런데 왜 사천 상단과는 거래하지 않습니까?"
사천 상단은 중원 5대 상단 중 하나였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천 상단 놈들과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나쁜 놈들입니다, 갑질도 그런 갑질이 없다니까요. 해서 아버님께서는 대안으로 휘주 상단과 거래를 트려고 해요. 싫어도 거대상단과는 어쩔 수 없이 거래해야 하니까요. 그들이 큰 물량을 소화해 주니 말입니다."
주성진은 휘주 상단이 그의 입에서 거명되자 내심 놀랐다. 그러면서 휘주 상단과의 거래는 어떡하던 막고 싶었다.
"음, 휘주 상단과는 거래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상단주라는 놈이 악질 중의 악질입니다. 제가 휘주 출신이라 잘 알아요."
"네……?"
주성진은 기회다 싶어 상단주에 대한 나쁜 인상을 그에게 심어 놓으려 열을 올렸다.
"그놈은 젊은 시절 잘나가는 선배를 사지에 몰아놓은 장본입니다. 게다가 모용세가와 손을 잡고 있어, 여차여차해서 수틀리면 모용세가의 힘을 동원할지도 모릅니다. 사천 상단이 살쾡이라면 그들은 늑대 그 자체입니다."
"아, 그래요, 정말 몰랐습니다, 빨리 아버님께 알려 드려야 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