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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신 다시 살다!-120화 (121/137)

120화

“더 이상의 의미 없는 죽음은 불필요해. 가문을 위해서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책자에 눈이 간 정운성이 다시금 그곳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정호기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현재 그와 같이 다니던 조개의 죽음이 정파 내부에 은밀히 퍼지는 것으로 보아 정호기도 변을 당하지 않았나 생각됨. 하지만 개방이 정확한 정보를 내놓지 않아 알 수 없음.>

“조개가 죽었는데도 살았다?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을 정리한 정운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있는지,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곧 알게 되겠지. 운중산에서.”

정운성은 이번 운중산에서 최대한 정호기를 앞에 세울 요량이었다.

그리고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게 그가 최상의 기량을 선보이게 할 것이었다.

역용도 하지 않고, 무기도 자신의 무기를 쓰게 하고.

만일 사칭한 것이라면 드러날 것이고, 아니라면 그 힘을 이용해 단숨에 파천궁까지 달릴 생각인 것이다.

***

“하하하! 그래서 말이다, 네 애비가 발에 밟힌 줄도 모르고 한참을 찾았지 않겠느냐? 자칫 그때 익사할 뻔했었지.”

“아버님께서 어렸을 때는 무척이나 작았던 모양이네요?”

“그럼~ 그나마 그 정도라도 큰 것이 열여섯을 넘긴 후부터 자랐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가문을 나가신 건가요?”

정호기의 물음에 정운성이 혀를 찼다.

“흥! 그놈이 끈기가 없어서 그렇지. 그리고 조금만 참으면 되었을 것을……. 쯧쯧!”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가문의 무공은 원래 커다란 몸집에 맞게 초식 등이 갖춰져서 운룡이가 익히기에는 부담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버님과 할아버님이 운룡이에게 맞게 그것들을 손보고 계셨단다. 그러던 와중에 네 애비가 냅다 뛰쳐나가 버린 것이지. 한 서너 달만 더 참았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내공도 가르쳐 주지 않으셨나요?”

“일반적으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기초 내공심법인 조화심공만을 익힌단다. 워낙 성질이 괄괄해서 사고 치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그것으로 외공과 내공의 조화를 이룬 후에야 상위 심법인 태양심법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지.”

“아… 그래서 아버님은 가문의 무공을 하나도 배우지 못하신 거군요.”

“그렇지. 그나저나 그놈이 자식 농사는 잘 지었구나.”

정호기를 아래위로 훑는 정운성의 눈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아까 자세히 살폈지만 어디에서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정호기가 믿음을 주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조사해 보라고 했고, 꼼꼼히 살폈지만 신체를 바꾸는 역체변환술을 펼쳤을 때 나타나는 혈도의 부조화는 발견하지 못했다.

조금씩 믿음이 커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버님을 찾지 않으셨는지요?”

“제 발로 나간 녀석이니 언젠간 스스로 돌아오리라 여겼지.”

“그게 이십여 년이 넘도록 찾지 않으신 이유라고요?”

“응.”

대답을 들으면서 정호기는 어지간히 무신경한 가문이라고 생각했다.

“하하하! 녀석, 설마 그게 이유겠느냐? 사실은 할아버님이 유언으로 스스로 돌아오기 전에는 찾지 말라고 하셔서 내버려 둔 것이다. 똑똑한 녀석이니 우리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격을 갖추면 언젠가는 돌아오리란 말씀과 함께. 그러니 그 황당하다는 표정은 지워라.”

“아, 예…….”

“할아버님은 운룡이가 무공보다는 다른 쪽에 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구나.”

정가장과 같은 상가를 십수 년 안에 키워 냈다는 것이 정운룡의 상인 기질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너에게만 말하는 건데 말이다, 사실 운룡이가 가문을 뛰쳐나간 것은 무공보다는 다른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요?”

“그래. 그 녀석이 집 나가기 전에 잔뜩 취해서는 나에게 왔었거든.”

[난 절대 향이 누이와는 혼인하지 않을 테야!]

“향이라는 분이 누구신데 그런 말씀을 하신 거죠?”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정운성을 보면서 정호기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내 마누라다.”

“예? 백모님요?”

“그래. 아버님께서 은밀히 마누라하고 운룡이의 혼담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놈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야반도주를 해 버렸으니 어쩌겠느냐? 그래서 내가 대신 혼인을 하게 된 것이지.”

“왜 백모님 때문에?”

“흐흐흐! 내일 온다고 했으니 직접 보거라.”

***

“처음 뵙겠습니다, 백모님.”

대례를 올리며 정호기는 정운룡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부친의 입장이라고 해도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니까.

“오냐. 네가 서방님의 아들이라고?”

“예.”

“그만 일어나거라.”

여자답지 않게 걸걸한 목소리를 들으며 정호기가 몸을 일으켰는데, 고개를 똑바로 세웠음에도 백모인 백단향의 턱이 보였다.

고목나무의 매미.

아마도 정운룡과 백단향을 같이 세워 놓으면 딱 그것이리라.

‘할아버님도 그렇지, 어찌 이런 분과?’

