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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27화 (128/137)
  • 127화

    “방주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알았다.”

    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난 곽기태가 정운성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비록 선봉에 서더라도 태력문이 있기에 마음이 든든합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귀방의 계획이 성공해야 할 것입니다.”

    정운성의 말에 곽기태가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염려 마십시오. 틀림없이 그리될 터이니.”

    말을 마친 곽기태가 오도방의 방도들과 이 전쟁에 참여한 다른 문파들을 이끌고 사라질 때, 정운성도 태력문도들을 모으고 있었다.

    “백부님.”

    “오, 왔느냐?”

    멀어지는 오도방도들을 보면서 정운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내가… 너무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정호기는 정운성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협력하는 관계지만 이 전쟁이 끝나면 경쟁자가 될 오도방이었기에, 그들이 파천궁과 부딪쳐 피해를 입으면 후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당연한 선택입니다. 오도방도 그것을 노리고 저희에게 파천궁을 흔들어 달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도방주인 곽기태가 요구한 것은 만일 파천궁이 궁을 떠나게 된다면 태력문에서 그들의 진격을 막고 사기를 꺾어 달라는 것이었다.

    파괴력은 뛰어나지만 경공에서 부족함을 보이는 태력문으로서는 그 요구를 들어주려면 희생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곽기태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정호기의 존재이고 그의 능력이었다.

    “그런데 가능하겠느냐?”

    곽기태의 마지막 요구, 바로 냉백의 제거 또는 그를 붙들어 두는 것이었다.

    절대고수라 칭해지는 냉백이 있다면 파천궁주인 좌무량과 더불어 절대고수가 두 명이 되는 것이니 부담이 되리라.

    좌무량을 상대하려면 곽기태와 정운성이 합공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냉백을 맡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혼전에서 절대고수의 역할은 지대했다.

    한 번의 손짓만으로 주변 오 장은 초토화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절대고수이니.

    그런 냉백을 태력문에서 맡아 준다면 좌무량을 자신들이 상대한다고 하였었다.

    곽기태는 파천궁을 상대하기보다 냉백과 그가 이끌고 있는 수라파천대, 나찰지옥도객들을 상대하기 더 껄끄러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도 정호기의 존재를 몰랐기에 나온 요구였다.

    “냉백과 그의 수하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백부님께서는 아무런 걱정 하지 마시고 파천궁의 후미를 치시면 됩니다.”

    “알았다. 더 필요한 것은 없느냐?”

    “없습니다.”

    “조심하여라.”

    “예.”

    말을 마친 정호기가 냉백을 상대하기 위해 자리를 떴고, 정운성도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그곳을 떠났다.

    ***

    -냉백.

    귓전을 파고드는 전음에 냉백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귀주 창성현의 비룡전장을 잃기 싫다면 나에게 와라.

    “어떻게…….”

    “예? 무슨 말씀이신지?”

    좌무량의 말에 냉백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음의 내용이 너무도 충격적이었기에 그만 입 밖으로 말이 새 버린 것이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

    말을 마친 냉백이 좌무량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지금 즉시 수하들과 출발하지 않는다면 내 동료들에게 전서를 날릴 것이다.

    ‘놈이 비룡전장까지 알고 있다니…….’

    비룡전장은 조당도 알지 못하는 냉가만의 비밀이었고, 냉가의 숨겨 둔 자금줄이었다.

    그리고…

    -영이경을 비롯한 너의 또 다른 가족들은 모조리 죽음을 맞겠지.

    냉(冷)이란 한자에서 이수 변을 뺀 영(令)을 성으로 삼는 이들.

    바로 냉가의 또 다른 줄기였다.

    -네 아들인 영호영은 물론이고.

    “어디냐!”

    살기 충만한 냉백의 고함 소리가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서쪽으로 와라. 기다리고 있으마.

    ***

    “아버님, 어찌 된 일입니까?”

    좌기정의 물음에 좌무량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유인을 당한 모양이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일언반구도 없이 수하들을 이끌고 사라지는 냉백을 보면서 좌무량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아니, 어찌 이런 상황에서 저렇듯 무책임하게 행동한단 말입니까?”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겠지.”

    흑룡문이 자신들을 버렸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수하들을 진정시켜라.”

    갑작스런 냉백의 이탈은 안 그래도 정호기의 기습으로 인해 지친 파천궁도들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었다.

    “누가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뭔가 노리는 것이 있을…….”

    그때 전여욱이 빠르게 달려왔다.

    “궁주님! 적들이 출발했다고 합니다!”

    “이런! 어서 대형을 갖춰라!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반각 이내로 놈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다른 움직임은?”

    “놈들이 두 갈래로 갈렸다는 것뿐입니다.”

