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오, 왔는가?”
천추산을 떠난 정호기가 찾아간 곳은 소림이었고, 언무학의 사부였던 현허 대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안녕하셨습니까?”
“허허허, 나야 부처님의 은덕으로 잘 지내고 있네만.”
현허의 말에 마당을 쓸고 있던 동자승이 투덜거렸다.
“그게 어찌 부처님의 은덕입니까?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수발을 들고 있는 제 덕분이지요.”
“이 녀석, 아침부터 왜 그리 투덜거리는 게냐?”
“그거야 사증조님이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해 놓고는 부려 먹기만 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도 안 지고 따지는 동자승을 보면서 현허가 혀를 찼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그 준비라는 기준이 뭔지 제게 말씀 좀 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야 저도 ‘아, 이 정도면 되었군.’ 아니면 ‘아, 아직 부족하구나.’ 하고 알 것 아니겠습니까?”
“쯧쯧, 네놈이 그렇게 투덜거리는 동안에는 영원히 준비가 되지 않을 게다.”
그때였다.
또 동자승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그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천천히 정호기에게로 둥둥 떠서 움직였다.
“어, 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동거리던 동자승이 정호기와 눈이 마주쳤다.
“내 실력이 어떠하냐?”
“허, 허공섭물입니까?”
“그렇다.”
“굉장합니다!”
한껏 들뜬 모습의 동자승은 당장이라도 현허를 버리고 정호기를 따라나설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것이 굉장하다고 하다니…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
“예?”
“이런 나도 현허 대사님의 가르침이 필요해 이렇게 찾아온 것을 모르겠느냐?”
“…….”
정호기의 말을 들은 동자승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입을 벌리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네가 현허 대사님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제대로 배운다면 말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준비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허공섭물을 거두고 돌아선 정호기의 뒤에서 동자승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그러세.”
“외조부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천수신의가 머물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렇기에 현허를 찾아온 것인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산에 잠시 갔네.”
무당이 무너지고 정파의 움직임이 바쁜 모양이었다.
“소림은 어떻게 대처하기로 했습니까?”
“둘로 나뉘었네. 당장 흑룡문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쪽과 힘을 모아 그들을 쳐야 한다는 쪽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후자가 될 것 같네. 단독으로 흑룡문을 치려면 많은 희생이 따르고, 어차피 소림에서 출발하면 다른 문파들도 동참을 하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정비를 하는 것보다는 미리 힘을 모으고 준비를 한 연후에 흑룡문과 싸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군요.”
잠시 말을 멈추고 현허를 바라보던 정호기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근심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보이나?”
“왠지 어두워 보이십니다.”
“간밤에 천기를 읽었는데, 어둠이 세상을 감싸더군. 물론 천기란 것이 꼭 들어맞는다는 보장은 없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이고, 한 사람의 선택으로도 천기는 바뀔 수 있는 법이니. 하지만 어제 본 어둠은 너무도 짙고 선명해 어지간해서는 바뀔 것 같지 않더구먼.”
“음…….”
현허의 말을 들은 정호기는 자신이 느낀 불안감의 실체가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저놈, 사람 만들기는 힘들 것 같네.”
현허의 고개가 마당을 쓸고 있는 동자승에게로 향했다.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허허, 어쩌겠나? 내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을.”
‘신변의 위기까지 느낀다? 혹시 그렇다면 흑룡문의 다음 행보는 소림이 아닐까?’
늙은이의 기우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정호기는 그것이 아닐 것 같았다.
‘만일 소림이 무너진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정파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고, 많은 이들이 흑룡문으로 배를 갈아탈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정과 사보다 이익을 추구하며 달라붙는 이들의 숫자도 무시하지 못하기에 만약 한쪽으로 추가 기울면 너도나도 흑룡문을 따를 수 있었다.
‘흐름을 흑룡문이 주도하게 할 수는 없지.’
그는 할 수 있는 최강의 수를 두기로 했다.
***
“대형!”
“가가!”
바쁜 걸음으로 섬서의 영웅회를 찾자 그곳에서 나상진과 유옥접, 그리고 영초린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떠나지 않고 있었단 말이냐?”
