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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21화 (122/137)
  • 121화

    “괴, 괴물이다!”

    “도망쳐!”

    그러나 그들의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고함 소리가 끝나 갈 무렵에는 이미 정호기가 그들을 지나쳐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툭.

    붉은 핏물과 잘려진 시신만이 정호기의 발자국처럼 뒤에 남아 있었다.

    불길이 치솟고, 시체가 널브러진 넓은 공터에 정호기가 홀로 서서 정운성 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살아남은 것들은 저리로 도망쳤습니다.”

    정호기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던 정운성이 다시금 주변을 돌아보았다.

    “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참상.

    시체는 널브러져 있고, 피는 내가 되어 흐르며, 임시로 만들어 놓은 주거 공간들은 모조리 부서지거나 불타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단 반 시진 만에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쑥대밭이 된 파천궁의 진영을 보면서 근 한 달에 걸쳐 이곳을 차지하고자 싸웠던 자신들의 노력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절대고수의 위력이란 이런 것이지.’

    구대문파나 흑룡문, 파천궁, 그리고 정파의 여러 세가에는 그들을 대표하는 고수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을 막으려면 같은 급의 고수가 아니면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태력문의 최고수는 정호기의 할아버지인 정재명이었지만, 구파나 흑룡문, 파천궁에 비해서는 모자란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오도방과 다른 문파들을 끌어들여 세를 맞춘 것이었고.

    ‘이 기회를 이용하면 산서의 패자가 될 수 있을지도…….’

    파천궁과 흑룡문이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흑룡문이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파천궁을 쓸어버릴 수만 있다면 혹시라도 파천궁을 대신해 흑룡문과 거래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호기라는 패를 쥐고 있는 상황이니, 흑룡문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 올 수도 있어. 어쨌거나 속히 전서를 날려야겠구나.’

    가문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였다.

    ‘냉백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상황이겠지.’

    “백부님?”

    “응?”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정호기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대로 파천궁을 향해 가시겠습니까?”

    정호기 혼자 해낸 일이었기에 본대는 아무런 피해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냥 기분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일단 이곳을 정비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구나.”

    이곳의 전략적 위치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렇기에 이곳을 점령하고자 그리 노력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한 이삼 일은 걸릴 것 같으니 그때까지 쉬려무나.”

    “예.”

    대답을 마친 정호기가 정운성과 백단향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절벽으로 다가가더니 그곳을 몇 번의 도약만으로 올라가 버렸다.

    “허… 저 정도의 경공이라니. 마치 새와 같지 않소?”

    정운성의 말에 백단향도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러네요. 그나저나 문에서는 연락이 왔나요?”

    -아직 오지 않았소. 하지만 온다고 해도 오늘의 결과를 고려해야 할 것이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백단향이 정운성의 전음을 듣고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저 아이를 정말 서방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백방으로 조사를 해 본 결과 틀림없는 것 같소. 정가장주의 초상을 구해서 확인했는데, 예전 운룡이의 얼굴과 같더이다.

    -서방님은 안전하신 거겠죠?

    -그것에 관해서는 일절 입을 열지 않으니 확인할 수는 없어도 안전한 것 같소.

    대답을 하는 정운성이 정호기가 사라진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설마 변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흑룡문과는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이었기에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 되리라.

    ***

    ‘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단 말인가?’

    그동안 싸움을 하면서 정호기가 잊고 지낸 것.

    바로 힘의 미학이었다.

    ‘강하다는 것은 사람을 모은다. 지금처럼 적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더더욱.’

    혈신으로 중원 정복을 할 당시, 정파는 자신에게 이를 갈았지만 낭인들 중에서는 상당수 자신의 강함에 이끌려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그동안 너무 몸을 사렸어.’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 정체성에 대해서는 이곳저곳에 충분히 준비를 해놨으니 더 이상 미적거릴 이유가 없어.’

    비록 거짓으로 점철된 것일지언정 자신의 등장에 대한 밑밥은 깔아 놨다고 여겼다.

    ‘그 첫 제물은 파천궁 바로 너희다!’

    파천궁이 있는 서북쪽을 바라보는 정호기의 눈은 그 이상을 담고 있었다.

    ‘물론 냉백 너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겠지.’

    궁극적인 복수의 끝은 냉백이지만, 솔직히 시간이 지나면서 정호기는 ‘복수’라는 단어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 일어나지 않은 죽음.

    근거 없는 적대감은 곧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거 근질근질한데?”

    살육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걸까?

    온몸의 피가 먹이를 발견한 늑대와 같이 빠르게 휘돌고 있었다.

    휘이이잉.

