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금나수를 배우다
주성진은 순간 염두를 굴렸다. 당연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만일 실력을 감추었다고 한다면 강설현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 난감하네. 뭐라 둘러댈까.'
성진은 말해도 될 부분과 함구할 부분을 구분하기로 했다.
사실 성진은 늘어난 자신의 공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이번 비무에서 원래 갖고 있던 공력의 두 배 정도를 사용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었다.
하나 성진이 확실히 체감한 건 자신의 혈도들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거였다.
뭐랄까 혈도가 넓어지고 질겨졌다고나 할까. 그것의 공능은 놀라운 반응 속도와 엄청난 동체 시력으로 대변되고 있었다.
한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기감의 상승에서 기인한 일종의 예지력 같은 것도 느끼고 있었다.
'옳거니 그걸 말하면 되겠군.'
"아, 제가 막혔던 부분이 있었는데 악록산 정상에서 창공을 훨훨 날아가는 새들을 보다가 돌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 여인은 성진의 말에 크게 경악했다.
'깨달음!'
세 여인의 똑같은 마음이었다.
순간의 놀라움이 어느덧 부러움과 질투로 바뀐다.
무인이라면 꿈에도 그리는 게 갑자기 찾아오는 깨달음이었다.
평생을 노력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했고, 그녀들도 그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굳게 닫힌 문은 그녀들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강설주는 머뭇거리며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저, 말이야,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
성진은 곧바로 고개를 끄떡였다.
만약 성진이 무림을 속속들이 안다면 이 질문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최우선은 자신의 안위다. 해서 최소 삼 푼의 힘을 숨기라는 말도 있듯이 자신의 참모습이나 깨달음을 밝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더구나 그녀는 오늘 처음 본 사이다. 가깝게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저는 이제껏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던가 봅니다, 한데 날아가는 새들을 보자 느껴지는 게 있었습니다. 그건 무한한 자유와 가벼움이었습니다."
세 여인의 귀가 쫑긋거린다.
"오, 무한한 자유와 가벼움이라, 호호, 나도 산에 올라서 날아가는 새들을 자주 봐야겠는데… 솔직히 벽을 깬 동생이 너무 부럽군. 그러고 보니 부친께서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한참 무공에 열중하고 있을 때 어깨를 두드리면서 쉬엄쉬엄하라고 말이야."
"아. 그렇군요. 그건 아마도 강박감에 사로잡혀 뭘 하려고 애쓰는 것보단 열정을 가지고 즐기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순간 강설진이 놀라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멋있는 말이야! 어찌 그대가 동생이 아니라 오빠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성진의 전생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하, 사실이야 큰 오빠쯤 되겠군…….'
"음, 그래서 말인데 마지막에 펼친 수법 말이야, 그거 혹 팔방풍우 아냐?"
성진은 강설진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대단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무위가 제일 세 보이긴 했어.'
대다수 무인은 삼재검법 상의 팔방풍우를 아예 무공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단순한 찌르기 동작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설진은 성진이 펼친 동작에서 팔방풍우가 가진 진짜 오의를 엿본 것이다.
"음, 제가 팔방풍우를 머릿속에 떠올리긴 했는데 제대로 펼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야? 난 혹시나 했었는데……."
그녀는 예전에 책에서 본 기억을 떠올렸다.
'삼재검법으로 무림 최고수에 오른 분의 비결은 바로 강한 내공에 있었어, 그렇다면 동생도?'
합리적인 의심이다.
'저 친구의 내공이 언니나 나를 훨쩍 뛰어넘은 것인가?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에다 공력에 좋다는 건 빠짐없이 챙겨 먹은 우린데……. 그렇다고 뭐 전설의 영약을 먹은 건 아니지만.'
아들이 없는 그녀의 부친 강승운은 자신의 세 딸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딸 바보가 따로 없었다.
"저기 말이야, 검을 뿌릴 때 날카로운 기세가 뻗어 나오던데, 혹 검기상인의 경지에 들어선 건가?"
검기상인이란 검에 주입된 내공이 무형의 검기를 이루어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경지였다. 그만큼 공력이 일정 수준에 올라야 가능한 거였다.
성진은 사실이 그렇다면 매우 기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롯이 자신만 누리고 싶었다.
'여기까지야. 더는 말하면 안 되겠어!'
"에이 잘못 보셨겠지요. 하하하."
성진은 급히 화제를 바꿀 필요를 느끼고 여전히 뾰로통한 모습의 강설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패배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살짝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마음을 고쳐 잡았다.
'뭐 내기는 내기니까, 챙길 건 챙겨야 하지 않겠어!'
"설현아, 미안한데 우리 청산할 게 있지 않나?"
강설현은 성진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좋아, 딱 한 번만 구술할 테니 알아듣는 건 네 능력이야."
그 순간 강설주가 고개를 젓더니 입을 열었다.
"설현아. 그러면 못써, 기왕 가르쳐줄 거면 성의껏 가르쳐줘야지."
"흥, 언니! 내 일에 참견하지 마."
"그게 왜 너의 일이야? 천화각의 일이지, 안 되겠다. 내가 너 대신 금나수를 알려주겠다."
강설현은 눈을 흘겼다.
가만 생각해보니, 두 언니 모두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
'흥, 누가 모를 줄 알고, 성진이 정도면 딱 좋은 신랑감이지. 대릴 사윗감으로.'
그녀들의 부친 강승운은 딸들이 천화각을 이끌어가길 바라고 있었다.
명문 세가나 그에 걸맞은 가문에 시집을 보내는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차라리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모를까…….
그런 면에서 성진은 현재까진 별 볼 일 없는 형산파의 제자다. 형산파에 충분한 금전적인 지원을 한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설령 데릴사위가 된다 해도 형산파의 출신이라는 걸 지우라는 것도 아니었다. 파문당한다면 모를까.
