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강설현을 만나다
주성진은 말을 건네며 그녀를 살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으니 그녀를 보는 건 실례가 아니었다.
'음, 전형적인 북방계 계통의 미인이군. 날씬한 데다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얗고, 거기에 콧날이 오뚝하니 뭇 남성들이 좋아할 상이야. 조금 도도해 보이는 게 흠이지만, 뭐 그 나름대로 인물값을 하는 것일 테니 그녀를 탓할 건 아닌 것 같군.'
그렇다고 성진이 첫눈에 그녀에게 반한 건 아니었다. 그에겐 전생에서의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길도 주성진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호호, 검을 찬 것으로 보아하니 무림인인가 봐요, 문파가 어떻게 되세요?"
느닷없는 호구조사다, 살짝 당황한 성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검을 찼다고 모두가 무림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대뜸 무림인이라고 물어보는 건 어느 정도 그녀에게 확신이 섰다는 이야기였다.
주성진은 그녀의 기세를 느낄 수는 없었으나 그녀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은 아까부터 눈여겨봤다.
'음, 그녀도 무림인인가 보군.'
성진은 배운 대로 어색하나마 두 손을 모으고 포권했다.
순간 상황을 봐서 형산파 출신을 밝힐지 말지를 판단하라는 사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뭐, 어때…….'
"반갑습니다. 형산파 제자 주성진입니다."
그녀의 얼굴에 살짝 동요가 일어났다 사라졌다. 설마하니 성진이 세인들의 뇌리에서 이미 잊힌 지 오래인 형산파 출신일 줄 몰랐던 거였다.
"아, 그렇군요. 다시 형산파가 활동을 시작한 건가요?"
"그전에 누구신지 알려주심이?"
"어마, 그걸 까먹고 있었네요. 전 강설현이에요, 소속은 조금 있다가요. 두 놈이 다가오고 있어서요."
주성진은 그제야 인기척을 느꼈다.
'이런, 내 실수다. 이런 곳에선 항시 긴장해야 하는 건데, 내가 너무 대화에 몰입했구나.'
저벅저벅!
다가오는 인물들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들로 험악한 얼굴 생김새가 전형적인 흑도의 무리 같았다.
'음, 저잣거리에 어슬렁거리는 놈들이구나, 분명 그녀의 미모에 반해 다가온 것 같은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흑흑, 소협 절 구해주세요. 못된 놈들이 저를 어찌하려고 해요."
이거야말로 날벼락이다.
'뭐라!'
곧바로 흑도의 무리가 여인으로 향한 시선을 주성진에게 돌렸다.
순간. 둘 중에 왼뺨에 칼자국이 길게 그어진 자가 누런 이를 드러냈다.
"어이, 좋게 말할 때 가진 것 모두 내놓고 꺼져!"
주성진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길, 될 수 있으면 싸움은 피하려고 했는데…….'
"싫다면?"
그러자 그자가 입에 음산한 웃음을 피우며 성진에게 다가왔다,
"흐흐, 간덩이가 부은 놈이구나."
주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히죽 웃었다.
"하하. 간덩이가 부은 건 당신 같은데."
"뭣이, 이 새끼가!"
어느새 품속에서 단검을 꺼낸 그가 빠르게 움직이며 단검을 휘둘렀다.
휙!
주성진은 허리를 젖혀 면상으로 날아드는 단검을 피했다. 그 순간 단단한 체구의 또 다른 흑도가 공격에 가담했다.
'역시 흑도 놈들이군…….'
또 다른 자는 주성진의 측면을 낮은 자세로 다가가 재빨리 단검을 찔러 넣으려 했다.
기습이 절묘해서 자칫 주성진의 허리가 피로 물들 것 같았다.
'이 자식,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주성진은 냉소를 지으며 재빠르게 손날로 그의 팔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가 놀라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공격을 막은 주성진이 눈알을 부라리며 앞으로 나섰다.