아마 손자라도 큰 덩치를 갖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다.

가뜩이나 덩치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는 정운룡에게 있어 백단향은 커다란 재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리라.

“부인, 어떻소?”

“잘 컸네요.”

“허허허! 듬직하지 않소?”

“그래도 뭔가 좀 아쉽네요.”

우시장에서 소 관찰하듯 훑어보는 백단향의 눈길을 받으며, 정호기의 등으로 싸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수다.’

백단향이 풍기는 예기는 정운성보다 날카로웠다.

물론 싸움 직후라든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태도, 마음가짐에 따라 변하는 것이 예기이니만큼 그것만으로 고수와 하수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정호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백단향의 기세를 느끼며 그녀가 매우 뛰어난 고수라 생각했다.

‘이런 여인을 왜 못 본 것이지?’

분명 혈신이었을 당시 태력문과 싸울 때 여인을 본 기억이 없었다.

“집에서 애들이나 보라니까.”

“흥! 그 말씀은 저와 홍붕대를 무시하는 건가요?”

“어허, 그런 뜻이 아니란 것을 알지 않소?”

“알기는 개뿔. 최후의 보루 어쩌고 하면서 홍붕대를 항상 후미에 두려고만 하잖아요. 이번에도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또 가문에 붙들어 두었겠지요.”

남자와 여자가 차별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시되는 일이지만 태력문의 여자들은 그것을 정면으로 뚫으려 애쓰고 있었고,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백단향이었다.

“거, 흠흠, 조카도 있는데 개뿔이라니…….”

“흥!”

아마 백단향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낳았기에 더욱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흠흠! 호기야, 그래, 혼인은 했느냐?”

더 말을 섞어 봤자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운성이 말을 돌렸다.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만, 혼약을 한 상대는 있습니다.”

“어서 일이 빨리 해결되어야겠구나.”

“예.”

그때 백단향이 정호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방님은? 서방님은 어디 계시지?”

“안전한 곳에 계십니다.”

“흐음…….”

대답을 피하는 정호기를 보면서 백단향이 더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 정운성이 그녀의 옆구리를 콕 찌르더니 일어나기를 종용했다.

“조만간 가문에서 연락이 올 것이지만, 일단 운중산에 대한 공격은 내일 하기로 했다. 그러니 푹 쉬어라.”

“예.”

***

정호기를 남겨 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정운성이 백단향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 같소?”

“당신 젊었을 때를 쏙 빼닮았네요.”

말을 하면서 흘겨보는 눈길에 의심이 가득했다.

“어허, 무슨 망측한 상상을 하시는 게요?”

“그렇게 아들, 아들 노래를 부르시던 분이니, 혹시 나 몰래 밖에서 낳으신 것은 아닌가 하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릴랑 그만하시구려. 그리고 솔직히 나보다는 아버님을 더 많이 닮은 것 같지 않소?”

“그런 것 같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제가 보기에는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만… 내일이면 알 수 있지 않겠소?”

***

“이봐, 저게 뭐지?”

“뭐가?”

조면박이 말을 하며 일어나는 찰나, 하늘에서 떨어진 정호기의 도가 그의 몸을 세로로 갈라 버렸다.

“컥…….”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잘린 조면박의 몸이 땅에 누울 때, 옆에 있던 김혀노와 안제철, 이변직의 목도 같이 날려 버린 정호기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쯧쯧… 뭐하는 짓인지.”

아랫도리가 벗겨진 네 사람의 모습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붙어먹을 데가 없어서 이런 곳에서 하나? 쥐새끼 같은 놈들.”

누구와 누가 붙어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씩 쌍을 이뤄 재미를 본 것 같았다.

정호기는 특별히 남색을 하는 이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전장에서 제 할 일을 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었다.

“퉤!”

네 사람의 시신에 침을 뱉은 정호기의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난리 났군.”

정호기의 모습을 봤는지 호각 소리와 경호성이 요란하게 울리며 그의 등장을 알리고 있었다.

좀 티 나게 뛰어내리긴 했지만 이렇게 빠른 반응을 보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경계가 삼엄하긴 한 모양이었다.

“최대한 화려하게라고 했지?”

성동격서의 계를 따라 정호기가 후방의 절벽이 있는 곳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정운성 등이 정면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윳!

머리를 살짝 돌려 자신을 향해 날아온 화살을 피한 정호기가 몰려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감출 것 없다고 했으니, 제대로 한 번 놀아 볼까?”

우웅!

공기가 떨리며 정호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티티티팅!

마치 철갑이라도 두른 것처럼 그를 노리고 날아온 화살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뭐, 뭐냐?”

달려오던 이들 몇몇이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춘 후 정호기를 주시하는 반면, 대부분의 이들은 그대로 무기를 앞세우고 계속 발걸음을 놀리고 있었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이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쾅!

호아를 휘두를 것도 없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정호기와 부딪힌 이의 몸이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처럼 산산이 흩어진 후에야 걸음이 멈춰졌고, 휘둘러진 호아에서 뿜어진 새하얀 강기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두 동강이 난 다음에야 입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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