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놈들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계율원주의 말에 본전에 모여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 대인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방장의 말에 천수신의가 어깨를 으쓱 했다.
“나야 사람 고치는 재주밖에 없는데, 나가서 무엇 하겠습니까?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미타불. 백 대인이 계시기에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방장이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정 소협을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정호기가 나서서 조당을 상대한다고 했지만, 소림은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소림의 싸움이니 의당 자신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조당을 상대하는 것을 맡았던 것이다.
“자, 그럼 가시지요.”
뎅! 뎅! 뎅! 뎅!
요란한 타종 소리가 산중을 뒤흔들었고, 방장을 비롯하여 모두가 연무장으로 향했다.
***
쾅!
소림의 산문이 박살이 났다.
“하하하하! 땡중들은 목을 길게 늘어뜨려라! 이 조당이 친히 목을 쳐 줄 것이니!”
광소를 터뜨리는 조당의 앞에는 승도가 도열해 있었고 그중에는 정호기도 끼어 있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정호기보다 큰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에 그 특이한 외형으로 인해 조당의 눈에 띄고 말았다.
“네놈이 여기 있다니! 끝까지 나를 조롱했구나!”
뻗치는 살기가 정호기를 향해 쏘아졌지만, 그것을 받는 정호기는 조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저렇게 변한 것이지?’
조당의 말보다는 외모에서 의구심을 느낀 정호기였다.
‘뭐, 어쨌거나 모든 것이 오늘 끝나겠군.’
정호기가 개방과 일월문에 의뢰를 하여 정파의 움직임을 파악한 결과, 소림으로 향하는 일련의 흐름을 감지했다.
그것을 확인한 정호기는 조당의 목적지가 소림이고, 이미 그 행보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알자마자 정호기는 천수신의와 현허 대사에게 흑룡문이 소림을 목표로 출발했다는 것을 알렸다.
즉, 소림은 무당처럼 불시에 기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충분한 대비를 해 놓고 흑룡문을 맞이한 것이다.
“놈!”
수하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조당이 정호기를 목표로 신형을 날렸다.
“아미타불!”
커다란 불호성과 함께 조당의 앞을 막아선 것은 늙고 젊은 서른여섯 명의 승려였는데, 단순한 승려들이 아니었다.
전대 십팔나한과 현 십팔나한이 그들이었으니, 가히 일개 문파와도 필적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조 시주는 발길을 멈추시지요.”
조당의 앞을 막은 현정 대사가 봉을 내밀며 말했다.
“비켜라!”
무작정 검을 휘두르는 조당을 보면서 현정 대사는 자신의 느낌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혹시나 했거늘. 역시 마가 끼었구나.’
비록 사파이지만 조당은 이렇게 무례한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다 지금 몰골은 개방도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개진!”
현정의 말에 전대 십팔나한이 진을 이루었고, 현 십팔나한이 그들의 외곽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는 외부에서 있을 공격을 방비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지만, 만일 진을 이루던 이들 중의 누구 하나가 죽으면 그 자리를 대신하고자 함이었다.
쩡!
검과 봉이 만나자 쇠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리며 조당의 신형이 두 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를 중심으로 진이 본격적으로 발동되었다.
“크윽!”
태산을 짊어진 것 같은 압력이 조당의 두 어깨를 짓눌렀다.
“이 따위 사술로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다!”
주위에는 인간으로 만들어진 벽이 둘러 있었고, 그곳에서 봉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조당을 공격했다.
온갖 곳에서 튀어나오는 봉을 보고 있노라면 수십, 수백 명이 봉을 들고 찌르는 것 같았다.
따다다다다다당!
봉과 검이 만나길 수십 차례. 그 많은 공방이 이루어졌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봉은 계속해서 하늘의 우박이라도 되는 것처럼 쏟아졌다.
“내가 바로 조당이다! 내가 바로 흑룡문의 문주다!”
크게 외친 조당이 강하게 검을 휘둘렀고, 그의 검에서 수백 마리의 혈랑이 튀어나왔다.
***
‘끝났군.’
조당이 십팔나한진의 중심에 서는 것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조당의 실력이라면 십팔나한진을 통과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이후 정상적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었다.
서걱!
조당이 십팔나한진에 뛰어들자마자 올라온 흑룡문도의 목을 벤 정호기가 다시 조당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나 깔끔했던 조당이 어쩌다 저런 모습이 된 거지? 혹시 그동안 폐관이라도 한 것일까? 그 와중에 주화입마가?’
폐관을 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발전이 있었다면 십팔나한진을 깨고도 힘이 남을지 몰랐다.
‘그래도 걱정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물체가 보였다.
