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주성진 환생하다 (3)
거울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막상 18세라는 말을 들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격동되었던 마음이 환희로 물들어갔다.
'하하, 내 나이 18세라……. 그렇다면 얼추 20년이 젊어진 건데…….'
"사형, 혹 아까 사형들의 얼굴을 봤나요?"
주성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화인(火印)처럼 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전생에서 기억력 하면 남들이 부러워했던 그였다, 하지만 우쭐했던 마음도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놓았던 두 사람이 떠오른 거였다.
'그러면 뭐 하냐고, 가까이 지낸 사람의 됨됨이도 알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너무 억울하다.
'아아, 그놈들만 아니면 휘주 상단의 상단주가 되는 거였는데.'
그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주성진은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제 앞만 보고 달리자, 지난 일은 흘려버리고.'
그 순간 진한수의 말이 이어졌다.
"헤헤. 사형, 저희 간에 우애는 사부님이 부러워할 만큼 아주 좋아요."
"하하. 그러냐! 정말 다행이구나."
주성진의 말은 진심이었다.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진한수는 사형제들의 이름과 성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성진은 자신이 본 인상과 대조하며 진한수의 말을 토씨 하나까지 기억하려 애썼다.
"……. 이상이에요. 사형."
"어휴 고맙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 여기는 어디냐?"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터전이었기에 이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게다가 사부나 사형제라는 호칭은 특정한 집단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었기에 궁금증이 태산 같았다.
기대 반, 우려 반, 두근두근…….
"여긴 형산파예요, 사형!"
"뭐, 형산파!"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없었다. 주성진은 전생에 본인이 상행을 떠나기 전, 거처의 지하에 꼭꼭 숨겨둔 비급을 떠올렸다.
'아, 아버님이 주신 무공이 형산파의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인연의 굴레인가? 그러고 보니 죽은 그자도 성진이었지, 허허. 어쨌든 여기가 나쁜 곳은 아니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긴 한데…….'
주성진은 빠르게 형산파의 몰락을 떠올렸다.
'음, 지금이 언제인지 모르겠구나, 일단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군.'
그 순간 우울한 표정의 진한수가 눈에 들어왔다.
"음, 뭐 한때는 오악 검파로 이름을 떨쳤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후후."
진한수의 씁쓸한 표정을 보니 자신도 동조되었는지 마음이 씁쓸해진다.
'그래! 10년 전 엄청난 사건으로 떠들썩했었지.'
주성진은 장사하러 다니면서, 형산파 문도들의 실종사건에 대해 수도 없이 들었었다. 심지어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조차 술안주 삼아 그때 그 일을 가지고 핏대를 세우곤 했었다.
마교의 기습공격에 당했다는 사람부터 기녀가 몰래 탄 극독에 모두 죽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있었다.
주성진은 내막을 좀 더 알고 싶었다.
"음, 음, 저 말이야. 네 표정을 보니 형산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진한수는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다 아는 이야기이니 말할게요. 정확히 삼십 년 전에 오악 검파 대회에 참가하러 갔던 장문인 포함 주력 고수들이 모조리 실종되었어요, 그 일은 지금도 풀지 못한 무림의 대사건으로 남아 있지요. 뭐 그 바람에 형산파는 오악 검파에서 제외되었고 지금은 이류 문파보다 못한 신세이지요."
이류 문파보다 못하다면 그저 그런 삼류 문파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주성진을 경악하게 한 것은 실종사건이 일어난 시기였다.
"뭐라, 30년 전이라고!"
갑자기 핏대를 세우는 주성진을 보며 진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네. 분명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이죠."
주성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본인이 기억하는 건 분명 그 사건이 10년 전에 일어났었는데, 진한수는 30년 전이라 못 박았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그렇다면 내가 20년 후로 환생했다는 말인가!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저. 사형?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주성진은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야."
주성진은 급속히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다시금 생각하니 아주 최악은 아니었다.
주성진은 전생의 끈을 이어갈 희망을 본 거였다.
'이크.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하지만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내가 미래로 환생하다니…….'
그 순간 진한수가 불쑥 가까이 다가왔다. 뭔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다.
'사형이 말을 할 줄 아는 걸 보니 분명 글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저, 사형, 설마 글은 까먹지 않았겠죠?"
"글?"
반문한 주성진은 잠시 생각했다.
'왜, 묻지? 아, 내가 글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저러는구나.'
글이야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보단 못해도 남들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물론이다. 글은 모조리 다 기억하고 있단다."
진한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하하, 사형, 저는 사형이 글도 잊어버렸을까 봐 조마조마했다고요. 아마 저뿐만 아니라 사형들도 조마조마했을 거예요."
"아니, 그건 왜 그런 거냐?"
"그게요, 사부님이 숙제를 내주는데 늘 사형이 가르쳐줘서 넘어가고 있거든요."
'아하…….'
주성진은 죽은 성진이라는 친구가 다른 사형제보다 글재주가 뛰어나다는 걸 알았다.
"하면 글은 사부님이 친히 가르치시는 거냐? 아니면 글 선생으로부터 배우는 거냐?"
