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컥! 커흑!”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나찰지옥도객을 바라보는 정호기는 그의 이름과 유언이 머리에 떠오르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 광헌은 설령 천 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문주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어, 어떻게… 분… 호돈지…….”
꺼져 가는 생명의 불씨를 붙잡고 있는 그는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내가 혼돈지공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광헌아.”
부릅떠진 눈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정호기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전생에서도 내가 감겨 주었거늘, 이번 생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구나.’
일어서는 그의 눈에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인영이 보였다.
‘혼란이 극에 달하겠군.’
무당을 무너뜨리고 기고만장해 있을 조당에게는 크나큰 충격이리라.
‘혼돈지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충격일 것이다.
휘이이잉.
산중을 휘도는 바람에 피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끝이 머지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그런 느낌이 솟아올랐다.
‘일단 이곳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지?’
땅을 박찬 정호기가 비명 소리와 병장기 소리가 요란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
“이 비겁한 놈들아!”
멀어지는 오도방도들을 보면서 좌무량이 소리를 질렀다.
단숨에 선두를 붕괴시키고 흐름을 이쪽에서 주도하려던 그의 계획은, 그를 보자마자 뒤로 쏜 살 같이 도망치는 오도방도들로 인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멈출 수는 없었기에 좌무량도 더욱 속도를 높여 후미를 따라붙었다.
“크악!”
뒤처진 오도방도가 좌무량을 향해 도를 휘둘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저 그의 걸음을 한 걸음 늦췄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이 두 걸음이 되고 세 걸음이 되자, 이내 후미는 십여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그때, 좌무량의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것들이!”
오도방은 후퇴를 하면서 좌우로 갈라졌는데, 일종의 학익진이었지만 변형을 시킨 것이었다.
날개를 펼쳐 감싸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아예 몸통을 없애 버리고 날개를 분리해 파천궁의 후미를 협공했다.
고수들이 대부분 전면에 포진해 있었기에 그 피해는 심각했고, 좌무량이 고수들을 이끌고 후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서로 교차하며 난도질한 후에 멀리 돌아가는 중이었다.
“궁주님, 놈들이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포위 아닌 포위가 된 상황이었다.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좌무량이 이를 가는 사이 좌무량이 사라져 다시 후미가 된 이들이 공격을 받았고, 좀 더 좁아진 원 안에서 좌무량과 수하들은 둥글게 뭉쳐 오도방도들을 경계했다.
“놈들은 우리와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전여욱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심각한 위기라는 것도.
“이렇게 뭉쳐 있다가 화살 공격이라도 당하면…….”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전여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화살비가 내렸고, 어둠 때문에 보이는 것은 달빛에 반짝이는 화살촉이 전부였다.
채채채채채챙!
“아악!”
비명 소리와 쇳소리가 사방에서 들리자 좌무량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
“후퇴! 후퇴하라!”
좌무량의 외침에 파천궁도들이 일제히 뒤로 몸을 날렸다.
“외전이 무리를 이끌고 패천대가 후미를 책임져라!”
패천대는 좌무량의 직속 무력 부대였다.
빠르게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아 내며 좌무량이 소리치자 외전에 속한 고수들이 모두 선두를 향해 움직였고, 패천대가 후방에서 좌무량처럼 화살을 막아 내며 천천히 움직였다.
자연 선두와 후미는 점점 거리가 벌어졌지만,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기에 좌무량은 걱정하지 않았다.
“하압!”
좌무량의 손에서 장풍이 쏘아지며 날아오던 화살들이 일제히 튕겨 나갔다.
“가자!”
시간을 번 좌무량이 먼저 땅을 박찼고, 뒤이어 삼십여 명의 패천대가 뒤를 따르려고 했다.
그때, 좌무량과 그들의 발길을 붙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좌 궁주, 나 곽기태가 여기 있소이다! 설마하니 내가 무서워 도망가시는 게요?”
좌무량을 부르는 곽기태는 현재의 상황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내가 파천궁의 세력과 정면으로 붙어 피해를 볼 것이라 예상했겠지만, 파천궁의 본대와 싸우는 것은 바로 당신이오.’
그라고 어찌 정운성의 계획을 모르겠는가?
알면서도 들어준 것은 이 같은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천궁의 퇴로는 태력문이 맡고, 앞뒤로 협공하기로 했기에 지금 파천궁도들이 달려가는 곳에는 태력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좌 궁주를 잡는 것이 이번 전쟁이 끝난 후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공훈을 세워도 적장을 잡는 것만 못하니.’
그렇다고 앞에 나서서 싸울 생각도 없었다.
힘을 빼놓으면 마지막에 나서서 목을 베는 영광을 누리면 그뿐이니까.
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이끌고 온 모든 이들이 싸움에 투입될 것이니, 패천대만 남은 좌무량이 막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퇴로만 막으면 승리는 내 것이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좌무량을 보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무얼 망설이는 거냐?’
