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노파의 손녀를 만나다
강설주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말하려고 했는데 아저씨도 바쁘고 저도 정신이 없었어요. 포구에서 주성진이 벌인 일 때문에 말이죠."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강설진과 강설현도 놀란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그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 이번에는 넘어가지, 그건 그렇고 그래서 네 힘으로 휘주 상단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게냐? 그 뭐냐, 시간 연장책으로!"
"호호, 그건 아니에요, 당연히 누구와 협력해야겠지요."
총관은 그 순간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그가 두 눈을 치켜뜨고 강설주를 바라보았다.
"너! 설마 주성진?"
"네, 그를 전면에 내세울 겁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총관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녀석아! 구멍가게도 아니고 중원 5대 상가인 휘주 상가를 너희 둘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두부로 바위 치기 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아저씨 저 어린아이 아니에요, 어렵다는 건 잘 안다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오히려 아버진 기특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물론 아버지도 아저씨처럼 이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러니까 뭐야, 각주님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있어 하실 거란 말이지?"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네. 아버지는 제가 조용히 무난하게 천화각에서 경영수업을 받는 것보단 휘주 상가와 한판 붙는 게 훨씬 더 나은 경영수업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뭐,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겠지만 만에 하나 운 좋게 휘주 상가가 저희 때문에 휘청거리기라도 한다면 모용 가주에게도 타격이 갈 것이고 그러면 결국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겠어요, 호호."
그녀는 잠시 말을 끊더니 힐끔 강설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저씨 또 있어요. 주성진이 장차 설현이의 사위가 될 수도 있으니 아버지로서는 관전하는 재미가 3배가 되실 거예요, 호호호."
강설현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되었다가 급히 입을 열었다.
"언니, 아무래도 저도 참전해야겠어요."
"호호, 도와주겠다는 거냐? 감시하겠다는 거냐?"
"둘 다예요, 언니!"
그러자 강설주가 손을 들었다.
"언니, 저도 끼워줘요."
"조용!"
총관이 굳은 얼굴로 나섰다.
"그런데 말이야. 너희들이 나서면 우리가 개입한 걸 언젠가 모용세가에서 알게 되지 않겠니?"
강설주가 대표로 나섰다.
"에이, 아저씨도! 적절하게 역용하면 되죠, 그리고요. 저희가 모용세가의 무공을 쓰지 않는 이상 저희를 알아내진 못할 거예요."
천화각의 삼선녀는 모용세가의 무공 외 부친이 구해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게다가 천화각의 여러 무공 교두에게 어릴 적부터 귀여움을 받아 그들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음, 그런데 너희 셋이 빠지면 당장 이곳 천화각의 매상에 지장이 올 텐데."
"호호. 본 단에 협조를 요청하세요, 어차피 저희는 1년 후에는 떠나게 되어 있었잖아요."
총관이 얼굴을 찡그렸다.
'으음, 그 여우들을 다시 만나야 하나, 한동안 보지 않아서 좋았는데.'
천화각의 본 단에는 무공과 접객에 있어서 삼선녀를 능가하는 여인들이 다수 존재했다.
총관은 생각을 접고 아까부터 입에서 뱅뱅 돌다가 만 생각을 끄집어냈다.
"설주야. 넌 이 계획에 주성진이 동참할 것이라 확신하느냐?"
강설주는 잠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그가 대상인이 되려면 5대 상가와는 필연적으로 부닥칠 수밖에 없어요. 그들의 손길이 중원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까요."
"……."
"저는 그래서 그가 들으면 귀가 번쩍 뜨일 만큼 솔깃할 것을 제안하려 해요. 그건 바로 형산파의 무공 중 일부 초식을 복원해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얼마 전 특별 비무 교관으로 채용한 권중달 어르신이 숭산파 대표로서 오악 검파 대회에 참가하셨다고 들었거든요."
한때는 오악 검파 내에서 화산과 쌍벽을 이루었던 숭산파는 내분으로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형산파 만큼이나 세가 쪼그라들었다.
총관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무릎을 쳤다.
"하하. 권중달 선배의 별명이 흉내쟁이였지, 남들 무공을 기가 막히게 잘 따라하니까."
"맞아요, 그분이라면 충분히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좋다, 나도 솔직히 널 당장은 시집보내기 싫구나, 빨리 각주님께 재가를 받도록 하자꾸나."
주성진은 삼선녀와 총관에게 형산파의 무공이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바로 알려 달라고 누누이 부탁했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무공에 대한 추궁이 뒤따랐는데 성진은 때가 되면 밝히겠다고 얼버무린 상태였다.
그 순간 강설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잠깐만요, 휘주 상단을 힘들게 할 구체적 계획이야 차차 세운다고 할지라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
좌중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리자 강설현은 말을 이어나갔다.
"투자금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러자 강설주가 강설현을 바라보며 측은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설현아, 너 정말 주성진에게 깊이 빠진 거냐?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거야?"
"언니, 지금 날 모욕하는 거예요?"
"이것아, 너 빼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알고 있다고. 이심전심으로 말이야. 쯧쯧."
강설현이 매섭게 강설주를 쏘아봤다.
"그러니까, 모든 투자책임은 주성진에게 지우겠다. 그 말인가요? 그건 한마디로 주성진을 장기판의 졸로 이용하겠다는 거잖아요, 여차하면 버릴 패로 말이죠."
"이 바보야, 주성진이 바보냐? 겪어봐서 잘 알 텐데……."
"그럼 뭐죠?"
