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고서점에 가다
'룰루루…….'
주성진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하하. 예기치 않은 공돈이 생겼구나.'
전생에 큰돈을 자주 만져본 그에게 은자 50냥은 사실 큰돈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가 남긴 어마어마한 돈을 생각하면 은자 50냥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전생에서의 일이고 지금 상황은 전혀 달랐다. 지금 그에게 있어 은자 50냥은 가뭄에 단비 같은 귀중한 거였다.
잠시 후 주성진은 지금 장사 번화가에 들어서서, 고서점인 문진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부의 명으로 가짜일지도 모르는 형산파의 비급을 사려는 거였다. 어쨌든 겉으로 드러난 이번 여행의 목적인 만큼 반드시 완수해야 했다.
'설마 없지는 않겠지?'
그러면서 또다시 전생에 자신이 거처에 두고 온 형산파의 비급을 떠올렸다.
'제길, 그때 좀 잠을 줄이고서라도 볼걸, 뭐 할 수 없고, 기다려라, 비급아! 내가 찾으러 갈 테니…….'
고서점에 당도한 주성진은 자신을 맞이하는 염소수염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닳고 닳은 장사치의 모습이었다.
'음…….'
"뭘 사러 오셨습니까?"
"형산파의 비급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만."
"하하. 손님! 제때 잘 오셨습니다. 아마 내일 오셨다면 빈손으로 돌아가셨을 겁니다. 재고가 몇 권 없거든요."
주성진은 표 나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잘 팔린다는 건가? 아니면 바가지를 씌우려고?'
순간 서점 주인은 팔을 펼쳐 자신의 탁자에 놓인 책을 꺼내 들었다.
책 표지에는 형산파 원공검법이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고, 새 책 특유의 먹물 냄새가 났다.
"은자 2냥입니다."
"에이. 뭐가 그리 비쌉니까? 철전 500개에 주십시오."
가게 주인은 기가 찬 모습으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에서 찬바람이 씽씽 분다.
"안 팝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주성진은 냉정히 거절하는 서점 주인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음, 정말로 팔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보통은 흥정하기 마련이건만.'
"은자 1냥 드리겠습니다."
"입 아프니 그냥 가시지요."
"알았습니다. 살 테니까 왜 인기가 많은지 그 연유를 좀 알려주세요."
서점 주인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손님이 뭘 모르는 모양인데. 이게 요즘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고요, 여러 무관에서 교재로 채택하는 바람에 무관에 다니는 이들의 필수품이 되었다니까요. 하하."
"무관에서요? 왜요?"
"허허, 뭘 당연한 걸 물으십니까? 진짜 형산파의 비급이니까 그렇지요."
주성진은 당당하게 말을 하는 그를 바라보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음, 정말로 진짜일까? 사부님은 가짜라고 하셨는데.'
셈을 치른 주성진은 기왕 온 김에 고서점을 둘러보기로 했다.
"안을 둘러봐도 됩니까?"
"당연하죠. 특별히 싸게 드릴 테니 천천히 구경하십시오."
"하하. 믿어보죠."
순간 성진은 왜 고서점에서 출간된 지 오래되지 않은 비급을 파는지가 궁금했다.
"저기. 한데 여긴 고서점인데 신간을 파는 이유가 뭡니까?"
"그럼 손님은 왜 저희 가게에서 그걸 찾으신 건가요?"
"누가 있다고 해서요."
서점 주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바로 그겁니다. 잘 팔리는 신간을 비치해 두면 입소문을 타고 신간을 사러 온 사람들이 손님처럼 고서적도 둘러보거든요, 그 반대로 고서적을 사러 온 사람 중에 신간에 구미가 당겨 즉석에서 사는 일도 자주 있지요. 이게 다, 누구겠습니까? 바로 제가 생각해 낸 거랍니다. 하하."
