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노파를 찾아가다
성진이 말없이 그의 입을 응시하자 장칠은 급히 말문을 열었다.
"실은 철물점 황씨에게 들었습니다. 각파의 수장들에게 특제금고를 팔았다고요."
"그 뭐냐, 기관술을 안다는 사람 말이냐?"
장칠은 성진이 그들의 말을 다 들었다는 걸 상기했다.
"네, 그렇습니다. 주군."
"음, 그렇군, 그래도 이 열쇠들이 금고의 열쇠인 줄은 어떻게 알았지? 세상에 모든 열쇠가 금고 열쇠는 아닐 텐데 말이야."
"아, 그건 제가 그의 가게에서 전시된 특제금고를 봤기 때문입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자 그가 열쇠를 쥐여 주면서 자물쇠를 열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는 아마 절 잠재 고객쯤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
"그래서 제가 놈들의 열쇠를 봤을 때 곧바로 금고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아 그걸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열쇠에는 황씨 특유의 표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철물을 만들면 꼭 자기 표식을 자랑스럽게 새겨 넣거든요."
성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한데 그 황씨라는 사람이 물건을 잘 만들 뿐만 아니라 고객관리도 제법 하는 모양이야."
"네. 장사꾼이지요."
그 순간 성진은 손에 쥔 열쇠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용(龍) 자 같은 게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역시 그렇군.'
문득 성진은 장칠이 자신보다 나이가 든 걸 자각했다.
전생의 버릇으로 자연스레 하대한 것인데, 둘 사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를 막 대하면 남들이 쑥덕거릴 것 같았다.
'그래, 저 친구의 나이가 삼십 줄은 되어 보이는데 마냥 지금처럼 그럴 순 없지. 이 기회에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야겠다. 사업을 하려면 호칭이 필요하니까, 음, 뭐가 좋을까? 상단주는 너무 나간 것 같고 그래 대행수가 좋을 것 같군, 하하.'
"이봐, 앞으로 주군이라 부르지 말고 대행수라고 불러, 알았지?"
"대행수라고요?"
장칠은 의아했다.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를 못 할 것이다.
"그래. 난 앞으로 널 장 행수라고 부르겠다."
"저, 대행수나, 행수는 상단의 직책으로 알고 있는데요?"
"알면서 왜 물어? 차차 알게 될 것이니 머리 굴리지 말라고."
장칠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일개 건달에서 행수가 되었으니 환골탈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헤헤. 대행수님 거기 가실 때 마차를 한 대 빌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짐이 많을 것 같으니까요."
성진은 곧바로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역시, 잔머리는 잘 돌아간다니까. 하지만 말이야 난 금고를 열어 안에 든 것을 가지고 가진 않을 거야. 그냥 통째로 옮길 거라고.'
"마차를 구할 수는 있고?"
"그럼요, 이곳 포구에는 없는 것 없으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히이잉…….
사륜마차를 빌린 그들은 두량파의 본거지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내내 성진은 장칠으로부터 이곳 포구 사정은 물론 장사의 세력 구도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이야길 들었다.
새로운 이야기도 있었고 성진이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었다.
"내리실까요? 대행수님."
"그러지."
성진은 마차에서 내려 두량파의 본거지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얼씬하지 않는군.'
두량파의 본거지 앞은 인적 없이 조용했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니 예상한 대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건달들이 급하게 돈이 되는 건 모두 챙기고 도망친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건달들 덕분에 금고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금고가 숨겨진 옷장이 이미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금고를 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듯 금고의 외관은 칼자국, 도끼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이 금고를 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눈에 선했다.
잠시 후 주성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장칠을 힐끔 쳐다보고는 무거운 금고를 들어 마차에 옮겨 실었다.
"자. 가자고!"
"아 네. 대행수님……."
"음, 한데 여기 건물의 주인이 따로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혹여나 집주인이 지금 이 상황을 모를 수 있으니 나중에 알려주자고."
장칠은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건물 앞에다가 크게 방을 붙여 놓겠습니다."
"그건 그렇게 하고, 두량파는 이 건물에 어떻게 살게 되었나?"
"그게, 제가 두량파에 속하기 전의 일인데 사실은 집주인을 협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형식은 임대차 계약이지만 뭐 그게 그거인 셈이죠."
성진의 예상에 한 치도 틀리지 않는다.
'나쁜 놈들…….'
"집주인이 이 소식을 들으면 좋아하겠군."
"죄송합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알면 됐어!"
시간이 흘렀다.
성진은 밤새 청구파, 영천파, 목금파의 본거지를 빠짐없이 돌았다.
상황은 두량파와 비슷했다.
건달들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고 열려다 실패한 금고만이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온 성진은 장칠에게 돈을 쥐여 주곤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일렀다.
아직은 그를 심복으로 믿을 수 없기에 그랬던 거였다.
장칠이 마차를 몰고 떠난 후 성진은 금고를 모두 열었다.
얼추 돈으로 환산하면 4개 파가 모두 비슷비슷했다.
주성진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하하."
'자. 그럼 오늘 하루를 땅파기로 시작해볼까나.'
