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신 다시 살다!-124화 (125/137)
  • 124화

    ‘있는 것들이라고는 제 배만 채울 줄 아는 놈들과 수하들의 입장은 헤아리지도 못하는 이기적인 것들뿐. 쯧쯧!’

    “놈이 태력문과 손을 잡은 것은 확실한 것 같소이다. 부하들을 시켜 알아본 결과에 의하면 그 이상의 것도 있는 것 같고.”

    “그 이상의 것?”

    “예. 궁주님께서도 예상하고 계시겠지요?”

    냉백의 물음에 좌무량이 눈을 껌벅껌벅했다.

    “아무튼 그놈에 대한 해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물론 궁주님의 결단이 있어야겠지만, 어차피 놈을 잡지 않는 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하루라도 빨리 용단을 내리시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잠시 냉백을 바라보던 좌무량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냉 대주의 말씀대로 놈의 공격으로 인해 피해가 커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순식간에 냉정을 찾으며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좌무량을 보면서 냉백은 세간의 소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파천궁은 좌 궁주 한 사람의 힘으로 유지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구나.’

    성정이 포악하고 급한 것이 단점이었지만, 그 단점에 비견되는 장점이 바로 이런 냉정함이었다.

    ‘받쳐 주는 사람만 있었다면 우리 문에 버금가는 문파로 키웠을 것이지만… 운이 없는 인물이로군.’

    “냉 대주께서는 언제가 적당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장이라도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룰수록 피해는 커질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해가 지기 전에 떠나도록 하지요.”

    냉백에게서 고개를 돌린 좌무량이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들었을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궁을 나설 것이니 그리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라.”

    “하지만 궁주님…….”

    고새헌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가만히 노려보는 좌무량의 눈빛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차라리 탁자에 있는 벼루나 먹을 던지면서 고함을 쳤다면 이의를 제기해 보겠지만, 지금처럼 아무런 말 없이 응시하는 것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 해가 지기 전에 자신이 맡은 곳의 출정 준비를 마치지 못한다면 목을 치겠다.”

    좌무량의 낮은 음성은 대청을 떠돌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살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했다.

    “너희들이라고 하여도.”

    좌무량의 눈이 향한 곳에는 전여욱과 나경언이 있었고, 그녀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삼킬 정도로 좌무량의 기세는 날카로웠다.

    “그만 나가 보도록.”

    그 말에 모두들 읍을 하고는 서둘러 대청을 빠져나갔다.

    “냉 대주께서도 바쁘실 텐데 그만 가서 일을 보시지요.”

    “알겠습니다.”

    냉백마저 빠져나간 대청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던 좌무량이 그곳을 나선 것은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

    “부르셨습니까?”

    좌무량의 부름에 그의 세 아들과 두 딸이 달려왔다.

    “준비는?”

    “언제라도 출정할 수 있습니다.”

    대답을 한 막내인 좌영정이 스물다섯인데, 형제자매가 모두 각기 하나의 대를 맡고 있었다.

    “놈은 오늘도 습격을 할 것이다. 인원이 인원이니만큼 선두와 후미의 거리는 벌어질 것이고, 놈이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으니 아마도 큰 희생이 따르리라고 생각한다.”

    “놈을 붙들어 둘 수단이 없다면 막을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큰아들인 좌기정의 말이 옳았다.

    “그렇기에 너희를 부른 것이다.”

    말을 마친 좌무량이 품에서 세 개의 죽통을 꺼냈다.

    “폭우정이다.”

    “예?”

    좌기정을 비롯해 다섯 모두가 놀랐는데, 폭우정은 당가에서 만든 것으로 세간에서 구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죽통 안에는 극독이 발린 암기가 들어 있었는데, 독보다도 암기 자체가 더 무서운 무기였다.

    빠른 속도와 암기가 가지는 특징으로 인해 호신강기까지도 뚫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지금 사용할 줄은 몰랐구나.’

    폭우정을 바라보는 좌무량의 눈에는 안타까운 빛이 가득했다.

    ‘좀 더 큰일에 쓰고 싶었건만…….’

    좌무량의 야망은 결코 작지 않았다.

    궁주에 오르기까지의 여정도 험난했지만, 그것도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궁의 크기를 키운 것도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한 초석으로 여겼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마련한 것이 바로 폭우정 세 개였다.

    “놈이 나타나면 최적의 장소에서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무조건 이것을 날려야만 한다. 누가 하겠느냐?”

    폭우정과 같은 물건을 수하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식들을 부른 것이다.

    “저… 아버님.”

    “네가 하겠느냐?”

    좌기정의 부름에 좌무량이 그래도 큰아들밖에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옵고…….”

    “그럼?”

    “이것이 진정 폭우정입니까?”

    “폭우정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잠시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해라.”

    좌무량의 허락이 떨어지자 좌기정이 조심스럽게 폭우정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조심해라. 충격에 약하다고 하였으니.”