흑도 둘은 주성진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며 곧바로 꼬랑지를 내리려 했다.
'흥, 도망을 치려고!'
주성진은 팽팽히 당겨져 있는 활줄에서 쏘아져 나온 것처럼 빠르게 달려 나갔다.
'헛!'
흑도들의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간 순간,
얼굴에 흉터가 그려진 자의 턱이 주먹에 맞아 옆으로 젖혀졌고, 그와 동시에 주성진의 발이 또 다른 자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퍽, 퍽!
"으악, 으악!"
한편 팔짱을 끼고 구경하던 강설현이 배시시 웃었다.
"와, 빠르구나, 호호."
그 순간 주성진은 사부를 떠올렸다.
'이것 참, 얻어맞으면서 익힌 사부의 무공인데 이렇게 요긴하게 써먹을 줄은 몰랐구나, 그나저나 날 끌어들인 영악한 여인에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구나.'
주성진은 슬금슬금 도망치는 흑도의 무리를 내버려 두고 여인에게 눈을 돌렸다.
"소저! 너무한 것 아닙니까, 가만있는 날 이용하다니?"
"어머, 연약한 여인을 그냥 내버려 두는 건 당당한 사내가 할 일이 아니죠."
"이보시오, 댁도 무림인인 것 같은데 무림인에게 여자, 남자가 어디 있소이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생긋 웃으며 주성진에게 다가왔다.
순간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풍겨 나왔다.
'음…….'
"호호, 그래도 이런 상황이면 도와주는 게 도리 아닐까요. 좋아요, 나가요, 내가 근사한 저녁과 숙소를 제공할 테니까."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지,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아니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주성진이 머뭇거리는 순간 손님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앗, 천화각의 삼선녀다!"
'천화각?'
주성진은 기억을 헤집어 보았지만, 장사에 천화각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음, 20년 사이 새로 생긴 객잔인가 보군.'
그 순간 그녀는 본인을 알아보는 이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놀란 표정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호호. 소란을 피워 죄송해요, 이곳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와봤답니다. 그리고 이건 손님 하나를 채가는 보상이에요."
그녀가 주인에게 은자를 넉넉히 집어주고는 주성진에게 손짓했다.
'호호, 형산파의 제자라, 이거 재미있겠어. 무림의 새로운 소식에 항상 목말라 있었는데.'
주성진이 멀뚱히 서 있자, 그녀가 또 한 번 재촉한다.
"뭐해요? 가자고요."
꼭 여우한테 홀린 기분이다. 그런데 본인도 모르게 주성진의 몸은 이미 들썩이고 있었다.
'허허, 이거야 원.'
주성진은 사뿐히 걸어가는 그녀를 뒤따라갔다. 그 순간.
"저는 올해 스물인데 소협은 몇이세요?"
성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쳇, 그냥 말을 놓아 버릴까.'
"하하, 저와 동갑이군요."
"호호호, 대충 그럴 것 같았어요,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강설현은 순간 속도를 높였다.
'한 번 더 골려볼까. 호호.'
그녀의 발이 지면에 닿을 듯 말 듯 쭉쭉 앞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날 또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구나!'
주성진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따라 경공을 펼쳤다.
순식간에 주변의 경관이 바뀐다. 길은 점점 넓어졌고 주변의 건물은 크고 웅장했다.
순식간에 장사의 번화한 중심지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사람들을 피해 아예 우마차가 다니는 길로 쭉쭉 달려갔다.
주변의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강설현은 사람들을 의식하며 미소 짓고 있지만, 주성진은 딴 사람들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길, 열심히 수련했건만…….'
역시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강설현은 주성진이 뒤처지자 속도를 줄이더니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얼굴에 보일락 말락 미소를 지으며 성진을 바라본다.
'호호, 다 기울어가는 문파 출신치고는 그래도 제법인걸…….'
잠시 후, 주성진이 그녀 앞에 다다르자 박속같은 치아를 드러냈다.