“처음엔 자리를 비웠지만, 흑룡문에서 따로 공격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이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대형의 소식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됐다. 일단 이곳을 떠나기로 하자.”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나상진의 질문에 정호기가 남쪽을 바라보았다.
“중경.”
***
영초린과 나상진이 한 방을 쓰고 정호기와 유옥접이 같은 방을 썼다.
“괜찮겠소?”
“이제 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당신이라고 해도.”
정호기는 유옥접을 막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시내가 흘러 강이 되고, 강이 바다로 가는 것처럼 두 사람의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었다.
***
“일어나요.”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자 유옥접이 정호기의 얼굴을 간질였다.
“잘 잤소?”
“아니요. 밤새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유옥접의 말에 정호기가 빙긋 웃었다.
“피곤할 텐데…….”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당신과 또 떨어진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유옥접의 애정 공세는 아침에도 이어졌는데 전혀 숨기고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형수님, 얼굴이 밝아 보이십니다.”
영초린이 놀리듯 말을 했지만, 유옥접은 수줍어하지 않았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언제나 밝답니다. 그러니 어서 도련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세요.”
“뭐, 언젠간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때 나상진이 들어섰다.
“형수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도련님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 형님은?”
“곧 나오실 거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른 장삼을 걸친 정호기가 나타났다.
“잘 잤느냐?”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끝났다.
그리고 짧은 이별의 시간을 가진 후에 유옥접이 떠나갔다.
“대형, 그런데 우리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충분하다.”
“하지만…….”
나상진의 음성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흑룡문의 기운이 소림을 향한다는 것을 안 지금, 누굴 더 부르고 할 시간이 없구나.”
정호기의 말에 나상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안전하겠지요?”
가족이 숨어있는 곳을 말함이었다.
“물론이다. 이번에 진을 더 보강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본거지에서 일이 벌어진다고 하여 그들이 발길을 돌리겠습니까?”
“돌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소림을 무너뜨린다고 해도 말이다. 내가 노리는 것은 세인들에게 결코 흑룡문이 최강이 아니란 것을 심어 주고자 하는 것이니까.”
“대형은 소림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초린의 물음에 정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조당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아무런 피해도 없이 소림을 무너뜨리긴 힘들 것입니다. 차라리 소림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싸운다면, 아니 소림이 무너지는 순간을 노리고 흑룡문을 공격한다면 오히려 승산이 더 있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지금 내가 흑룡문과 부딪치는 것은 이르다고 생각한다.”
“이르다니요?”
“뭔가… 나를 막는 무엇이 있구나.”
영초린은 정호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길이 보이거늘 어찌 그곳을 가지 않는단 말인가?
“대형이 하시는 일이니 따르기는 하겠지만, 저는 소림과 같이 싸우는 것이 더 이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소림이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니 일단 형님의 뜻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나상진이 정호기의 편을 들었다.
“흑룡문을 불태우고 난 후에 소림에 가도 늦지 않을 것 아니냐?”
그 말을 들은 정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기로 하자꾸나. 일단 흑룡문을 쓸어버린 후에 소림으로 바로 출발하도록 하자.”
“예.”
***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글쎄다. 못해도 이삼천 명은 남았겠지. 그중에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천여 명 정도가 무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용을 자랑하는 흑룡문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조당이 떠난 이후로 그 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위에 번을 서는 놈들의 숫자로 볼 때, 지금 정문에는 이십여 명 정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들어갈 구멍을 찾는 영초린과 나상진을 보던 정호기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흑룡문을 향해 나아갔다.
“대, 대형…….”
당황한 나상진과 영초린이 그런 정호기를 불렀지만, 정호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희에게 내가 가진 진정한 실력을 보여 주고 싶구나.”
정호기가 강하다는 것은 나상진과 영초린 두 사람 모두 인정하는 일이었다.
굳이 따로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더.
“대형, 누가 대형의 실력을 의심한다고 그러십니까? 대형이 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상진의 만류에도 정호기는 계속 흑룡문의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