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동요하는 기운들이 느껴지는구나.’
흑룡문을 감시하는 이들은 하나둘이 아닐 것이었다.
비록 조당이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나 흑룡문의 본거지인 이곳을 감시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보여 주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가서 알려라. 조당의 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정호기는 만약 지금 이 순간 흑룡문의 본대가 소림을 무너뜨리고 있다면, 조당이 소림에 오래 머물지 않고 되도록 그곳을 빨리 떠났으면 했다.
본거지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오길 바라는 것이다.
한 발, 두 발, 세 발…….
첫 걸음에 호아를 뽑고, 두 번째 걸음에 기를 두르고, 세 번째 걸음에 땅을 박찼다.
뎅! 뎅! 뎅! 뎅!
정호기를 발견한 흑룡문의 정문에서 타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이내 사람들이 망루로 몰려 정호기를 보았다.
“적이다!”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땅을 박차고 날다시피하여 정문에 도착한 정호기가 호아를 힘껏 앞으로 뻗었다.
펑!
“허…….”
나상진과 영초린마저 입을 벌리고 탄성을 발할 정도로 정호기가 보여 준 한 수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높이 사 장, 너비 삼 장은 됨직한 커다란 문이 정호기의 한 번 손짓에 산산조각이 나서 비산했기 때문이었다.
도끼로 백번을 내리쳐야 겨우 작은 구멍을 낼 수 있을 정도라고 소문이 난 흑룡문의 정문이었다.
실제로 나무꾼을 불러다 시범을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런 문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부서지다니.
“형님, 어서 가십시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영초린이었다.
“으응? 아, 그래. 가자꾸나.”
아무리 가공할 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력이란 무한한 것이 아니었기에 차륜전에 당하면 죽을 수도 있었고, 사각에서 쏘아진 암기에 당할 수도 있었다.
비록 정호기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두 사람의 손이 더해지면 나을 것이었다.
나상진과 영초린이 서둘러 몸을 날릴 때, 흑룡문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펑!
비산하는 시체 조각을 헤치며 정호기가 앞으로 내달렸다.
‘흑룡문이란 이름 자체를 오늘 지워 버린다.’
이곳만 손볼 것이 아니었다.
이 일대에 감춰진 흑룡문의 비밀 지부와 무인을 양성하는 곳 모두를 절단 낼 생각이었다.
‘나만 바라보고, 나를 쫓도록 만들겠다.’
싸움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판세의 주도였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너를 맞아 주마.’
서걱!
붉은 핏방울이 허공을 유영했고, 비명 소리가 사방을 떠다녔다.
티티티티티팅!
화살과 암기들이 호신강기에 맞아 튕겨 나갔다.
‘여기서 유성우와 쇄혼랑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총력을 기울인 조당이었기에 본거지에 그것을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건물에 불을 질러라. 오늘부로 흑룡문이란 문파는 없어지고, 흑룡문도란 유랑민만이 남을 것이다.
정호기의 전음을 받은 영초린과 나상진이 싸움에 뛰어들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
“그럼 가볼까?”
혈신이었던 시절의 무위를 찾은 정호기.
그의 앞길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생에 그러했던 것처럼.
***
“문주님?”
지도를 펴 놓고 여러 가지 색깔의 깃발을 요리조리 옮기면서 고민을 하고 있던 공손우는 갑자기 조당이 나타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놀라지?”
“예? 그야 갑자기 나타나셨으니 그러지요. 그럼 지금 무당에 있다고 알려진 사람은 누굽니까?”
“대역을 하나 세워 놓았다.”
“잘하셨습니다. 아직 놈들에게 문주님이 사라진 것을 들킬 수는 없으니까요.”
“병력 배치는?”
“순조롭게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눈을 피하기 위해 소수로 갈라져 이동을 하는 와중에 사소한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 무사히 예정된 진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언제쯤 모두 모일 수 있지?”
“숭산을 중심으로 넓게 포위하는 형태를 띠어야 하기 때문에…….”
“언제까지 모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말을 끊으며 차갑게 물어보는 조당의 행동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냉백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 공손우가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보름 뒤면 모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 앞당길 수는 없느냐?”
“이것도 최대한으로 잡은 것입니다. 보름 뒤에 모인다고 해도 최대 이틀은 몸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바로 전투에 투입될 경우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현재 섬서를 통해 하남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고, 안휘 쪽으로 돌아서 숭산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최대한 정파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알았다.”