"소협, 천화각을 아시나요?"
"모릅니다."
주성진이 퉁명스럽게 답하자 그녀가 미소를 머금었다,
"기분이 언짢은가 봐요, 저는 소협이 배고픈 것 같아 빨리 가려 했을 뿐인데."
주성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휴, 여우 뺨치는군. 어리바리하게 굴다간 계속 말려들겠어.'
주성진은 자신의 본모습을 일부 보이기로 했다.
"아, 그래요, 제가 대붕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군요."
"어머나, 글자 좀 읽으셨나 봐요."
"하하,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소저! 배고프니 빨리 가기나 합시다."
'뭐야…….'
얼마 가지 않아 대로변 옆의 화려하고 웅장한 3층 건물 앞에 당도했다.
'여기가 천화각인가 보군, 보통 이런 곳은 눈요기할 만한 것들이 있을 텐데, 안쪽에 있으려나.'
성진이 생각하는 것은 으레 고급 객잔에 가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보통은 건물 안쪽에 있는데 아름다운 꽃들을 심어 놓거나, 기암괴석이나 인공호수를 설치해서 사람들이 식사하면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어때요?"
"뭐, 그렇습니다만."
강설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수려한 건물의 외관만 봐도 감탄하는 사람들이 즐비한데 주성진은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그를 방금 허름한 객잔에서 데려오는 길이었다.
'호호, 시골뜨기가 날 놀라게 하네. 좋아, 오늘 저녁은 무료하지 않겠어.'
건물 안에 들어서니 양탄자가 깔려 있고 고급스러운 장식들이 주성진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멋들어진 수염을 휘날리며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이 다가왔다.
"막내 아가씨, 그곳에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총관님, 영계가 아닌 보통 닭으로도 일품인 동안자계를 만들어내더라고요."
"아, 그래요. 저희도 원가 절감하려면 연구를 좀 해봐야겠군요, 한데 같이 온 분은?"
총관은 아까부터 죽 주성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성진도 이를 느끼고 온몸이 긴장 상태다.
'뭐지? 얼굴은 웃고 있는데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
"아, 제 손님이에요, 하루 머물다 갈 거랍니다. 언니들은 방에 있나요?"
"아닙니다. 특1관에 단골손님이 오셔서……."
"아, 그래요, 제가 외출하길 잘했네요. 호호."
성진의 이모조모를 엿본 총관은 그를 경계 대상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면 우선 이분을 객실로 안내……."
그 순간 강설현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특2관에 묵을 거랍니다, 그리고 이분이 식사 전이니, 그곳으로 맛있는 요리를 가져다주세요. 물론 술도 곁들여서."
"특2관에 묵으려면 규칙이 있는데요."
"알죠, 제 손님은 무림인이랍니다. 그리고 소속과 무공도 직접 확인했답니다."
"아, 그래요. 하하."
성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염두를 굴렸다.
'음, 특2관이라는 곳이 무림인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로구나. 규칙이란 건 자격 심사일 테고, 한데 왜 굳이 무림인 전용 별관을 만든 걸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음, 물어봐야 알겠구나. 이것 좀 흥미로운데.'
주성진의 추측대로 건물 안쪽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정원 끝 쪽에는 높다란 담이 솟구쳐 있어 외부를 단단히 차단하고 있었다.
주성진은 주변 경관을 보면서 묵묵히 걸어갔다. 옆에서 나란히 걷던 그녀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특2관에 도착할 무렵이 되어서야 성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봐요, 이런 곳에 자주 와봤나요?"
전생에서 주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수도 없이 고급 객잔을 들락날락한 성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아닙니다. 관련된 책을 보면서 상상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저 사람 뭐지?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는데…….'
"호오, 그래요, 그럼 책에서 본 것이랑 비교해서 저희 천화각을 평가해주세요."
주성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주저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상황은 고려 않고 순수하게 사업성에 대해서만 말하면 좀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