'저만하면 인물도 괜찮고, 똑똑하고. 무공도…….'
순간 미워했던 마음이 눈이 녹듯 사라지며 가슴이 울렁거렸다.
'안 돼! 언니들에게 빼앗기면!'
"언니 비켜! 내가 잘 알려줄 거야!"
고개를 돌린 강설현이 성진에게 소리쳤다.
"성진아, 내가 친절하게 가르칠 테니 잘 보라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도 돼?"
완전히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성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흐흐, 이 미묘한 분위기는 뭐지? 뭐 어쨌든 나야 좋지,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있잖아.'
"알았어, 고마워."
흘끔 성진의 표정을 살핀 그녀가 자신의 섬섬옥수를 활짝 펴 보였다.
"먼저, 손의 활용법부터 이해해야 해, 사람의 손은 일견 약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다고."
그녀는 주성진이 비무 약속을 지키겠다고 수결한 종이를 품에서 꺼냈다. 그리곤 종이를 위로 날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손날로 베고!"
찍……!
종이가 반으로 싹둑 잘린다.
"손톱으로 할퀴고!"
북……!
종이가 다섯 줄로 찢겨나갔다.
"주먹으로 내치고!"
주먹으로 비틀어 치자 종이가 눈발처럼 조각조각 날렸다.
그 순간 그녀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휘감자 조각난 종이들이 그녀의 손에 공처럼 뭉쳤다.
"잡아서 꽉 쥐면!"
종잇조각들이 쌀가루처럼 하얀 분말이 되어 피어올랐다.
성진은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이전이라면 어림없었겠지만, 내공이 급증한 자신도 손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호호, 여기까진 눈에 보이는 것들이야. 하지만 이렇게 하면?"
그녀가 갑자기 성진의 손목을 잡으러 왔다. 성진이 뒤로 물러서려 하자 고개를 젓는다.
"가만히 있어 보라니까,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호호."
그녀는 의기소침에서 벗어나 활달해 보였으나 반면에 성진의 머릿속은 짧은 순간 복잡해졌다.
'음, 만약 진 것에 앙심을 품고 나를 어찌한다면, 아니야 만약 그렇다면 난 상인으로서 자격이 없어, 내 눈과 직감을 믿자. 그리고 난 이들을 통해 얻어야 할 게 많이 있다고!'
휘리릭…….
눈 깜짝할 사이에 성진의 손목을 낚아챈 그녀가 살짝 굳어 있는 성진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호호, 안 잡아먹는다니까, 이봐, 손의 효용으로 가장 신비스러운 건 바로 금나수지. 이렇게 너의 완맥과 견정혈을 잡아 쥐면 큰 힘을 안 들여도 널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어."
"……."
"자. 이제 네 손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 봐!"
확인하나 마나 성진은 자신이 제압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길, 뭐가 신비스럽다는 건지, 이거야 원 도통 알 수가 없네.'
손목의 맥점을 쥐면 상대가 꼼짝 못 한다는 건 호신술을 조금이라도 익혔다면 대부분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성진 또한 비상시를 위해 배운 적이 있었고.
성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였다.
"힘을 쓸 수가 없어."
"호호, 바로 그거야, 난 지금부터 혈도 점혈법 180가지와 관절을 꺾는 관절기 120가지 초식을 너에게 알려줄 거야. 인간의 정교한 손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것들이지."
성진은 입을 딱 벌렸다. 많아도 너무 많은 것이다. 그래도 배우려는 의지로 두 눈이 불타오른다.
'그럼,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거리고!'
강설현은 금나수의 초식별 운용법을 상세히 설명하며 직접 시범을 보였다.
성진의 송곳 같은 질문에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친절하게 답변해주었다.
성진은 강설현에 무척 고마워했다.
'요요, 이거 쓸모가 무궁무진하겠는데, 행패 부리는 놈들에게 관절을 꺾어버리면, 하……!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줄 수 있겠군. 하하.'
성진은 자신의 성격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상인으로서의 기질이야 여전했지만, 부지불식간에 무인이 돼버린 느낌이었다.
대부분은 무공을 익히고 난 후의 변화지만 전생에서 맥없이 죽임을 당한 충격이 그를 변모케 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하, 새로운 무공을 배운다는 게 이리 즐거울 수가, 이제야 무인의 심정을 좀 알겠어.'
장시간의 가르침이 끝나고 이후 이어진 호화로운 음식과 화려한 분위기는 성진이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화려한 분위기의 일등 공신은 뭐니 뭐니 해도 세 미녀의 존재감이었다.
"하하하. 호호호……."
순간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변한 강설주가 입을 열었다.
"한데 동생, 이곳 천화각을 기원으로 운영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며……."
"네. 사실 그때는 천화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제가 실언했습니다."
강설주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난 그 이야기를 듣고 동생의 안목에 크게 감탄했어. 특히 짧은 순간 그런 판단을 내린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거든."
성진은 달짝지근한 술을 비우며 눈을 반짝거렸다.
'뭐라 말하지? 그래 그게 좋겠군.'
"사실 제가 자그마한 가게라도 하나 차리려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강설주의 큰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혹 숙박이나 요식업에 진출하고 싶은 것이야?"
성진은 말을 아꼈다.
"음, 그게 다는 아니고요, 아직 머릿속에 맴도는 거라 때가 되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성진이 최종적으로 염두에 둔 건 휘주 상단을 되찾고 이를 기반으로 중원 제일의 상단으로 우뚝 서는 거였다.
그러한 그의 원대한 꿈을 알 리 없는 강설주는 주성진이 사업을 한다는 자체를 특이하게 바라보았다.
"호호, 형산파의 제자가 사업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