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군, 손님 처지에서도 한곳에 머물면서 이것저것을 다 살 수 있으니 편리하겠군, 나중에 참고해야겠어, 그러고 보니 사부님의 지인도 사부님의 부탁을 받고 형산파의 사라진 비급이 있는지 고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걸 발견한 모양이군.'
주성진은 천천히 고서점 내부를 둘러봤다.
주로 상술에 관한 책 중에 본인이 읽지 않은 책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잠시 후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의 손에는 다섯 권의 책이 잡혀 있었다.
'이제 마지막 서고만 보면 끝인 게로군.'
성진은 발걸음을 옮겨 마지막 서고에 놓여 있는 책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같은 제목의 책 5권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귀원비록이잖아! 제길 흔한 거였나…….'
실망이 역력한 성진은 재빨리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음, 안 살 수가 없군.'
나중에 동굴에서 발견한 것과 대조하기 위해선 반드시 사야 했다.
주성진은 다시 계산대로 향하다, 여러 의문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음, 사람들이 뻔히 가짜인 걸 알고는 절대 사지 않을 것이다. 대략 책 한 권이 은자 1냥이라고 하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부님은 전에 발견한 형산파의 비급들은 모두 가짜라고 하셨지,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였고.'
모순이라면 모순이었다.
'혹 사부님이 가짜라고 말한 걸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진이 생각한 가짜라는 건 내용이 황당무계하고 엉터리인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의 사부가 말한 진의는 그게 아닐 수 있었다.
성진의 머릿속이 쉼 없이 돌아간다.
'혹시 내용이 그럴듯한 건 아닐까.'
성진이 생각한 건 책의 내용은 가짜는 아니지만, 제목과 전혀 다른 무공일 수 있다는 거였다.
무술 초보자나 삼류급의 무인들이야 책 내용에 만족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책 제목 상의 무공을 본 적도 없을 것이고.
'음 확인해 봐야겠지만 내 생각이 맞을지도…….'
그 순간 또 하나의 상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가만, 누군가가 진짜 비급으로 책을 만든다면?'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가령 최상위 초식만 삭제하거나, 아니면 고유 심법을 다른 허접한 심법으로 바꾸거나, 등등.
하여튼 어떤 방법이든 많이 팔릴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서점 주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성진의 다리는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제 갈 길을 찾아 계산대 앞에서 멈춰 있었다.
"손님 총 6권 다해서 은자 2냥만 주시지요, 싸게 드린 겁니다. 헤헤."
퍼뜩 정신을 차린 성진은 군말 없이 은자를 지급하였다.
"감사합니다. 손님, 저기 귀원비록은 아주 잘 사신 겁니다. 요즘은 유행이 지나 찾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꾸준히 팔렸던 비급이지요."
성진은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주인장, 그럼 혹시 귀원비록의 유래를 아십니까?"
"아이고, 알다마다요. 100년 전 중원 제일 낭인이라 칭송받던 유검천의 독문 무공이 들어 있지요. 일설에 의하면 그가 죽고 난 뒤 장례를 치르는 사이에 도둑이 비급을 훔쳐 달아났다고 합니다."
주성진은 곧바로 동굴에서 죽은 자를 떠올렸다. 아닐 수도 있지만, 직감은 그가 범인일 것 같았다.
잠시 후 서점 근처 객잔에 여장을 푼 성진은 동굴에서 습득한 귀원비록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발, 진본이기를…….'
주성진은 떨리는 마음으로 귀원비록을 펼쳤다.
그의 책 읽는 버릇은 바로 정독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엔 대강의 줄기를 파악하고 그다음부터 정독하는 거였다.
귀원비록의 첫 장에는 복잡한 인체의 경락구조와 기의 흐름이 묘사되어 있었고. 그다음 장에는 귀원심법이 서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셋째 장엔 장법이, 마지막 장에는 검법이 적혀져 있었다.
