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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25화 (126/137)

125화

쫓아내면 어쩔 것인가?

나가라면 나가야 했다.

집주인이 나가라는데 뻗대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거기다 집주인이 집을 비운다는데 말이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기다리고 있던 정호기는 얼씨구나 하면서 달려들 것이고, 그의 공격을 받을 때 파천궁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모양새도 좋지 않고, 파천궁과의 연수도 물 건너가고, 피해만 늘게 되리라.

‘여기서 멈출 파천궁이 아니니 연수에 실패하면 문주님께서 언짢게 생각하실 테지?’

아무리 정호기가 있다고 해도 파천궁이 태력문 등과의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정호기가 설치는 것처럼 좌무량이 태력문을 휘저으면 결과는 판이할 테니까.

게다가 이쪽에는 냉백 자신도 있지 않던가.

“아닙니다. 그동안 정호기 그놈을 잡고자 여러 가지 방안을 의논했으니, 만약 놈이 우리를 노리고 달려든다면 매운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탁하오이다.”

“태력문과 붙기 전까지 놈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 정도면 되오이다. 혼전이 벌어지면 놈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할 것이니.”

“알겠습니다. 선봉에 서지요.”

냉백을 보낸 후, 좌무량은 씁쓸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었다.

“과연 나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았다면 바로 탁자를 부숴 버리고 자리를 박찼을 것이다.

“땅이나 건물이 아닌 사람을 들였어야 했어.”

흑룡문과 파천궁의 차이를 생각하니 아쉬움만 남았다.

“흑룡문보다 부지만 넓고 건물만 많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것을 채울 사람이 없는 것을…….”

[궁을 확장하는 것은 이릅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능력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것이 백배는 더 낫다고 봅니다. 십 년, 이십 년 후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셔야 합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궁의 확장 공사를 반대했던 여우현이 떠올랐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격이군.”

손수 목을 쳤으니 이제 와 후회해도 늦었다.

“그래도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닌 것 같구나.”

비영대주나 큰아들인 좌기정을 생각하니 그나마 마음 한쪽이 따스했다.

***

“가자!”

냉백의 외침에 흑의로 통일한 삼십여 명의 수라파천대와 열여덟 명의 나찰지옥도객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궁주님.”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냉백 등을 좌무량이 바라보고만 있자 고새헌이 그를 불렀다.

“할 말이 있느냐?”

“거리가 너무 벌어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앞으로 모든 명령은 내가 내린다. 내가 명을 내리기 전까지는 어떤 행동도 하지 마라. 알겠느냐?”

“예? 아, 알겠습니다.”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좌무량의 기세에 질린 고새헌이 대답을 하고는 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들어라!”

좌무량의 목소리가 내공에 실려 운집한 이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호기가 아니다! 태력문과 오도방이 기다리고 있다! 놈이 나타난다고 해도 절대 동요하지 말도록 해라! 놈은 내가 맡겠다!”

“네!”

“옆에서 동료가 죽을지라도 전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라! 놈에게 칼을 휘두를 시간이 있다면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라! 놈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멈추는 것이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놈의 수작에 놀아나고 싶으냐!”

“아닙니다!”

“그럼 가자!”

“예!”

선두에 선 좌기정을 필두로 파천궁의 무사들이 천천히 궁을 벗어났다.

‘놈은 절대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수하들을 바라보는 좌무량은 정호기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냉 대주도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겠지.’

이미 냉백 등은 보이지도 않았다.

싸움이 일어나면 좌무량에게 도와달란 말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움을 받으려면 최대한 파천궁과 붙어서 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마치 쫓기기라도 하듯 움직였다.

‘잡을 수 있다 판단한 것인가?’

냉백이 빠르게 사라진 이면에는 그런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

“대주님, 파천궁의 무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뒤에서 수하가 소리치자 냉백이 멈췄다.

“흩어져라!”

냉백의 말에 수라파천대와 나찰지옥도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놈이 없다?’

정호기를 끌어내기 위해 일각을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수하들은 모두 폭죽을 가지고 있었고, 공격을 당하면 그것을 쏘아 올리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은밀히 빠져나가 파천궁의 동태를 감시하는 수하에게도 마찬가지로 폭죽이 있었기에 그곳이 공격당했다면 어두운 하늘을 밝게 만드는 폭죽이 솟았으리라.

‘아니야. 놈은 분명히 우리를 노릴 것이다. 그런데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스스로 미끼 역할을 자처했음에도 정호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냉백은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기필코 나타날 것이다. 그럼 그곳이 놈의 무덤이 되겠지.’