    좌기정이 폭우정을 살피는 모습이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버님, 이것을 시험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들의 말에 좌무량은 어이가 없었다.

    이것이 얼마나 비싼 것인데 시험을 해 본단 말인가?

    “없다.”

    “그런데 이것이 폭우정이라고 확신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구입을 했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억지로 시킬 생각 없으니 믿지 못하겠다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 것이 아니옵고…….”

    “썩 물러가라!”

    좌기정은 물론이고 다른 자식들까지 모두 내보낸 좌무량이 탁자에 놓여 있는 폭우정을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고새헌과 친분이 있던 당표를 통해 구입한 물건이었다.

    “겁이 난다면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것이지, 어디서 감히!”

    자식 농사도 틀린 것 같았다.

    “게 누구 없느냐!”

    “예!”

    “가서 비영대주와 부대주를 불러오너라!”

    “예!”

    비영대는 말 그대로 나는 그림자라 불릴 정도로 경공이 뛰어난 이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궁주님.”

    “들어오너라.”

    들어선 비영대주와 부대주는 쌍둥이 형제로, 그 지닌바 경공은 매와 경주를 해도 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너희에게 특명을 내리겠다. 만일 이 일을 성공한다면 차기 외당과 내당을 너희에게 맡기겠다.”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자, 여기 폭우정 두 개가 있다. 이제 우리가 출진을 하게 되면 분명히 정호기란 놈이 나타날 것이니 어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놈에게 이 폭우정을 명중시켜라. 할 수 있겠느냐?”

    좌무량의 말에 비영대주와 부대주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노기가 섞인 좌무량의 물음에 비영대주가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그럼? 혹시라도 이것이 진품이 아닐 것 같아 걱정이라도 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게냐?”

    “궁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정호기란 놈의 경공은 우리보다 뛰어납니다.”

    “나도 봤다.”

    “단순히 뛰어난 정도가 아닙니다. 순식간에 십여 장을 가뿐히 움직이는 놈입니다. 거기다 보법은 바로 옆에 있다고 해도 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그런 실력으로 어째서 이 정도의 피해만으로 그치고 있는지가 의아할 정도입니다. 놈이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의 몇 배에 달하는 이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폭우정의 범위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놈을 꼼짝 못하게 하지 않는 한 우리만 피해를 볼 확률이 높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그렇게 뛰어나단 말인가?’

    멀리서 보는 것과 실제로 싸우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좌무량은 정호기를 충분히 폭우정으로 제압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예상보다 피해가 적다?’

    달리 노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냉 대주를 원하는가?’

    흑룡문에서 온 이들을 바라는 것이리라.

    어쩌면 그들이 튀어나오게 하려는 도발일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좌기정 대주와 의견을 나눴었는데, 암기나 기습으로는 놈을 잡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놈이 원하는 것이 흑룡문에서 온 이들이라 판단하고 그들을 미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논하던 중, 출정을 준비하라는 궁주님의 명을 받았기에 그것을 준비하느라 일을 마치고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습니다.”

    비영대주의 말을 듣고 나니 좌기정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할 기회도 주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좌기정이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기에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았다. 물러가도록 하여라. 그리고 가는 길에 냉 대주를 오라 이르고.”

    “예.”

    비영대주와 부대주가 방을 나선 뒤 홀로 남은 좌무량은 생각에 잠겼다.

    ***

    “냉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모시도록 하여라.”

    “예.”

    들어선 냉백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어서 오시오.”

    “바쁘실 터인데 어인 일로 보자 하셨습니까?”

    “내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 보자 하였소이다.”

    냉백이 자리에 앉자 좌무량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냉 대주가 선두에 서 주시길 바라오이다.”

    “예?”

    좌무량의 말에 냉백이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허허허! 부끄러운 얘기지만 정호기 그놈으로 인해서 부하들이 하나같이 선두에 서지 않겠다고 하지 뭐겠소? 아까는 이 일로 인해서 싸움까지 날 뻔했소이다. 그것도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가 선두에 서지 않으려고 말이오.”

    말을 하는 좌무량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 같았다.

    “그러니 염치 불구하고 냉 대주께서 선두에 서 주시면 제가 여러모로 작전을 짜는 데 부담을 덜 것 같소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파천궁의 궁주가 치부까지 밝히며 부탁하는데, 면전에서 어찌 아니 된다 하겠는가?

    그렇지만 받아들이기도 무리가 있었다.

    그 속셈이 뻔히 보였고, 정호기의 의도를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무리한 부탁인데도 들어주신다니 감사하오이다.”

    냉백이 잠시 머뭇거린 것을 승낙한 것으로 알아들었는지 좌무량이 일어서서 허리를 숙였다.

    ‘시기를 놓쳤군.’

    뻔뻔하게 나오는 좌무량을 보며 냉백은 속으로 아차 했다.

    여기서 ‘아니다. 나는 승낙한 적 없다!’고 말해도 될 것이지만, 그랬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