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취구환을 복용하다
일을 끝내고 고개를 돌린 주성진은 공간이 있는 위치를 가늠했다.
'저기가 틀림없어.'
곧바로 성진은 검집째로 동굴 벽면을 두드렸다.
퍽…….
그러자 동굴 벽이 갈라지더니 공간 속 흙더미에 파묻힌 나무곽이 눈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야호! 그대로다!'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른 성진은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 미안하군, 분명 죽은 이의 소유물일 텐데.'
주성진은 나무곽을 꺼냈다. 거기까지는 전생에서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미련이 남는다.
'혹 뭐가 더 있는 것이 아닐까? 흙을 마저 덜어내 보자.'
주성진은 나무곽을 꺼낸 빈자리 뒤에 남아 있던 흙들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파헤쳤다.
잠시 후 뭔가가 손에 잡힌다.
'하하.'
손에 집어 든 것을 꺼내니 기름먹은 종이로 단단히 싼 책이었다.
'혹시 비급?'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재빠르게 기름먹은 종이를 뜯은 성진은 한 권의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 귀원비록(歸元秘錄)이라, 이거 횡재했군.'
성진은 비급을 읽어 볼까 생각하다가 그냥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성진은 나무곽 속의 취구환을 꺼냈다.
그는 전생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취구환 세 알을 모두 섭취할 생각이었다.
'먹어 치우는 게 최고야!'
사부와 사형제에게 미안한 생각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다른 거로 충분히 보상하려고 마음먹었다.
취구환을 꺼낸 성진은 차례로 밀랍을 벗겼다. 그 순간 청아한 향기 대신 지독한 악취가 동굴 내에 감돌았다.
그럴 것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대하니 이건 상상이다.
'도대체 뭐로 만든 거야. 지독하군!'
인상을 찌푸리며 급히 세 알을 입속으로 집어넣은 성진은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취구환은 성진의 뱃속에 들어가자마자 그 명성에 걸맞게 강한 약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지 백배로 퍼져나가는 웅혼한 힘을 느낀 성진은 차분히 심법을 운용하며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려 애썼다.
1주천, 2주천, 3주천…….
그렇게 사흘이 흘러갔다.
순간 운공삼매에 빠진 성진의 몸에서 취구환의 악취보다 더 심한 악취와 더불어 금빛 찬란한 서기가 반 시진 동안이나 그의 몸을 휘돌다 사라졌다.
눈을 번쩍 뜬 성진은 지독한 냄새에 코를 부여잡았다.
그는 자신의 몸속에 쌓인 탁기가 모두 배출된 것을 모른 채 원흉을 취구환 탓으로 돌렸다.
'아이코 지독하구나. 빨리 나가야겠다.'
후다닥 바위틈으로 빠져나온 성진의 시야에 막 떠오르는 태양이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라, 아침이네.'
그때였다.
'어어어, 하필이면 이때.'
급했다. 주성진은 후다닥 수풀 쪽으로 달려가 쪼그려 앉았다.
뿌지직…….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다행이라면 밖이라 냄새는 금방 사라져갔다.
한데 평소보다 변의 양이 많았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 이거 이상한데. 특별히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가만 그건가?'
주성진은 좋은 탕약을 먹으면 몸에서 나쁜 것이 배출된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내 몸에 안 좋은 게 그리 많았나?'
사실 그건 탁기로 배출되고 남은 찌꺼기 같은 것들이었다.
볼일을 마친 그는 그 자리에서 건강도인체조를 펼쳤다.
악록 서원에 가기 위한 사전 몸풀기였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라, 내 몸이…….'
평소보다 훨씬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활력이 넘쳤다.
한바탕 몸풀기를 마친 성진은 공력을 시험해보기도 했다.
공력을 끌어올리지도 않았는데 몸이 가볍고 활력이 넘친 거라면 분명 공력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틀림없이 공력이 늘었을 거야.'
주성진은 취구환을 먹기 전에는 어림도 없었던 작은 돌조각을 손에 올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푸석!
돌조각이 완전히 으깨져 버렸다.
"하하하, 하하하. 공력이 늘었어. 그것도 아주 많이! 하하하……."
한동안 악록산의 정상에선 주성진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악록산을 내려온 주성진은 산에 오르기 전에 들렀던 음식점에 들렀다.
주인이 그를 알아보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시간이 자신이 생각한 하루가 아니라 사흘이 흘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사흘이나 지났다고!'
씩 웃음이 흘러나온다.
'허허.'
전적으로 취구환 덕분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흘이나 운기조식에 빠져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전생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와구와구, 쩝쩝.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성진은 부지런히 발길을 악록 서원으로 돌렸다.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이었다.
걸어가며 주성진은 자신이 만나려는 장량이라는 친구를 떠올렸다.
'대과에 급제할 인물이라면 대단한 친구일 텐데.'
주성진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이럴 때 인연을 만들어 두어야지, 하하.'
그가 늘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유명한 어록이 있었다. 그건 '장사란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라는 거였다.
그만큼 사람과의 친분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럼, 인맥이 중요한 것이야.'
차근차근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던 성진의 눈앞에 거대한 솟을대문이 나타났다.
순간 주성진의 눈빛이 흔들린다.
솟을대문에는 악록서원을 마치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듯한 편액이 걸려 있었다.
