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두 여인을 새 식구로 맞이하다
주성진에겐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그건 바로 복수의 완성, 형산파의 부흥, 그리고 중원 최고의 거부가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걸 이번 일로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 기왕이면 돈 많은 상인이 아니라 만인에게 칭송받는 상인이 되어보자고!'
성진은 비록 가는 길이 험하더라도 꼭 그리하리라 다짐했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성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알겠소, 한데 창고는 어디에 있소이까?"
"바로 저곳입니다."
주성진은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은 성진이 계단을 타고 내려온 바로 그쪽이었다.
'아, 저기에 있었군.'
잠시 후, 옷을 입은 여인들이 보는 앞에서 첫 번째 금고가 열렸다. 사실 금고는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다.
그녀들은 지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무슨 칼바람이 일어난다 싶더니 불꽃이 튀고 그다음엔 자물쇠가 싹둑 잘려 나간 거였다.
성진은 금고문을 열었다.
'허허…….'
금고 속에 수북이 들어 있는 건 둘둘 말려진 서류 뭉치였다.
"소저와 아버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아버지는 천우진이고 저는 천상하입니다."
성진의 눈길이 다른 여인에게도 돌아갔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강윤길이고 저는 강아람입니다."
성진은 맨 위의 것을 집어 들어 서류를 펼쳤다.
'이건, 아니군.'
서류를 계속 뒤지니 대략 8할은 금전소비대차 계약서와 보증인과 담보에 관련 서류들이었고, 2할은 금전소비대차 계약서와 그녀들과 같은 신체 포기각서였다.
성진은 계속 서류를 계속 펼쳐나갔다. 얼마 후, 두 사람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찾았군, 그녀들의 말이 맞았어.'
"그래 갈 곳은 있소?"
두 여인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처연한 미소를 짓는다.
천상하가 성진을 바라보았다.
"사실 저희는 갈 데가 없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원래의 고향으로 떠났어요, 흑흑."
"그러면 날 따라가겠소? 아 아니지, 먼저 나를 소개하겠소. 대신 오늘의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시오. 나도 그대들이 당한 일을 죽을 때까지 함구하겠으니."
"……."
성진은 그녀들에게 자신의 내력과 하고자 하는 일을 대략 말해주었다.
"이상이오, 그리고 날 따라가더라도 앞으로 3년 후에 그대들이 원하면 언제든 떠나게 해주겠소이다. 물론 노잣돈도 듬뿍 줄 것이요."
성진이 그녀들에게 3년을 이야기한 것은 본인의 신분이 탄로 날까 봐 염려한 거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불룩 솟은 커다란 배낭을 앞뒤로 멘 성진이 두 여인과 함께 지붕 위에 서 있었다.
꼬끼오……!
새벽이 오려는 듯 어딘가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성진은 창고 안에 들어 있던 검과 기타 물건들 그리고 또 하나의 금고에서 발견한 서류와
전표 뭉치를 모조리 챙긴 상태였다.
더는 들어갈 데가 없자, 금전소비대차 계약서 등은 후일 태워버리기로 하고 그녀들에게 보관을 맡겼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눈을 감고 절대 소리를 내지 마시오, 알겠소이까?"
"네, 네."
성진은 양손으로 두 여인의 가냘픈 허리를 붙잡고 비조처럼 날아올랐다.
순간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후후, 군산채와 안 좋았던 사이가 더욱 벌어지겠지…….'
성진은 죽은 자의 손가락에 그의 피를 묻혀 바닥에 군산채라는 글자를 남겨둔 거였다.
꽝, 꽝…….
문을 연 장칠이 깜짝 놀란다.
"누구세요?"
"누구긴 나요, 주성진."
끼이익…….
장칠이 문을 열고 빼꼼히 쳐다본다.
"산책하러 갔다가 오셨나요? 어라 웬 짐이, 어, 저분들은……."
성진은 당황하며 허둥대는 장칠을 바라보았다,
"내가 다 이야기할 것이니 일단 조반부터 먹읍시다,"
"아, 네. 그럼 제가 후딱 음식점에 시키고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5인분이네요, 헤헤."
그 순간 감전동이 2층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밤에 어딜 나가는 것 같았는데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하하. 몰래 나간다고 나갔는데 감 행수는 기척을 느낄 줄 알았습니다. 어디 갔는지 궁금하지는 않았습니까?"
"전 그냥 천화각에 간 줄 알았지요."
"하하. 자,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모입시다. 미안하지만 감 행수는 이 두 분께 임시 거처를 안내해 주세요."
성진이 새로 거처로 삼은 건물은 2층으로 전에는 객잔이었지만, 장사가 별로여서 주인이 성진에게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난 건물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간단히 인사를 끝낸 그들은 조반을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성진이 데려온 여인들도 있고 해서 분위기가 어색했다.
이를 본 성진이 한마디 거든다,
"자, 자. 편하게 식사합시다. 이제 매일 같이 볼 식구들인데."
"네, 네……."
성진은 말을 하면서 앞으로 두 여인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것 참……. 일단 식사를 마치고 그녀들의 집안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군.'
그 순간 천상하가 성진을 바라보았다.
"저, 주 대행수님, 할 말이 있어요."
"편안하게 말씀하시오."
"아까 아람이와 이야기를 했는데 앞으로 식사 준비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성진은 손을 흔들었다,
"고마운 말이긴 한데 그건 좀 있다가 다시 거론합시다, 우선은 밥부터 드시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그들은 한데 모여 차를 들고 있었다.
성진은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자, 내가 간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겠소이다."
성진은 머릿속으로 정리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자 이것으로 마치겠소."
