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제안을 받다
"헤헤, 형산파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데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야지요. 거대 문파로 일어서려면 무공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자금력 아니겠습니까?"
강설주가 살짝 째려본다.
"호호, 그건 너무 판에 박힌 답변 같은데, 내 생각에 그건 명분일 테고 본인이 돈을 벌고 싶은 것 같은데 말이야."
성진은 강설주가 만만한 여인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음, 일이 잘된다면 저에게도 돌아오는 게 있겠지요, 하하."
"호호. 그래? 미안한데 내가 동생들하고 상의할 것이 있어서 그러니 잠시 기다려줘."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는 전음으로 대화할 테니."
'음, 전음술이라…….'
성진도 사부의 서재에서 본 적이 있는 무공이었다, 그가 본 건 무학 사전이라는 책인데 무공의 다양한 종류에 관해 기술한 책이었다.
전음술은 상대방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고도 진기를 이용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기법이었다.
'음, 전음술은 무공 조금 익히고 내공 조금 쌓였다고 개나 소나 펼칠 수 있는 무공이 아니라고 했었지, 일류급 고수 중에서도 3할 정도만이 펼칠 수 있고.'
성진은 의도치 않게 그녀들의 무공 경지를 엿볼 수 있었다.
'하하. 그렇다면 난 설현을 꺾었으니 일류급 이상인가? 사부님은 날, 이류 문턱을 겨우 넘은 수준이라 하셨는데 말이야, 사부님 주장으론 무림인이라 칭할 수 있는 자 중에 삼류가 5할. 이류가 3할, 일류 이상이 2할이라 하셨지…….'
그런 측면에서 천화각의 삼선녀는 나이에 비해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강설주는 강설진, 강설현을 번갈아 보며 전음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진기로 음파를 쏘아 상대의 고막을 자극하는 원리이기에 일대 다의 대화가 가능했다.
다만 다수와 대화를 할 때 주의할 것은 의도치 않게 다른 이가 엿들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음을 보내기 위해선 매우 높은 주의력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전음을 전달할 대상이 한 사람이고 가까이 있다면 차라리 귀엣말이 훨씬 편하고 간편할 수도 있었다.
―설진, 설현아. 장사 포구에 놀고 있는 건물과 땅을 성진에게 세를 주면 어때? 팔려고 내놔도 깜깜 무소속이니 그게 좋지 않겠어?
강설현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강설주를 바라보았다.
―거긴, 문제가 많은 곳인데 성진에게 세를 받겠다고요?
―뭐, 시세보다 싸게 세를 받으면 되지.
강설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언니 의견에 찬성이에요, 성진이라면 그곳 주변의 건달들을 잘 요리할 수 있을 거예요.
이야기를 듣던 강설현이 강설주을 바라보았다.
―언니, 사고는 5년 전 언니가 저질러놓고 교묘하게 넘어가려 하시네요. 아버지가 한눈팔지 말고 이곳 천화각만 잘 운영하라고 했잖아요.
―너, 이상한데? 벌써 눈에 콩깍지 씐 거냐, 그를 두둔하게.
―흥, 그게 아니라 언니가 제대로 현장을 가 보고 샀더라면 문제가 없었잖아요.
―그땐 어쩔 수가 없었어, 워낙 싸게 나왔다고 하길래, 그래도 마지막 잔금을 치르기 전에 가 보려 했다고! 바쁜 일이 생겨서 못 갔지만.
강설진이 두 사람을 보며 수습에 들어갔다.
―설현아, 그만해! 만일 아버지가 몰래 건물을 산 걸 아시면 너나 나까지도 불호령이 떨어질 거야, 뭐 언니도 잘한 건 없어요. 외부에 일이 알려질까 봐 흑도 놈들이 건물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방관하고 있으니까요.
강설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미안해, 동생들아. 그건 그렇고, 난 그가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 궁금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생각이라도 들고 나오면 좋을 것 같은데, 난 머리 좋은 사람이 좋더라…….
강설진이 눈을 찡긋거렸다.
―호호, 언니도 참… 난 언니의 엉큼한 마음을 알 것 같은데.
순간 강설현의 아름다운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잠시 후, 강설주가 대표로 성진에게 말했다.
"미안……."
"아,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소유의 건물과 땅이 있는데 말이야."
강설주는 운을 떼며 자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 그렇게 된 거야."
이야기를 다 들은 성진은 내심 고개를 가로젓는다.
'쯧쯧, 아무리 바빠도 실사는 기본인데, 무턱대고 싸다고 건물과 땅을 매입하다니…….'
"잘 들었습니다. 한데 지금 건물은 어떤 상태인가요?"
"그게 말이야. 빈집은 아니고 칠성파라는 흑도 무리가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
성진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런 일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입지 좋은 포구엔 늘 똥파리들이 꼬이기 마련, 그나저나 최악의 상황인데, 날 떠보는 것인가? 좋아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음, 그렇군요. 그러면 세 대신에 제가 건물과 땅을 사도록 하겠습니다."
강설진이 눈을 빛내며 쳐다본다.
"그래, 돈은 있고?"
"물론 없지요. 서류상으로 돈을 빌려주시면 제가 건물을 사겠습니다."
강설주는 성진의 말에 놀라다 크게 웃음을 지었다.
'호호호…….'
"한데 말이야, 빌린 돈은 어찌 갚을 거지?"
성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벌어서 갚아야죠. 만일 제가 빚을 못 갚으면 비무 교관을 해서라도 갚겠습니다."