'와 굉장하군, 글자에서 호연지기의 기운이 느껴진다, 역시 중원 4대 서원다워!'
주성진이 편액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무렵, 경비를 서는 자가 다가왔다.
"뉘시오?"
"음, 음 안녕하시오? 나는 장량이라는 유생을 만나러 왔소이다."
경비가 주성진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시오? 대문을 지나면 집객당이 보일 거요. 거기서 책임자를 만나시오. 단, 무기 소지는 불가하니 여기에 놓고 가시오."
주성진은 군말 없이 검을 꺼내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집객당이 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 무수한 전각이 성진의 눈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경사면이라 뒤편의 전각들이 훨씬 눈에 잘 띄었다.
'규모가 대단하군.'
집객당에 들어선 성진은 탁자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유생 차림의 중년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유생 장량을 만나러 왔습니다."
"장량을 만나러 왔다고요?"
"네. 직접 전해 줄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알았소이다, 바로 통지할 테니 저기 옆쪽의 접객실에서 기다리시오. 미안하지만 한참 중요한 시기라서 그를 데리고 외출은 불가하오."
주성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외출 금지라니. 그럼, 여기서 그를 가르쳐야 하는데, 설마 서원에서 불허하는 건 아니겠지?'
슬금슬금 걱정이 앞선다. 어쨌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한참 후 비쩍 마르고 피로해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그래도 눈빛만은 맑고 빛났다.
성진은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눈빛이 깨끗해.'
주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도 따라서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장량 유생입니까?"
장량은 담담한 모습으로 상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본인입니다, 무슨 일이신지?"
"전, 그대의 섬서 아저씨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섬서 아저씨라고 말한 것은 이무송이 일러준 거였다.
장량의 눈이 동그래지며 표정이 환해졌다.
"아저씨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대의 건강을 염려해서 특별히 저를 보낸 것입니다."
"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지금껏 후원해준 것만 해도 차고 넘치는데."
성진은 순간 미소 지었다.
'음, 뭔가 있긴 있는데, 뭐지 혹?'
하지만 아무리 그의 얼굴을 뜯어봐도 이무송과 닮은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아닌데…….'
부자지간이라도 얼굴이 닮지 않을 수는 있었다. 성진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그대에게 건강도인술을 가르쳐드리려고요."
"건강도인술요? 그거 혹시 아저씨에게 배운 것인가요? 아저씨가 무공 고수라는 말을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어서요."
성진은 잠시 생각했다.
'음, 역시 무공 고수란 말이지, 대장장이 아저씨가.'
재빨리 장량을 바라본 성진이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공부도 잘될 겁니다, 하하."
장량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요.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저희 유생 사이에서는 건강도인술을 배우자는 이야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거든요. 저희 경쟁 서원에서는 이를 도입했다는 말도 있고요."
"잘되었군요. 적당한 공터가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펼쳐 보이겠습니다."
장량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이 근처에 공터가 있으니 그리 나가자고요. 저, 한데 건강도인술을 동문수학하는 친구들에게 가르쳐주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진은 눈을 깜박였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어쩐다? 나 보고는 타인에게 전수하지 말라고 했는데, 장량은…….'
"음, 그 점에 대해선 제가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한데 그의 얼굴이 밝다.
"하하. 그러면 됐어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장량은 그의 친우들에게 가르칠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성진은 말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장량이 날마다 건강도인술을 펼치면 그의 동료들이 그에게 가르쳐달라고 떼쓰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에이. 모르겠다.'
"그럼 나가실까요."
한 시진이 흘렀다.
성진은 몇 번에 걸쳐 건강도인술을 펼쳐 보이곤, 그가 펼치는 것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 천재군, 천재야.'
장량은 영특할 뿐만 아니라 무에도 소질이 있었다.
잠시 후, 건강도인술을 펼친 장량이 얼굴의 땀을 옷깃으로 닦으며 성진을 바라보았다. 이번이 벌써 열 번째였다.
"성진아. 어때?"
둘은 나이가 동갑인 걸 알고 서로 말을 놓았다.
"잘했어, 이번 동작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어, 다만 아직은 힘이 좀 부족한데 차차 하다 보면 나아질 거야."
"하하. 고맙다, 친구! 이게 다 너의 자상한 지도 덕분이야."
"아니야. 네가 똑똑해서 그래."
돌연 둘은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
웃음을 그친 장량은 돌연 공터에 꽂아놓은 막대기를 바라보았다.
막대기의 그림자가 어느 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미안함과 아쉬움이 엿보인다.
"친구야, 어쩌지? 수강 시간이 다가와서……."
"어쩌긴 빨리 가봐. 반드시 대과에 장원 급제해라."
"고맙다. 1년 후 북경 만옥 찻집에 꼭 들러라, 사실 거긴 어머니가 하시는 찻집이야."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알았다. 반드시 갈게."
그 순간 장량이 바지춤의 주머니에서 전표를 꺼내 들었다.
"이거 약소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맛있는 거 사 먹어."
은자 40냥짜리 전표였다. 이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음식점의 점소이가 반년은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내 성의니까 받아둬."
"괜찮은데……."
"너, 공자님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유생에게 은혜를 모르는 인간이 되라는 건 아니겠지?"
"하하. 알았어. 잘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