흑룡문은 정호기처럼 호신강기를 쓰는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고, 수라파천대와 나찰지옥도객들도 그중의 하나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림이나 무당의 장문과 같은 절대고수를 죽이기 위한 비밀 병기라고 할 수 있었다.

파천궁과 거리를 둔 것은 그들에게 그것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처음엔 시간만 끌며 파천궁주로 하여금 상대하게 하려 했지만, 혹시라도 놈을 놓치면 잠재적인 위험이 될 것 같아 아예 죽여 버리기로 마음먹고 서둘러 움직인 것이었다.

‘자, 그럼 가 볼까?’

정호기를 끝장내기 위한 무대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가 나타나면 냉백이 그를 이끌고 그곳으로 가려 했는데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오너라! 네 무덤이 될 곳으로!’

수하들이 기다리고 있을 계곡으로 신형을 날리며 냉백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

‘죽여 버릴까?’

먼저 움직이는 냉백과 수하들을 보면서 죽이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지만, 정호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농락했던 이였기에 처음만 해도 그를 죽이는 것이 가장 큰 목표 중의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 우선순위가 많이 내려간 상태였다.

‘네놈이 어떤 수를 쓸 것인지 뻔히 보이는 상황인데, 일부러 그것에 걸려들 필요는 없겠지.’

호신강기를 쓰는 고수들을 죽이려 개발한 암기들과 독들은 정호기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을 믿고 있기에 저리 자신을 유혹하는 것이리라.

‘이번엔 참아 주마.’

그런 생각을 하는 정호기의 눈에 천천히 파천궁을 벗어나는 무리가 보였다.

‘태력문 등은 낮 동안 이동했기에 지금은 이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해가 지자마자 궁을 벗어난 것이겠지.’

파천궁이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기에 태력문 등은 오늘도 꾸준히 이동하여 오십여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친 상황이었다.

낮에 이미 정운성을 만나서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를 들은 정호기였기에 파천궁의 급작스런 이동과 습격은 그들에게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었다.

‘물론 이들이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되겠지만, 지난 사흘간 이동하느라 피곤이 쌓였을 테니 지금 붙는다면 불리하겠지?’

주변을 둘러보던 정호기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백여 명은 되겠구나.’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다가 일정 거리가 되자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좀 묘했다.

오 리 정도를 움직이고는 선두가 그 자리에 머물더니 가장 후미가 지나간 후에 그 뒤를 따라붙는 방식으로 이십여 리를 이동한 것이다.

‘저렇게 하면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아 뒤처진 이들이 많이 지치진 않겠군.’

뭔가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이제 삼십여 리만 가면 태력문 등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었기에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준비와 휴식을 할 시간을 벌어 주어야 했다.

‘괜히 중간에 경계심을 심어 줄 필요는 없지. 이대로 간다면 분명 그곳을 통과할 것이니.’

어차피 파천궁이 나올 것이 확실했기에 대비를 해 두긴 했다.

그 전에 혼란을 일으킬까도 생각해 봤지만, 미리 경계심을 심어 준다면 자신이 준비한 것이 무용지물이 될 것 같아 일단 그곳에 가기로 했다.

***

‘놈은 분명히 온다!’

움푹 들어간, 십여 장 크기의 분지에서 냉백은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하들은 모두 오십여 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준비는 완벽히 갖춰진 상태였다.

관건은 자신이 정호기를 수하들이 도착할 때까지 붙들어 두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너무 늦는데?’

[혹시라도 우리와 떨어지게 된다면 한 시진이 되기 전에 우리와 합류하셔야 합니다.]

좌무량의 말이 떠올랐다.

한 시진.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기 전에 파천궁의 인물들과 합류해야 하는 것이다.

‘설마?’

냉백의 마음에 의심의 싹이 무럭무럭 자랄 때, 위에서 수하가 소리를 질렀다.

“대주님, 폭죽이 터졌습니다!”

“몇 개냐?”

“한 개입니다.”

“허허…….”

불꽃의 수로 흩어진 수하들의 위치를 알게끔 했었다.

자신은 두 개, 다른 수하들은 세 개, 그리고 파천궁에 붙어 있는 수하가 바로 하나였다.

냉백의 예측은 빗나갔고 정호기는 파천궁의 본대를 습격한 것이다.

“이놈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군. 설마 이걸 예상하고 그동안 그렇게 감질나게 굴었단 말인가?”

냉백도 정호기가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자신들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반만 맞은 것인가?”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예상은 맞았어도 정호기가 상대하고 싶은 대상을 맞히는 것에는 실패했다.

“돌아간다.”

‘놈이 허를 찔렀다지만 좌무량도 대비를 했을 것이니, 우리가 갈 때까지 그리 많은 피해를 입지는 않겠지.’

냉백은 아직까지도 정호기를 얕잡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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