말을 마친 조당이 홀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정도로 충격이 크셨다는 것일 테지.”
공손우는 냉백의 죽음보다 수라파천대와 나찰지옥도객들이 같이 협공을 하고도 죽었다는 것과 유성우가 깨졌다는 것에 더 놀랐었다.
‘아니, 어쩌면 유성우를 펼쳤기에 그리 쉽게 죽었는지도…….’
차라리 정상적인 협공을 펼쳤다면 박빙의 싸움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정녕 문주님이 유출하신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놈이 혼돈지공을 알고 있었을까?’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지만,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조당에게 묻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입을 닫고 말았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었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는데, 그것은 결코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흔든 공손우가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상태로는 최대한 희생을 줄이는 것이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문주님?”
언제 나타났는지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는 조당의 모습에 공손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잘못되었지?”
“예?”
“뭐가 잘못되었기에 그렇게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냐?”
“아,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어느 방향으로 침투를 해야 소림에 최단거리로 갈 수 있을지를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기습 따윈 없다.”
“예?”
“정면으로 들어가 중놈들의 목을 잘라 버릴 테니까.”
“하지만…….”
공손우가 뭐라 말을 하려고 할 때, 조당이 손을 내밀었다.
“큭!”
처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 올려 저항을 했지만,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힘을 빼 버렸다.
허공섭물로 공손우를 끌어당긴 조당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이제부터 내 말이 곧 법이다. 내가 하는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참수할 것이니 그리 알도록.”
“아, 알겠…….”
쿠당탕!
공손우를 내팽개친 조당이 차갑게 말했다.
“정확히 보름 뒤에 천지만개를 시행하도록 해라. 그리고 이틀 뒤에 소림을 치겠다.”
“……예.”
무어라 반론을 제기하려 했지만, 서슬 퍼런 조당의 모습에 입을 닫았다.
천지만개는 흑룡문의 모든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각 문파에 스며든 세작들이 그 문파의 중요 건물에 벽력탄을 터뜨리고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말을 마친 조당이 그곳을 떠나고도 공손우는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천지만개는 계획만 잘 세우면 일시에 정파를 혼란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것이거늘…….’
안타까웠다.
자칫 정파의 응집이라는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계획이었기에 때를 잘 맞춰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당은 그것을 허무하게 써 버리겠다는 명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정호기가 혼돈지공을 썼다는 것이 조당을 자극한 것 같았다.
‘문주님이 한계의 상황에 오신 것 같구나.’
정호기가 흑룡문을 탈출할 때, 조당이 보인 모습에서 수하들을 향한 의심의 싹이 자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보인 행보를 보면서 의심을 묻어 두고 정면으로 현 사태를 돌파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것이 이번 혼돈지공으로 터진 것이겠지.’
스스로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다면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
조당의 과격한 행동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공손우였다.
‘그나저나 뭔가 깨달음이라도 있으셨나?’
아무리 군사라고 해도 자신의 무공은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공으로 저항하는 자신을 단순히 허공섭물로 끌어당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공손우는 조당의 무공이 일취월장한 것 같아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그의 과격한 행동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 문주님의 무공이 한 단계 더 높아진 것이라면 정면으로 붙는다고 해도 소림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다!”
이제 천지만개의 효용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계획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결코 다른 문파들이 소림을 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자신들의 집에서 꼭꼭 틀어박혀 있어야 피해도 커지고 천지만개로 인한 혼란도 커지리라. 혼란과 분열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니.’
***
급하게 전서 이십여 장을 쓴 공손우가 그것을 보낸 후 자신의 방에서 다시 지도를 바라볼 때, 청천벽력 같은 정보가 날아들었다.
“뭐라고? 문이 초토화돼?”
“예. 건물은 모두 불타고 무너졌다 합니다. 거기다 인근에 있던 비밀 장소도 전부 공격을 당해 그곳에 있던 이들도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이리 줘 봐라.”
수하가 넘겨준 전서를 읽던 공손우가 비틀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정호기.>
전서 맨 위에 적혀 있는 이름이었다.
‘문을 되찾고자 함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찌 문을 무너뜨릴 생각을 한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압박이 심했나?’
무당을 무너뜨린 것으로 인해 압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모두 무너뜨리면 나중에 무얼 갖겠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