    “두 갈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모르겠는 좌무량이었다.

    ‘냉 대주 등을 상대하러 갔는가, 아니면 우리를 기습하기 위한 움직임인가?’

    냉백이 이곳에 있었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전력을 나눌 수도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심신 양면이 모두 지친 수하들이었다.

    만일 정면 대결에서 밀리는 구석이라도 보인다면 그 여파는 눈사태와 같이 불어나리라.

    좌무량의 손이 가슴으로 향했다.

    ‘절대 밀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단번에 치고 나가야 했다.

    “조장 이상은 모두 전면에 집결하도록! 나 좌무량이 선두에 서겠다!”

    좌무량의 외침에 무공이 높은 이들이 전면으로 나섰고, 중간과 후미는 하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길은 내가 뚫을 테니 놈들을 단숨에 쓸어버리자!”

    “죽이자!”

    “궁주님을 따르자!”

    좌무량이 선두에 서자 떨어지던 사기가 그나마 조금 올라갔고, 고수들이 내공을 실어 함성을 지르니 그 위세에 나머지 파천궁도들도 덩달아 피가 끓었다.

    ‘됐다. 사기를 올리는 것에는 성공했다.’

    수하들을 보는 좌무량의 눈에 결의가 깃들었다.

    ‘결코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안 된다. 그 순간 수하들의 사기는 곤두박질 칠 것이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리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품에 있는 폭우정이 큰 역할을 해야만 했다.

    ‘어서 오너라!’

    넓은 평지인 주위를 둘러보며 좌무량은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기로 했다.

    마주 달려 나가며 적을 맞을 수도 있지만, 미리 자리를 잡고 있는 이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놈들이 백여 장 밖에 도착을 했답니다.”

    “큰 무리는 오도방이 주축이며 갈라진 쪽은 태력문인 것 같습니다.”

    “태력문을 감시하던 팔 호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적의 무리가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오십여 장 밖입니다!”

    급박한 보고가 속속 올라오며 적의 동태를 알리는 와중에 멀리서 달려오는 무리가 모습을 보였다.

    “놈들을 짓뭉개 버려라! 나를 따르라!”

    “와아~”

    좌무량은 사라진 태력문 따위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후미를 기습 하려고 하겠지만, 단숨에 놈들의 선봉을 꺾고 속으로 파고들면 오히려 오도방 놈들에게 가로막혀 기습하기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곽가 놈을 죽이고 나면 놈들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고 각개격파하는 이득을 볼 수도 있지.’

    이제 남은 거리는 이십여 장.

    좌무량이 땅을 박찼다.

    ***

    “어디 있느냐!”

    냉백의 외침이 산중을 울렸다.

    멀리서 들리는 비명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지워 버릴 정도로 큰 외침이었다.

    -여기 있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라.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고 모습을 보여라!”

    -왜? 나타나면 쇄혼랑과 유성우로 나를 공격하려고?

    쇄혼랑(鎖魂鋃).

    넋까지 가두어 버린다는 의미를 지닌 쇠사슬로, 만년한철을 가공해 사슬을 만들고 앞에 나선형의 홈이 파인 추를 단 병기였다.

    그것을 이용해 공격하는 방법이 유성우였으며 호신강기를 시전한다고 해도 그것을 뚫고 상대를 옭아맬 수 있었다.

    “놈! 쇄혼랑까지 알고 있다니! 정녕 우리 문과 관계가 없지 않구나!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협박하고 문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느냐!”

    -내 것을 찾고자 함이다.

    “어째서 흑룡문이 네 것이란 말이냐! 흑룡문에선 세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능력 있는 자가 곧 문주의 위에 오르는 것이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라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암투도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관문이다. 강한 자가 문주의 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이가 문주의 위에 오른다!”

    -그럼 지금 내가 하는 행동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겠군. 이건 어디까지나 암투이고 너희는 걸림돌일 뿐이니까.

    ‘아차!’

    냉백은 자신의 말이 오히려 정호기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승자박의 꼴이로구나.’

    -너희에게도 기회를 주겠다. 너희 스스로 이 산봉우리를 내려가지 않는다면 나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음을 들은 냉백이 염두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호기 저놈이 숨어서 싸운다면 승산이 없을 것 같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놈과 태력문 사이에 뭔가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워낙에 경계가 심해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정운성과 비밀스럽게 만남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명준이라고 태력문에 고용된 용병이 있는데, 그의 말을 들어 본 결과 어떤 관계이든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됩니다.]

    ‘이대로 발길을 돌려 태력문을 공격한다면 놈도 쫓아오지 않을까?’

    이미 전서는 날려 두었다.

    못 미더워 수라파천대의 한 사람을 가문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니 비룡전장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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