‘천뢰!’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천뢰의 목표는 이제 막 달려오기 시작하는 승도 속의 인물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피해!”
쾅!
정호기의 외침이 조금 늦었다.
뒤이어 연속적인 폭발음이 들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죽여라!”
흑룡문의 본대가 부서진 산문을 통해 산사태처럼 밀려들어왔고, 홍수처럼 담장을 넘었다.
“막아라!”
두 세력이 맞부딪치려는 그때, 정호기의 내공이 호아로 밀물처럼 밀려들어가는 그때, 거대한 폭음이 세상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콰쾅!
천뢰가 터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폭발음이 들리더니, 그 폭발의 여파에 휘말린 이들이 마치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흐흐흐흐. 내가, 내가 바로 흑룡문의 문주다!”
입가에 침을 흘리는 조당은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옷은 모두 찢어지고 신발도 사라져서 맨발이었으며,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정호기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야 한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살수를 펼치는 조당을 보면서 정호기는 처음 하려던 계획을 실천하기로 했다.
“조당! 나 정호기가 여기 있다!”
광기 어린 눈으로 사람들을 학살하던 조당이 정호기의 외침을 듣고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깡!
“헉! 금강불괴?”
그 틈을 노리고 속가제자 한 사람이 검을 휘둘렀지만, 오히려 튕겨 나갔다.
‘미련한 놈! 기껏 주의를 돌렸더니만.’
조당의 고개가 그 사람을 향할 때, 정호기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검을 발로 찼다.
챙!
위기감을 느낀 것일까?
속가제자의 검을 맨몸으로 받은 조당이 정호기가 날린 검은 쳐 냈다.
“조당!”
다시금 조당의 이름을 부른 정호기가 땅을 박차고는 소림을 벗어났다.
“정 소협!”
방장의 부름에 정호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음을 날렸다.
-제가 상대를 하겠습니다. 일단 적도들을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조당의 무공은 상상 이상입니다. 상대를 하다 안 될 것 같으면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호기를 따라 조당이 신형을 날리자 몇몇 인물들이 따라붙으려고 했지만, 정호기의 만류로 모두 걸음을 멈추었다.
***
“여기가 좋겠군.”
정호기가 내려선 곳은 사방 이십여 장은 됨직한 분지였고, 수백 장은 되는 낭떠러지로 가로막힌 곳이었다.
“이놈! 겨우 도망을 친 곳이 여기냐!”
허공에서 떨어지는 조당이 바로 검을 휘두르며 공격했다.
챙!
한 번의 부딪침이 끝나자마자 땅을 디딘 조당이 검을 찔렀다.
크헝!
거대한 혈랑 한 마리가 대기를 찢으며 정호기에게 쇄도하였는데, 그 찢는 소리가 마치 포효하는 것 같았다.
쾅!
‘으음… 역시 한 단계 올라섰구나.’
절영도로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광랑십삼검을 펼쳐야겠군.’
그러기 위해 이목이 없는 곳을 골라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압!”
기합을 외친 조당이 십여 마리의 혈랑을 쏘아내고 그 중심에 뛰어들었는데, 마치 혈랑들의 호위를 받으며 정호기에게 돌진하는 것 같았다.
‘자유자재로 혈랑을 꺼내다니, 한 단계가 아닌 것인가?’
정호기 역시 자신의 혈랑들을 쏘아 보내고는 조당을 향해 땅을 박찼다.
콰콰콰쾅!
혈랑들의 전투도 치열했다.
목덜미를 물어뜯고도 힘이 남은 혈랑은 다른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채채채채챙!
검과 도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고, 손과 손이 만나며 폭음이 터졌으며, 발과 발이 만나는 곳에서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흑룡문의 문주다!”
또다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조당을 보면서 정호기는 어째서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것 같군. 그것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왜 이렇게 변했는지는 몰라도 무공이 높아진 것만은 확실했다.
아까 속가제자가 금강불괴라고 외쳤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호신강기를 압축하고 압축해서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어떻든 간에 무공은……. 호각이다!’
서로가 공격을 공격으로 막는 상황이었다.
방어라는 개념은 없었다.
잠시라도 틈이 보여 밀리는 상황이 되면 그 즉시 싸움은 끝이 나리라.
‘밀렸다!’
조당이 만들어 낸 혈랑 한 마리가 싸움의 승자가 되어 정호기를 덮쳐 오고 있었다.
‘역시 검을 가지고 올 것을…….’
검법과 도법은 엄연히 차이가 있었기에 검법을 도법으로 시전한 정호기의 광랑십삼검의 예기가 조금 부족했었던 모양이었다.
