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개방 분타주를 만나다 (1)
"이보시오, 소저, 대부분 사람은 뛰어난 절경이나 그림을 보고 넋을 잃고 감탄한다오, 그대는 그런 사람에게도 음탕하다 할 것이오?"
"그건 사물이고, 여자는 다르죠."
"허허, 뭘 모르시네, 지금의 나도 그와 똑같은 이치요. 나는 한 점도 그대에게 색욕을 느끼지 않았소."
그녀는 주성진의 말에 헷갈렸다.
'칭찬이야, 뭐야…….'
한데 조금씩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머릿속에서 피어오르자 그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니, 내가 왜 기분 나빠하지?'
그녀는 하산하면서 사부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어여쁜 용모에 남자들이 백의 백 추근거릴 것이니 그런 남자를 보는 족족 따끔히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하여 그녀는 장력을 날려 주성진에게 물벼락을 씌우려 한 거였다.
"좋아요, 일단 사과하죠, 하지만 조금이라도 나에게 추파를 던진다면 용서치 않을 거예요."
주성진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시오, 자 그럼 갑시다. 어르신께 안내할 테니."
주성진은 그녀의 반응을 보지 않은 채 휘적휘적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반 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주성진은 노파의 가판대가 보이기 시작하자 손을 가리켰다.
"저기요."
주성진의 뒤에서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한참 음식을 만들던 노파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서오……."
성진은 노파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르신의 손녀를 데려왔습니다."
"뭐라?"
그 순간 노파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민아야. 네가 여긴 웬일이냐? 그 멀리서 날 어떻게 찾아온 게냐?"
"할머니 보고 싶어서요!"
그녀가 달려가 그녀에게 덥석 안긴다.
"녀석, 이제 다 컸구나.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어, 보자 5년 만인가……."
"네, 할머니, 건강하시죠?"
"그럼, 그럼, 나야 건강하지. 이제 어여쁜 숙녀가 되었네, 우리 아가가."
주성진은 조손의 만남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조손 간의 대화가 귓전을 스쳐 지나간다,
"오빠는 잘 지내고 있어요?"
"얼마 전에 서신이 왔단다. 이번에 기필코 과거 급제하겠다고 하더라."
"제가 오빨 만나러 악록 서원에 갈까 봐요."
"아니야. 한창 공부 중일 것이니 참아라……."
성진은 악록 서원이라는 이야길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허허. 이리 공교로울 수가, 그렇다면 장량과 동문수학하는 사이겠구나. 아니 경쟁하는 사인가?'
잠시 후 주성진은 다시 돌산으로 향하다 자신을 가로막는 작은 그림자를 보며 싱긋이 웃었다.
어린 거지였다.
"안녕, 아쟁아, 미안한데 오늘은 철전이 없구나."
성진이 지난번 노파가 만든 음식을 나눠준 이후 성진의 주변으로 항상 거지들이 기웃거렸다,
개중에 아쟁이 귀엽고 영특해서 성진은 특별히 그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아쟁은 고개를 흔들었다.
"헤헤, 아저씨 괜찮아요. 저는 오늘 다른 일 때문에 왔거든요."
"녀석, 한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어찌 알았냐?"
"그야, 아저씨가 아름다운 여인이랑 걸어가는 걸 본 사람들이 많아요."
주성진은 멋쩍게 웃었다.
"허허, 그래 무슨 일로?"
"아저씨를 꼭 뵙고자 하는 분이 계세요. 시간 좀 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날 찾는다고?"
"네, 가보시면 알아요."
아쟁이 말끝을 흐린다. 주성진은 돌산에 가는 걸 포기했다.
'뭐 간 셈 치자, 대충 살펴보니 계곡과 폭포 주위를 빼면 모두 돌이더라고!'
"앞장서라."
"고마워요, 아저씨, 헤헤."
"아니다, 녀석아."
주성진은 어린 거지의 더벅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을 꼬불꼬불 간 후 아쟁이 주성진을 안내한 곳은 장사 외곽 변두리의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이었다.
근처에 펼쳐진 논밭을 봤을 때 농부가 사는 집 같았다.
'녀석이 이곳에 사나?'
"헤헤, 제가 기거하는 곳이에요, 놀랐죠?"
"글쎄다, 농사를 짓느냐?"
"그건 아니네요."
그때였다. 구수한 음성이 들린다. 한데 목소리에 왠지 힘이 없다.
"아쟁이 왔느냐?"
"네, 사부님, 주성진 아저씨를 모셔왔어요."
성진은 사부라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뭐라 사부라고? 사부라면 설마 개방?'
"모시고 들어오너라."
끼이익…….
아쟁이 방문을 열자, 방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누워 있었다. 팔과 다리에 부목을 한 채로…….
그는 성진을 반갑게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미안하외다. 직접 찾아봬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부상 중이라서, 누추하지만, 앉으시오. 내 긴히 드릴 말이 있소이다."
성진이 자리에 앉자 그가 아쟁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먼저 내 소개부터 하겠소, 난 개방 장시 분타의 분타주인 이낙출이라 하오. 그러니까 개방의 3대 제자요."
성진은 그의 허리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한데 책에서 본 것과 달리 아무 매듭이 없다.
이낙출은 성진의 눈길이 자신의 허리춤이 있음을 알고 씩 웃었다.
"하하, 개방 문도라고 해서 항상 허리춤에 매듭을 매지는 않소이다."
"아, 그렇습니까? 난 항상 허리띠에 매듭을 매고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항시 그러고 다니다간 신분이 발각되어 정보를 캐내지 못한다오. 사람들이 곧바로 개방 출신이라는 걸 알아보고 경계할 테니."
성진은 그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아, 그렇겠네요, 한데 저를 보자고 한 용무가 무엇인지?"