혹시라도 이대로 도망간다면 계획이 틀어질 수 있었다.
“오시오. 좌 궁주의 철혼도법을 견식하고 싶구려.”
도발을 한 연후에 좌무량이 달려들기만 하면 싸움은 수하들과 연수한 문파들에 맡기고 자신은 바로 자리를 떠서 퇴로를 차단할 속셈이었다.
그리고 차륜전으로 힘이 빠진 그를 상대하면 손쉬운 승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놈! 기다려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좌무량이 도를 뽑아 들고 몸을 날렸다.
‘내 승리다!’
그 모습을 보며 곽기태는 승자의 달콤함을 미리 만끽했다.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수하들을 뚫을 수는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이제는 퇴로를 막으러 자리를 옮길 때였다.
‘혹시 뚫는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지쳤을 테니, 다시 돌아와 죽이면 될 테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몸을 돌릴 때, 갑자기 뒤쪽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악!”
동시다발적으로 꽤 많은 이들의 비명이 터졌기에 곽기태의 고개도 자연 그곳을 향해 돌려졌다.
“어떻게?”
학살.
좌무량이 무서운 속도로 앞을 가로막는 오도방도들을 학살하면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좌우에는 패천대가 다른 이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기에 좌무량은 파죽지세로 가로막는 이들을 쓰러뜨리며 전진하는 중이었다.
“크악!”
다시 앞을 막으려던 이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이 분분히 그 자리를 피했다.
“암기?”
좌무량의 왼손이 움직임과 동시에 앞쪽에 있던 이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것을 본 곽기태는 좌무량이 암기를 사용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것을 쓰기에 이십여 명이 한 번의 손짓으로 쓰러지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십여 장.
좌무량과 곽기태의 거리였다.
퍽!
작은 소음과 함께 좌무량의 손에서 미약한 빛이 번쩍였고, 그 순간 미세한 침들이 전방으로 부채꼴처럼 퍼지며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이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 모습을 본 곽기태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폭뢰정을 쓰다니! 좌무량, 이 비겁한 놈아!”
폭우정이 절대 고수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암기라면 폭뢰정은 대인 살상의 기능을 극대화한 암기였다.
두 개가 이름은 비슷하지만 같은 곳에서 만든 암기는 아니었다.
폭우정은 사천당가에서, 폭뢰정은 운남의 백독문이란 곳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폭뢰정은 그 무기의 치명적인 살상력으로 인해 무림에서는 금용암기로 불렸다.
그리고 백독문은 중원에서 쫓겨 간 만독궁과 더불어 운남을 양분하고 있는 문파였다.
곽기태의 외침에 자극을 받은 것이지 좌무량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사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개새끼!’
폭뢰정을 폭우정이라 속여 팔다니…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찢어 죽이리라 다짐했다.
‘어쩐지 좀 싸다 싶더니…….’
좌무량 자신이 들인 돈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폭우정 세 개의 값으로는 싸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운이 좋은 것이라 여겼었는데, 그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폭뢰정을 썼다는 것을 정파 무림이 알게 된다면 공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대대로 운남과 중원은 상극이었고, 서로를 깎아내리며 서로를 증오했다.
특히나 운남과 같은 새외 세력은 호시탐탐 중원으로 들어오려는 시도를 하였기에 그들과 많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죽은 이들은 부기지수였고, 같은 중원인이 아니라 외세라는 것 때문에 증오심은 더욱 깊었다.
정파와 사파가 싸우는 것은 중원 내부의 문제였고, 외세가 강할 때는 힘을 합해 대항하기도 하였기에 외세와 중원의 사파는 미움을 받으면서도 그 강도에 차이가 있었다.
이런 이유들과 살상력으로 인해 금용암기가 되었고, 사용한 사람까지도 그 용도에 따라 공적으로 몰릴 수 있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그것도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후에 걱정할 일이었다.
살인멸구를 하고 싶어도 눈이 너무 많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네놈은 죽여 버린다!’
뭘 잘못 처먹었는지 가소롭게도 혼자 떡하니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곽기태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거기다 좌 궁주?’
[궁주님, 감사합니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삼 년 전에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곽기태가 했던 말이었다.
파천궁의 주 수입원 중의 하나가 바로 산서성의 밀의 판로였고, 그것을 삼 년 전에 오도방에 일정 금액을 받고 넘겨주었었다.
올해 판로를 회수한다고 하자 득달같이 달려온 곽기태가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며 매달렸다.
그러나 삼 년 동안 커진 몸집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사업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 개새끼야!”
뻥 뚫린 정면에 놀란 토끼 눈을 한 곽기태가 엉거주춤 서 있었고, 그를 향해 힘껏 뛰어오른 좌무량이 도를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