'음, 비무를 앞두고 있으니 첫 장, 둘째 장은 다음에 깊이 숙고하기로 하고 초식 위주로 살펴봐야겠어, 참고할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셋째 장으로 바로 건너뛴 성진은 귀원장법을 숙독하기 시작했다.
귀원장법은 모두 세 초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제1초, 귀원창천.
이것이 펼쳐지면 장심에서 푸른빛 장력이 상대를 향하여 폭사되어 간다.
특이한 점은 일체의 파공음이 없다는 것과 장력의 끝이 뾰족한 창처럼 날카로워 상대의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는 점이었다.
12성에 도달하면 상대는 한꺼번에 12개의 창에 찔린 것처럼 온몸에 구멍이 뚫려 처참하게 사망하게 된다.
제2초, 귀원곡천.
제2초 귀원곡천은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장법이다. 여타의 장법이 직선으로 뻗는 게 보통이나, 귀원곡천을 펼치면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장력이 휘어지게 되어 장애물이 있을 때 사용하기에 적합한 장법이다.
십이성으로 펼치면 연속적으로 모두 십팔 개의 장력을 펼칠 수 있다.
제3초, 귀원만천.
제3초 귀원만천은 살상범위가 넓은 장법이다. 장심에서 뻗어나간 장력이 부챗살처럼 퍼져나가기에 다수의 적을 살상하는데 유용한 장법이다.
12성에 이르면 사방이 모두 초토화되고 만다.]
넷째 장은 귀원검법 편으로 역시 3초로 이루어진 검식이다.
[제1초 귀원비천은 쾌속함에 근본을 둔 검식이다.
무엇보다 빛살처럼 빠른 발검이 중요하다.
마음이 일었을 때 상대의 목을 벨 수 있다면 12성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제2초 귀원천붕은 산악 같은 기세로 상대를 압도하는 검식이다.
시전하려면 튼튼한 하체가 받쳐 주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공의 힘과 근력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하여야 한다.
12성에 다다르면 이 세상 어떤 중병보다도 무거운 기세로 상대를 압살할 수 있다.
제3초 귀원창파는 죽음의 파도를 부르는 검식이다.
살상반경이 넓을 뿐 아니라 쉼 없이 상대를 몰아치는 검식이다.
12성에 이르면 내기가 유형화되어 사방을 검강으로 뒤덮을 수 있다.]
책을 덮은 성진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제길, 12성에 도달하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고유 심법을 익히지 않으면 12성은 고사하고 10성도 어림없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성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쩐다, 귀원심법을 익히려면 지금 심법은 버려야 하는데…….'
당장 고민한다고 해결될 건 아니었다.
아무리 청풍무결이 형산파의 기초 무공으로 형산파의 본 무공에 별 탈 없이 녹아든다고 하지만 귀원비록은 형산파의 무공이 아니었다.
'좀 더 공부하고, 고민해보자.'
성진은 생각을 멈추고 이번에는 고서점에서 산 귀원비록을 펼쳤다.
한데 시작부터 달랐다. 내공심법이 있긴 한데 그저 그런 토납법 수준이었다.
'하. 내용이 완전히 다르구나.'
껍데기만 귀원비록이지 전혀 다른 무공서였다. 그래도 참을성 있게 끝까지 읽어 보기로 했다.
샤라락!
'허허. 이게 뭐야!'
장법 편을 넘기던 성진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건 바로 자신이 익힌 태극오행장과 판박이였다. 단지 제목과 초식 명만 다를 뿐…….
'기가 차군, 일단 넘어가자!'
샤라락!
주성진은 별 기대 없이 다음 검법 편을 읽어 내려갔다.
한데 어느 순간 책을 보는 성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지기 시작했다.
'와. 대박! 대장장이 아저씨가 펼친 검법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겠어,'
그간 대장장이가 펼친 검법을 완벽히 재현해 내긴 했지만, 각각의 초식이 가지는 검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검법 편은 성진에겐 꼭 참고할 만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