"자고로 투자라는 게 금전만이 능사가 아니야, 휘주 상단에 대한 고급정보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거라고. 거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뭐야, 널린 게 비급 아니겠어. 그걸 돈 대신 제공하는 거지, 그가 알아서 팔도록 말이야."
한편, 다음 날 성진은 다소 일찍 자신의 거처를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날씨는 생각보다도 더욱 무더운 것 같았다.
이런 날에는 밖에서 오래 걸어 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러나 성진은 볼일이 있었다. 황일동 거처의 뒤편에 있는 돌산에 가는 길이었다.
직접 눈으로 돌산인지 아닌지를 확인도 할 겸 그다지 크지 않지만 수려한 계곡과 그 위에 아기자기한 폭포가 있다길래 구경하러 가는 길이었다.
돌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일동의 장원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
기암괴석과 온갖 아름다운 꽃들과 정원수들, 그리고 인공으로 조성한 듯한 연못과 연못 가운데의 정자가 보였다.
성진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와, 꽤 많은 돈을 써서 가꾼 정원 같은데 그에게 저런 고상한 취미가 있는지 몰랐네. 특히나 정자를 잇는 구름다리는 상당한 작품이야, 만일 저걸 그가 직접 설계했다면 그의 건축 기술을 칭찬해야 할 것 같군.'
성진은 그가 정원에 쏟아부은 정성이 둑을 만드는 데도 고스란히 이어지길 염원했다.
얼마 후, 불과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아 성진은 계곡을 지나 폭포에 다다랐다,
폭포를 보자마자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잠시 쉬어 갈까.'
성진은 겉옷을 벗은 다음에 폭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겉옷을 벗은 건 폭포수에 젖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느닷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쭐 말이 있어요."
성진은 폭포 위쪽을 바로 보았다. 그곳엔 묘령의 젊은 여인이 폭포 꼭대기 옆 바위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크 큰일 날 뻔했네. 훌러덩 벋고 목욕이나 할까 했었는데.'
성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돌산이 누군가의 소유라 할지라도 이곳을 지나는 사람을 금지할 수 없는데 잠깐 사이에 그걸 착각한 거였다.
'허허. 나도 참!'
묘령의 여인은 주성진이 혼자 웃으며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봐요, 왜 웃는 거죠?"
성진은 급히 손을 흔들었다. 속으로 그녀의 시력이 좋다고 생각하며.
"아. 미안합니다, 그래 뭘 물어보려 하는 겁니까?"
자세히 보니 묘령의 여인은 옥으로 깎아 놓은 듯 아름다운 용모에 활동하기 편한 경장을 입고 있었다.
'미인이군, 아, 저건 검! 그렇다면 무공을 익힌 여인이야.'
성진은 뒤늦게 그녀의 어깨 위로 삐죽이 삐져나온 검을 발견했다.
"이곳 포구에 가판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계시다 들었어요, 혹 알고 계시나요?"
성진은 그녀가 노파를 찾고 있음을 직감했다.
"한데 누구십니까?"
성진의 말에 그녀가 눈썹을 찌푸리자 백옥 같은 작은 얼굴에 갑자기 서리가 내리는 것 같았다.
용모는 대단히 아름답지만, 성격은 다소 오만하고 차가운 듯했다.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내가 누구인지는 왜 묻는 거죠?"
"그대가 낯선 이방인이니 그렇지 않소이까!"
그녀가 따지는 듯 묻자 성진의 말투도 덩달아 짧아졌다.
"흥, 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요?"
"그대는 무림인 아니오? 무림인이라면 당연히 경계하기 마련이잖소?"
그녀는 성진이 자신의 기세를 알아채자 다소 놀란 듯 되물었다.
"오라, 당신도 무림인가 보군요."
"뭐, 그렇다 칩시다."
그 순간 그녀는 성진의 의도를 짐작했다. 자신이 혹 나쁜 짓이라도 할까봐 저러는 것을.
"그분은 저의 할머니세요."
성진은 오늘 볼일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내려오시오, 직접 안내할 테니."
"고마워요."
그녀는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순간 성진은 눈을 치켜떴다.
'와, 한 마리의 백학이 하강하는 것 같구나.'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여인이 느닷없이 우수를 들어 흔들었다.
펑!
그러자 성진의 바로 앞에 있던 웅덩이에서 분수처럼 물이 솟구쳐 올랐다.
'아이코, 까닥하면 물벼락을 맞을 뻔했군.'
성진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물방울 일부가 옷과 얼굴에 묻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여인이 상승무공을 지닌 고수일 줄은 미처 예상 못했다.
조금 전 그녀의 수법은 장력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자는 장풍이라고 부르는 절기로써 성진은 기연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수법이었다.
더구나 신법을 펼쳐 낙하하면서 장력을 쏜다는 건 어떤 위치에서도 수발이 자유로운 걸 의미했다.
'누구지? 보통내기가 아닌데?'
성진의 머릿속엔 그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녀의 무례에 대해선 잊어버렸다.
사뿐히 착지한 그녀가 냉소를 날렸다.
"당신 치한이에요? 왜 날 그렇게 쳐다본 거죠?"
"내가 왜 치한이오?"
"내가 낙하하는 내내 음탕한 눈으로 날 쳐다봤잖아요."
성진은 마음속으로 약간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음탕한 건 절대 아니었다.
'어쩌란 말인가. 본능적으로 눈이 그리 간 것을…….'
성진은 당황한 모습을 지우기 위해 입을 벌려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사과하시오 감히 날 뭐로 보고……."
성진이 세게 나오자 그녀의 아미가 좁혀졌다.
"그러면 음탕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남자들의 눈빛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들었는데."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거 좀 이상한데, 어려서부터 교육을 저리 받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