"뭐라, 비무 교관? 누구 맘대로? 자격심사도 안 했는데……."
"뭐 아니 된다면 점소이라도 하겠습니다."
"……."
"그리고요, 혹여 위에서 감사가 내려오면 건물을 놀리는 것보단 저에게 돈을 빌려준 게 덜 문제 되지 않겠습니까?"
강설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짝짝…….
"좋았어, 대신 이자는 내야 한다고."
"그럼요, 당연하죠, 돈을 빌린 시점부터 6개월 후부터 원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상환토록 하겠습니다."
"그렇게나 빨리?"
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흔쾌히 돈을 빌려주시는 건데 그렇게라도 해야죠. 하하. 다만 먼저 제가 돌아가서 사부님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 있나?"
"문제없습니다. 제가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그리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강설주는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반대하는 기색이 아니다.
강설주는 앓던 이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시원함을 느꼈다.
'잘되었어, 하지만 영 마음에 안 들어.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위에선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정파를 따지냐고. 그건만 아니었으면 내가 진작 흑도 놈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포구 주변을 장악했을 텐데.'
천화각은 어쨌든 정파를 표명하고 있었고, 오랜 관행으로 정파에선 흑도가 장악한 이권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또한, 흑도는 사파나 마교와 달리 무림의 범주에 넣기에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 ? ? * ? ? *
저벅저벅…….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에 흑색 무복의 사내가 장사 포구에 나타났다.
'여기군, 어휴 두 달이 참 길었어.'
주성진은 제법 규모가 큰 2층 건물을 눈앞에 두고 감격에 젖어 있었다. 대상인을 향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하하. 저게 내 건물이란 말이지…….'
그의 눈은 여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났다.
두 달 전 형산으로 돌아간 성진에겐 여러 일이 있었다.
'휴, 무공을 익히는 것보단 사부의 승낙을 받는 게 제일 힘들었어.'
성진은 형산파를 다시금 일으키기 위해서는 누구는 돈을 벌고 나머지는 무공에 전념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하던 농사일은 소작농에게 맡기고.
거의 매일 사부를 붙들어 놓고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성진이 임무를 완성했다고 좋아하던 대장장이 이무송까지 끌어들여 사부를 설득하게 했다.
사부 오강일은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그 역시 이대로는 형산파가 발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성진이 변화의 물꼬를 튼 셈이 되었다.
'자, 안으로 들어갈 볼까!'
성진은 귀원비록 덕에 두 달 전보다 무공이 확연히 상승했다.
귀원비록 상의 첫 장에 쓰여 있는 경락구조와 기의 흐름은 강설현이 가르쳐준 금나술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신체의 신비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내공을 부작용 없이 귀원심법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혁혁한 도움을 주었다.
귀원심법은 확실히 청풍무결 상의 내공법보다 뛰어났다. 축기는 빨라졌으며 운기조식의 시간도 단축되었다.
게다가 요상 운공의 방법이 서술되어 있어 만일 내상을 입는다고 해도 이를 치유할 방법이 존재했다.
성진이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세 인영이 나타났다.
그들 중 눈알을 굴리며 성진을 바라보던 자가 턱을 움직인다.
"이봐. 네놈은 뭐야?"
대뜸 반말이다. 성진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칙칙하고 하나같이 험상궂다.
'음, 사람을 죽여 본 눈빛이군.'
성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나! 여기 주인이지. 잔말 말고 비켜라."
셋은 서로를 쳐다보다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하……."
"네놈이 여기 주인이라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꺼져!"
성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말로는 안 되겠구나.'
성진은 그들 가까이 몇 걸음 다가갔다. 지난 음식점에서 건달들이 한 것처럼 똑같이 손을 치켜들었다.
"자. 셋을 셀 동안 모두 무릎을 꿇는다. 알겠나?"
건달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점차 눈에 흉악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아무 미동도 없다.
그 순간 성진에게 말을 걸었던 건달이 손을 뒤로 돌려 허리춤에 꽂아둔 손도끼를 뽑으려 했다.
"이 새끼, 그 손모가지를 날려 주마!"
쉬이익…….
그때였다. 느닷없이 건달 앞으로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건달은 손도끼를 휘두르기는커녕 팔을 앞으로 뻗은 채 꿈쩍하지 못했다.
헉!
"왜 그러고 있어? 어서 장난감 같은 손도끼를 휘둘러 보시지, 응?"
건달은 굵은 밧줄에 포박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 뿐 꼼짝하지 못했다. 성진이 손목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란 그의 동료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제기랄, 무공을 익힌 놈이야!"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역력하다.
성진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봐, 진즉에 알아봤어야지, 그리 눈이 삐었어야 어디다 갖다 쓰겠어!"
그 순간 조용히 기회를 노리던 건달 하나가 감춰둔 단검을 꺼내더니 손을 홱 뿌렸다.
쉭……!
"이 새끼 죽어라!"
단검은 빠르게 성진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흥, 저럴 줄 알았지.'
그의 공격을 대비한 성진은 잡은 자의 손목을 풀고는 발로 걷어찼다.
쿵……!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쓰러진 건달은 잠깐 몸을 부르르 떨더니 기절해 버린다.
그 순간 성진은 쇄도해 오는 단검을 손으로 여유롭게 쳐내고 있었다.
'이까짓 것, 내공을 두르면 가소롭지.'
팅……!
맥없이 단검이 튕겨 나가자 건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서 손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헉!'
그는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너도 쓰러져!"
순간 강한 충격이 그의 뇌리를 강타하고 그 또한 신형이 뻣뻣하게 변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