대부분 말은 진실이지만 딱 한 가지만 사실을 각색했다.
그것은 여인들이 몹쓸 일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은 수적에게 욕보임을 당하려는 순간 자신이 구했다고 한 말이었다.
그 건으로 사건을 정리한 성진은 재빨리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두 분 소저는 무슨 일을 잘하는지 말씀해 주겠소? 잘하는 분야가 있다면 그 일을 맡길까 하오."
천상하와 강아람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천상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장부를 작성할 줄 압니다. 아버지가 큰 포목점을 운영하셨기에, 어릴 적부터 그 일을 도맡아 해왔답니다. 어머니는 어린 남동생들을 키우느라 가사와 육아만 전담했고요."
"그렇소? 그럼 부친의 사업에 대해 잘 아시겠소?"
성진의 말에 천상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 부친이 사기만 안 당했다면 그럭저럭 굴러갔을 겁니다.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거래를 꾀하려다 큰 사달이 났었지요. 비단을 대량으로 주문했는데, 실제 온 것은 비단이 아니라 무명천이었습니다."
"……."
"믿었던 고향 친구에게 속았던 것이죠. 문제는 비단을 대량으로 주문하다 보니 가지고 있던 돈이 모자라 전장에서 빌리고, 그것도 모자라 고리의 사채를 쓴 게 화근이었습니다."
"알겠소, 앞으로 장부 정리를 맡길 생각인데 어떻소? 물론 그 전에 실력을 확인해야겠지만……."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겠소, 시험에 합격하면 앞으로 천 서기라고 부르겠소, 그럼 강아람 소저는?"
강아람은 큰 눈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저는 배의 축조술에 대해 남들 못지않게 잘 압니다. 아버지가 배를 설계하는 분이셨거든요. 장사에서 알아주는 분이셨는데 그만 어느 날 도박에 빠져서……."
"음, 여인의 몸으로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가 들어오면서부터 집에 있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있는 곳에 늘 나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반대하시던 아버지도 제가 사소한 수발부터 일을 조금씩 거들어 주니까 마음이 점차 바뀌었어요. 그러면서 고급기술도 가르쳐 주셨지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면서도 당장 그녀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에 빠졌다.
'어쩐다, 그래 도박 한번 해보자고, 나도 내 배를 가져보는 것으로 하지 뭐.'
"일단 작은 배를 설계해서 인부들을 부려 직접 만들어보시구려, 합격하면 감독관으로 고용하고 싶소. 배를 무작정 만들 건 아니니까. 나중에는 배 대신 수레나 마차를 제작하는 일에도 참여하길 바라오, 공부가 필요하면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이다. 호칭은 천 서기와 같이 강 서기로 부르겠소이다."
그 순간 천상하가 손을 들었다.
"그래도 음식은 직접 해 먹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뭐, 그럽시다. 그럼 직접 하지는 말고 사람을 고용할 테니 두 사람이 알아서 잘 관리토록 하시오."
주성진은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에게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천화각 점소이의 등장으로 그 일은 수포가 되고 만다.
이는 천화각의 전갈 때문이었다. 사실상의 호출과 마찬가지였지만 성진은 군말 없이 점소이를 따라나섰다.
지금 상황에선 본인의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때를 기다리는 게 현명하다는 건 누구보다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반 시진 후, 성진이 도착하자 삼선녀와 총관이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강설주가 요염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본다.
"어서 와, 동생, 오라고 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언제든 달려와야죠, 하하."
"다름이 아니고 긴히 할 말이 있어서야. 이 일은 내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그녀가 거창하게 운을 떼자 성진은 눈을 치켜떴다.
'서두가 요란하네, 무슨 일이지?'
"지금부터는 공식적인 대화니까 격에 맞게 말하겠어요."
"아. 알겠습니다. 강 지부장님"
그녀의 공식 직함은 장사지점의 지부장이었고, 그녀의 동생인 강설주와 강설현은 각각 부지부장이었다.
그녀는 성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관해 성진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전에 강설현에게 들었던 휘주 상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주성진은 꾹꾹 눌러놓았던 원한과 복수심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제길, 저놈의 이야기만 들으면 나도 모르게 열이 뻗치니 원…….'
성진은 얼른 눈을 내리깔고 분을 삭였다.
"주 대행수 왜 그래요? 제 이야기가 지루한가요?"
주성진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배가 더부룩해서 말이죠."
"급체한 모양이군요. 그럼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게요."
"……."
잠시 후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주성진이 데릴사위 후보감이란 말만 쏙 빼고…….
격동과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른 주성진은 강설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일단 형식적이나마 제안을 수락해야겠다.'
"좋은 제안 감사합니다. 덕분에 사부께 좋은 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무엇보다 기쁩니다."
좋은 소식은 형산파의 무공 복원에 관한 것이었다.
"호호, 우리의 제안을 수락해서 고마워요,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지금 정답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 대행수는 사업을 보는 안목이 있으니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을 것 같은데요, 호호."
성진은 그녀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후후, 내가 천화각의 꼭두각시가 될 수는 없지. 난 휘주 상단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지금의 상단주와 모용세가를 몰아내고 휘주 상단을 되찾는 게 나의 목표이거든. 휘주 상단에 타격을 입히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그렇다고 빈털터리가 된 휘주 상단을 차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
주성진은 자신의 사업을 키워서 휘주 상단을 병합할 생각이었다.
휘주 상단의 몰락이 다른 상단에게 어부지리가 된다면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그 반대로 타 상단의 상권도 전부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올 생각이었다.
"하하, 무공을 익힌 상인에게 그보다 더 큰 무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돈벌이가 되는 곳이라면 저는 위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고 세상 어디든 달려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