성진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자 그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쟁이와 다른 제자들을 통해 그대의 활약상을 보고 받았소이다. 내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직접 활약상을 봤을 터인데 무척 아쉽소이다."
성진은 개방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다소 놀랐다.
"뭐, 건달들이 내 집에 죽치고 있기에 손을 좀 봤을 뿐입니다."
"그대의 집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왜 그러면 안 되나요?"
이낙출은 애써 손을 흔들었다.
"아아, 아니요, 한데 4개 파를 일거에 쓰러뜨렸다고 하던데……."
"그야, 놈들이 절 죽이려고 수작을 부리더라고요,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친 거죠."
이낙출은 고개를 끄떡였다.
"잘하셨소, 그래서 말인데 날 좀 도와주시구려. 이곳 작은 분타주 자리라도 유지하려면 개방 총단에 보고를 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
"뭘 도와달라는 말입니까?"
"장사의 동향을 정기적으로 보고 해야 하는데 어린 제자들의 보고론 부족함이 있어서 말이오. 참고로 장사 분타는 인원이 단출하오. 총단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한 곳이 아니라서 말이오."
성진은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저의 정체에 대해 알려 달라 그 말씀인가요?"
"하하, 미안하지만 그렇소이다. 천화각에 들락날락하는 거로 보아 출신은 정파 쪽인 것 같긴 한데……."
'음, 내가 천화각을 드나드는 것도 알고 있었구나.'
성진은 개방의 비전 영약인 취구환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비록 취구환으로 인해 전생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경위야 어쨌든 환생한 그에게는 엄청난 기연을 안겨준 영약이었다.
"알려드리지요."
성진이 흔쾌히 동의하자 이낙출은 적이 안심했다.
'휴 다행이다. 말하길 꺼릴 거로 생각했는데.'
그는 성진이 흑도를 몰아낸 건 소속 문파의 뜻이 아닌 개인적으로 처리한 일이라고 믿었다.
해서 후일 개방 때문에 그 일이 소문이 난다면 그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어쨌든 너무나 쉽게 신분을 밝히자 자신이 준비한 수가 무색해졌다.
"정말이오?"
성진의 사부는 그의 하산을 허락할 때 형산파라는 걸 굳이 감출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당히 밝히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제자들이 형산파의 절기를 계승하지 못한 일로 남들에게 비웃음을 받을까 봐 늘 우려했다.
"그렇습니다, 전 형산파의 제자입니다."
이낙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제법 큰 소식 거리였다.
"음, 실례되지만 형산파의 진산 절기를 익혔소이까?"
성진은 그가 왜 저리 묻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장문인을 포함한 주력 고수들이 모조리 실종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공서고도 불타버렸음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과히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하, 그게 중요합니까? 제가 형산파의 제자라는 게 중요한 게지."
"으음,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이해하시오. 다만 과거의 절기를 이어야 제대로 인정받을 것 같아서……."
"분타주님, 제가 형산파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말하진 않았습니다만."
이낙출은 눈을 껌뻑였다.
"그럼 형산파의 무공을 익혔다는 말씀이오?"
성진은 내심 미소 지었다.
'내가 청풍무결을 익힌 건 사실이잖아.'
"그렇습니다."
"아아. 그렇구려. 실례했소이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고맙다는 말을 빼먹을 뻔했소이다. 정중히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오."
성진은 손을 내저었다, 순간 그가 불편해 보였다.
"저, 달리 할 말이 없으시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성진이 일어서려 하자 그가 급히 손을 들었다,
"잠깐만! 혹 흑룡문을 아시오?"
성진은 그가 왜 묻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뭐 그거겠지, 흑도의 배후에 흑룡문이 있고, 흑룡문에선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알다마다요. 5개 파의 배후에 그들이 있더라고요. 사실 흑룡문에서 날 죽이려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보시다시피 난 살아 있고요, 하하."
이낙출은 아쟁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이 일을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을 탓할 게 아니지, 다 내가 못난 탓이야. 내가 상처만 입지 않았다면.'
"그럼 물리쳤다는 말이구려."
"그렇습니다."
이낙출은 성진의 무위를 자신과 비슷한 이류급에서 일류 중급으로 올려 잡았다.
사실 처음 제자들의 보고를 듣는 순간 성진이 무림인이라는 걸 직감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자로 보진 않았다.
"몇 명이 왔더이까? 그들의 수준은?"
성진은 감전동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밝힐 수 없습니다. 말 못 할 사연이 있으니 이해해 주세요."
이낙출은 노련하게 이 일의 진상을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넘어갔다.
"하하, 괜찮소이다. 한데 실은 말이요, 내가 그대에게 선물을 준비했었소. 만일 그대가 신분을 밝히지 않을 때 쓰려고 했었지."
성진은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제게 거래를 제안하려 했던 것이군요."
"그렇소이다. 관심이 있소이까?"
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궁금하지 않은 게 이상했다.
"네. 당연히 관심이 있지요,"
"내가 명검이 있는 곳을 알게 되었소."
성진의 눈이 커졌다.
"명검이라고요?"
"그렇다마다요. 다만 내가 있는 곳을 알려줄 테니 우리 처지를 조금이나마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데, 보다시피 난 몇 달은 기동할 수 없을 것 같고……."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런 귀중한 정보를 왜 저에게 알려준답니까? 개방 총단에 보고해야지."
"그게 단언할 수는 없어서 말이요."
성진은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 지금 장난하나요, 아까랑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가 급히 아프지 않은 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 그건 믿을 만한 보요. 다만 만에 하나 그 정보가 틀린다면 난 총단에 문책당할 것이고, 자칫 내 자리도 보전하기 힘들 거외다."
"왜 문책을 당한답니까, 정보라는 게 틀릴 수도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