"사부님이 전에 기본적인 것은 가르쳐 주셨지만, 그 후부터는 각자 독학하고 있어요, 왜냐면 사부님이 늘 바쁘시거든요. 형산파의 대소사는 사부님이 모두 처리하고 계세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는 분명 바쁠 거야, 제자들이 아직 성인이 아니니까, 여러 가지 뒤치다꺼리할 게 많을 거야.'
"아, 그렇구나."
"사형, 그러면 무공은 어때요?"
주성진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무공! 내가 잠시 잊고 있었어, 여긴 성세가 예전보단 한참 못하지만 어쨌든 무림 문파잖아.'
"음, 미안하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구나."
한데 진한수의 반응이 의외다, 그다지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주성진은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뭐, 괜찮아요, 사형의 몸이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근 10년 동안 그것들만 죽어라 반복했는데 모를 리가 없어요. 제가 이따가 펼쳐 보일게요."
찌푸렸던 주성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그렇지, 몸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고맙다. 부탁인데 천천히 여러 번 보여주라."
"알았어요. 그런데 사형, 뭐 그리 좋아할 것 없어요, 공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뭐, 공포의 시간?"
"네, 그 시간이 바로 사부님과 대련하는 날이에요. 뭐 그냥 사부님께 먼지 나도록 얻어터지는 날이죠,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사부님은 막싸움의 대가이세요. 저희는 그런 사부님과 맞서야 하고요."
막싸움이라는 소리에 주성진은 저잣거리에서의 패싸움이 떠올랐다.
그는 동네 불량배들이 서로 이권을 차지하려고 살벌하게 싸우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한 적이 있었다.
순간 진한수가 몸을 부스스 떨었다.
"사형, 사부님은 온몸이 무기예요. 그리고 예측불허에다 빠르기는 얼마나 빠른지… 날다람쥐가 따로 없다니까요."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부적으로 싸움질을 잘한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도통 알 수가 없네, 사부라는 사람이 왜 형산파의 무공을 놔두고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무슨 꿍꿍이라도…….'
"저 말이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 사부님은 형산파의 무공을 쓰지 않는 거냐?"
순간 진한수는 동문서답 같은 말을 했다.
"사부님은 늘 대련은 실전처럼 해야 한다고 강조하세요. 세상에는 기기묘묘한 수법이 많기에 서로 간에 익숙한 대련을 할 바엔 차라리 혼자 연무하는 게 낫다는 거죠."
"……."
"저는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사형 그거 알아요? 저희가 얻어맞으면서 사부님이 펼치는 기술을 많이 훔쳐 배웠다는 것을요."
"오, 그래, 하면 형산파의 무공은?"
잠시 뜸을 들인 진한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자, 그럼 저희가 익힌 무공을 말할게요. 먼저 형산파의 기초 무공인 청풍무결이 있어요, 그리고 삼재 검법과 육합권도 있지요."
주성진은 익히진 않았어도 삼재검법과 육합권은 잘 알고 있었다.
'에게 뭐야, 저게 다라고! 정말로 형편없이 형산파가 몰락했구나.'
그렇다고 얼굴에 실망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억지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바로 잡은 주성진은 입을 열었다.
"청풍무결은 어떤 무공이냐?"
"청풍무결은 고유호흡법과 720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까 제가 기초 무공이라고 한 것 기억하시죠?"
"그래."
"그래서 말인데, 사실 청풍무결은 진정한 무공이라고 볼 순 없어요. 본 무공을 배우기 앞서서 익히는 기초니깐요. 달리 말해 무공을 익히기 좋도록 몸을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
"뭐, 사부님이 청풍무결은 절대 그저 그런 무공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잘 모르겠어요. 막상 해보면 우스꽝스럽게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마치 광대가 춤을 추는 것 같거든요. 아, 물론 이는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에요, 사형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부님이 펼친 것을 본 적이 있을 텐데……?"
그런 질문을 예상한 듯 진한수는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헤헤. 그게요. 사부님도 마찬가지세요. 사부님이 이것 때문에 늘 한탄하시죠, 막싸움을 익히기 전에 청풍무결을 익혔다면 제대로 된 정수를 펼칠 수 있었을 거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뭐냐? 너의 말은 막싸움이 방해되었단 말이냐?"
"네, 몸이 막싸움에 길들어 있어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죠."
주성진은 무공을 잘 모르는 처지라 아직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대로 상술을 배우지 않았어도 뛰어난 장사꾼을 여럿, 본적이 있었다.
그들은 타고난 기질과 숱한 경험을 통하여 큰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글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뭐, 막싸움의 대가라는 것이 그런 것과 비슷한 이치 아닐까……. 한데, 가만.'
주성진은 형산파에 무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좀 이상했다.
상단만 하더라도 상인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을 포함한 다양한 상술과 사례집이 서고에 비치되어 있었다.
아무리 형산파에서 주력 무인들이 대거 실종되었어도 본 파에는 무공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 순간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 도난당한 것인가? 내가 가진 그 형산파 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