‘팔 하나를 내준다!’
덮쳐 오는 혈랑을 왼쪽 어깨로 막을 심산이었다.
혈랑이 벌린 아가리로 왼쪽 팔을 밀어 넣고는 찔러 오는 조당의 검을 도로 쳐 냈다.
쾅! 서걱!
폭발음과 동시에 혈랑이 정호기의 왼쪽 팔을 덥석 물었는데, 그 순간 정호기의 왼팔이 어깨부근에서 잘렸다.
뿜어지는 피를 내공을 이용해 지혈한 정호기가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투툭.
땅에 내려선 정호기의 발에 채인 돌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은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
공격을 성공시켰음에도 조당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정호기의 잘린 팔을 위로 들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로 머리를 적시는 중이었다.
“흐음, 좋구나.”
한껏 혈향을 들이쉰 조당이 정호기에게로 눈을 돌렸다.
“배신자의 피는 달콤한 법이지.”
머리를 타고 흘러내린 정호기의 피가 입가를 지날 때, 그것을 핥아먹은 조당이 입맛을 다셨다.
‘한 방에 끝낸다!’
조당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웅! 웅! 웅!
정호기는 호신강기마저도 거두고 그것들을 모두 호아에 집중시켰다.
쩍!
투입된 내공을 견디지 못한 호아의 몸에 금이 갔지만 정호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내공을 쏟아 부었다.
정신은 온전치 못해도 위기감은 느꼈는지 조당도 자신의 검에 내공을 밀어 넣었다.
우웅!
시퍼런 강기가 조당의 검을 타고 솟아오르더니 무려 일 장에 달하는 검기를 만들어 냈다.
안으로 축약시킨 정호기의 기와는 다른 모습이었고, 휘황찬란한 그 빛은 너무도 화려했다.
“하압!”
“죽어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고, 검기와 도기가 부딪쳤다.
쾅! 쩡!
우르르르릉.
두 사람이 만들어 낸 폭발의 여파를 견디지 못한 절벽이 무너져 내렸고, 그곳으로 튕겨 나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난 내 할 일을 다 했어.’
피투성이가 되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정호기의 눈에 부서진 호아의 파편에 난자되어 조각조각 갈라진 조당의 살점들이 보였다.
내력이 비슷한 상황에서 충돌했지만 불리한 것은 팔이 하나 없는 정호기였다.
하지만 승패를 가른 것은 우습게도 무기의 질이었다.
조당의 검은 흑룡문이라는 거대 사파의 수장이 사용하는 것인 만큼 날카롭고 단단했다.
하지만 정호기의 도는 그것에 미치지 못했기에 조각조각 부서진 것이다.
그 조각들이 비산하며 두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는데, 호아에 깃들어 있는 힘의 방향에 있던 조당이 더욱 많은 조각들을 뒤집어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강기를 두른 수만 개의 도의 파편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암기와도 같았다.
물론 정호기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속절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중이었으니까.
‘후회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래도 웃으며 죽을 수 있겠구나.’
비록 자신은 죽을지라도 가족들은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백수련과 유옥접, 당화미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뒤이어 나상진과 영초린의 얼굴도 떠올랐다.
‘너무 사실적이군.’
가족보다 영초린의 얼굴이 더 뚜렷이 떠오른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간절한 얼굴에 입만 뻥긋거리며 손을 내미는 우스운 모습으로.
‘오냐, 그렇게 나와 함께 가고 싶다면 잡아 주마.’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민 정호기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동생은 하나가 아니었다.
둘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나상진, 사준우는 왜 안 보이는 거야?’
속으로 투덜거릴 때, 영초린의 모습이 흐려졌고 이내 눈이 감겼다.
***
“아직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입니까? 형수님이 워낙에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뼈가 두 개나 더 부러졌다고 천수신의 님이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안 됩니다! 형수님은 접근 금지령이 내려졌으니, 나중에 천수신의 님의 허락을 받고 오세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뜬 정호기의 눈에 천장이 보였다.
‘산 것인가?’
그때 보았던 영초린의 얼굴이 환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흠…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군.’
혈신으로 침상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옆방에서 시끄럽게 굴었었다.
‘하지만 같지 않지.’
꼼짝하지 못하는 상황은 같을지라도 내용은 전혀 달랐다.
“으윽!”
정호기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온몸을 감싸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것을 들었는지 문을 벌컥 열며 영초린이 들어왔다.
“대, 대형!”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날리는 영초린의 뒤로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과 자신을 지켜 준 사람들이.
‘난 살아 있구나.’
창을 통해 밝은 햇살이 정호기의 얼굴을 비추었고, 그런 정호기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