"룰룰루……."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잠시 후 일을 마친 성진은 이마의 땀을 닦으려다 돌연 무릎을 쳤다,
'옳거니! 건달들이 사라졌으니 포구 일대의 땅값이 오를 것이야. 건달들에게 보호세니, 자릿세를 떼일 필요가 없으니. 가령 음식값을 낮출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 손님들도 늘어나겠지…….'
주성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건달들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사람들은 긴가민가할 것이야. 당분간은 이 상황을 지켜볼 게 틀림없어, 뭐 날 새로운 건달쯤으로 여길지도 모르지, 흐흐.'
주성진은 재빨리 부동산을 매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의 얼굴이 돌연 굳어진다.
'이런, 당장 급한 걸 놔두고 지금 뭐하는 거야.'
주성진은 흑룡문에서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거였다.
돈이야 많이 벌면 좋겠지만 그전에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르신께 가보자. 조언을 구해야 할 것 같아.'
주성진은 서둘러 길을 나섰다.
휙, 휙…….
포구에는 여러 가판대가 있었는데 점심 전이라 그런지 한가했다.
노파는 장사를 준비하다가 성진을 보자마자 반색한다.
"호호. 소식은 들었네, 무사해서 다행이야."
"역시, 소문이 빠르군요,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노파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야, 내가 뭐한 게 있다고, 자네가 잘할 거라 믿었지."
주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노파를 응시했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어르신 말씀처럼 뒷배가 있더군요, 흑룡문이라고."
노파는 고개를 끄떡였다.
"음, 내 짐작이 맞았군, 나도 흑룡문이라 생각했어, 여기서 제일 가까운 사파니까."
"흑룡문을 잘 아십니까?"
노파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이거 참, 잠시 옛날 생각이 나는군, 흑룡문은 내가 알기론 그전 그런 사파였어,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진 않아."
성진은 노파의 말을 바로 접수하진 않았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만약 노파가 엄청난 고수였다면 흑룡문 따위는 성에 차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어르신, 그들의 무공 수준이 대략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나름 대비를 해야 하니까요."
노파가 피식 웃는다.
"사실 자네가 칠성파의 건달들을 혼내줄 때 이미 흑룡문의 존재를 계산에 넣고 있었어, 그리고 자네 무위라면 문제없겠다고 생각했었지."
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솔직히 제가 건달들과 싸울 때 최선을 다하진 않았거든요. 어떻게 그것만 보시고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흑룡문의 문도들은 건달들과 달리 내공을 익힌 자들일 텐데."
노파가 성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
"후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어, 난 금나수로 건달들을 제압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설령 흑룡문 문주가 덤벼도 자네가 이길 것 같더군. 자네도 알겠지만 금나수는 결코 쉬운 무공이 아니야, 만만하게 익힐 수 있는 무공이 결코 아니라고."
"……."
"제대로 된 금나수를 펼치려면 적절한 내공은 필수고 강약 조절과 손가락의 감각이 뛰어나야 하지, 거기에 뛰어난 오성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고, 이유는 신체 부위별 혈도와 관절을 다 외워야 하는데 머리 나쁜 놈은 때려죽여도 못 외지, 호호. 아, 혹자는 금나수를 점혈법과 분리해서 말하기도 해."
성진은 그녀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노파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수월하게 금나수를 익힌 것 같아 신기했다.
물론 강설현의 친절한 설명이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음, 아직은 내가 완벽히 금나수를 익힌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기이하군, 이거 타고난 걸까?'
성진은 머릿속의 의문점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아, 그렇군요, 전 여태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있지. 남의 눈에는 보이는 데 정작 자신은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많으니까. 그리고 흑룡문은 말이야, 천화각이 등장하자마자 제대로 싸움도 못 걸고 허둥지둥 장사에서 발을 뺐다네. 생각해보게 그런 그들이 자네를 죽이려고 떼로 몰려올까?"
"……."
"천화각이 두려워서 절대 그러질 못해. 기껏해야 소수 몇몇을 몰래 위장해서 보낼 것이야, 게다가 흑룡문은 자네의 무위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거야. 왜냐면 여기 건달들쯤이야 그들도 셋 정도만 보내면 모조리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할 거거든."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허허, 알았네, 내가 자네의 무위를 다시 봐주지."
성진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뭘, 그걸 가지고……. 허허."
"또 궁금한 건 없나? 내 마음이 동할 때 얼른 물어보게나."
성진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헤헤, 저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천화각에선 왜 흑도 놈들을 내버려 두었을까요?"
"그들이 정파라서 그런 거지, 하지만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지 않나? 이권이 크면 클수록 유혹은 점점 커지겠지."
"그렇다고 해도 노골적으로 흑도들을 정리하진 않겠군요. 정파니까."
노파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만일 그리 한다면 스스로 정파라는 간판을 반납하는 거와 마찬가지지, 물론 정파라는 자부심을 버린다면야 하등의 문제 될 건 없지만 대부분의 정파는 겉으론 명예를 중요시하지."
"정파라는 명예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일단 정파라 하면 사람들이 좋게 보잖아. 사파는 잘해도 손가락질 받기 일쑤고, 마교는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정파는 자신이 몸담았던 상계를 떠올렸다.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악덕 상인이라고 낙인찍히면 그것을 벗어나긴 대단히 어려웠다.
"그렇군요. 어르신 덕에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