    시원한 바람이 절벽을 타고 올라와 머릿결을 나부끼자 정호기는 그 바람을 타고 자신이 날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상황은 어지러운데 어찌 이리 마음은 가벼운가?’

    가족의 안위와 흑룡문의 발호, 그리고 자신에게 걸린 현상금과 태력문의 상황 등,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결코 가볍지 않음에도 정호기는 어째서인지 마음속에 여유가 느껴졌다.

    ‘왜지?’

    절벽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정호기의 마음속은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오만 가지 생각이 가득했는데, 절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은 이후로 그것이 사라진 것이다.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그저 바람에 자신을 맡겼을 뿐.

    ‘깨달음? 아니야.’

    이런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없었다.

    ‘뭐, 어쨌거나 머리는 한결 편하군.’

    깨끗하게 비워진 자신의 내면을 느끼며 정호기는 오랜만에 평화로움을 느꼈는데, 이는 바로 복수라는 허울에서 뛰쳐나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뛰어넘어 뒤를 바라보던 고개를 앞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대상의 전환과 인지의 차이.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금 정호기는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었다.

    ***

    “예? 무당을 말입니까?”

    “그래.”

    조당의 말을 들으며 공손우는 그가 너무 서두른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것을…….’

    한번 결심을 한 조당은 거침이 없었고, 힘을 모으면서도 첫 번째 목표가 어디인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무당이나 소림이 있는 동북쪽이 아니라 아미, 청성, 당문이 있는 사천과 화산, 종남이 있는 섬서를 먼저 손에 넣을 것이라 예상했고 공손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것을 완전히 깨 버린 것이다.

    “무당을 치고 바로 소림으로 간다.”

    “…….”

    “세작들에겐 소림과 붙을 때까지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 이르고, 소림을 공격함과 동시에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 소란을 일으키라 일러라.”

    “뒤는 남기지 않으실 겁니까?”

    “전부를 건다!”

    독재.

    그래도 그간 공손우의 의견과 수하들의 상황을 살피던 조당이었는데, 결심을 굳힌 순간부터 조당은 일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문주님, 무당을 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지만 바로 소림까지…….”

    “그만!”

    공손우의 말을 막은 조당이 그를 바라보았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으로 부딪쳐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다. 각 문파에 침투해 있는 세작들에게 혼란을 조성하는 와중에 벽력탄을 사용하도록.”

    “알겠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천지만개(天地滿開)’였고, 그것은 각 문파에 숨어든 세작들이 벽력탄을 숨기고 들어가 정파의 조사전이나 중요 인물들이 있는 곳에서 터뜨리는 것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고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있는 것이라 비장의 한 수로 여겨지던 것이었는데, 소림을 치기 위해 쓰는 것은 어쩌면 아까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일지도…….’

    무당을 무너뜨린다면 정파는 술렁일 것이고, 바로 소림으로 진격하면 소림을 돕고자 정파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 순간에 자파가 공격을 당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도 치명적인 공격을!

    일단 자신들부터 추슬러야 할 것이었기에 소림에까지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예로부터 소림은 정파 무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굳건한 철옹성으로 여겨진 탓에 쉽게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안일함도 있었다.

    두 가지를 이용해 단숨에 소림을 무너뜨린다면 정파 무림은 공황에 빠지게 될 것이었고, 그런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 되리라.

    “무당에 대한 공격일은 다음 달 보름으로 하겠다. 이동하는 데 있어 최대한 정파 무림의 눈을 돌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예.”

    정파 무림을 속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정호기라는 좋은 핑계가 있기에 공손우는 한결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한 열 명쯤 만들어서 보내면 되겠지. 각기 열 개의 경로와 그 뒤를 잇는 추격자, 그리고 그것에 시선을 빼앗겨 보이지 않는 사각이 된 곳으로 나뉘어 보내면 충분해.’

    이미 공손우의 머릿속에서는 흑룡문과 무당을 잇는 여러 개의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갑자기 이십여 명이나 되는 정 소협의 움직임이라니?”

    보고를 들은 해량 도장이 의아한 듯 해신 도장에게 물었다.

    “중경에서 정 소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기에 알아보니 소식이 들린 곳이 각기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금 더 추적해 본 결과 그 모든 곳에서 정 소협의 모습이 보이고 있고, 그 뒤를 흑룡문에서 바짝 쫓고 있는 상황입니다.”

    “놈들의 수작임은 분명한데…….”

    “아무래도 일을 크게 벌일 모양입니다. 현재 흑룡문에서 정 소협을 쫓는다는 핑계로 나온 인원만 무려 이천여 명에 달하니 말입니다.”

    “허어… 무량수불.”

    이천이라는 숫자가 작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무인들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수였다.

    거기다 그 무인들이 흑룡문 소속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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